“열여섯 살 청소년/노동자/학생”의 짧고 비극적인 삶···박이은실 ‘소녀, 농약, 좀비’
‘소녀’는 1972년 경남 지역의 한 반농 반어촌에 가까운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소녀에겐 소아마비를 앓아 어린 시절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는 큰언니와 소녀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작은언니가 있었다. 열여섯 살이 되던 1988년 작은 중학교를 졸업한 소녀는 마산의 산업체 부속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그해 5월 본가로 돌아와 ‘제초제’를 마시고 죽는다. “음독 후 병원에 옮겨졌지만 손쓸 방법이 없었다. 소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엄마, 나 살고 싶어’였다고 전해진다.”
박이은실(아주 작은 페미니즘학교 탱자 전담교수)은 ‘소녀, 농약, 좀비’에서 한 실존 인물의 짧고 비극적인 삶을 불러내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작동한 일련의 사회-생태를 분석”한다.
소녀가 태어난 해 박정희는 10월 유신으로 또 한 번 대통령이 된다. 소녀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1979년 인근 바다에 화력발전소가 들어섰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왔던 이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듬해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소녀가 살던 소도시와 이웃 도시를 잇던 기찻길은 폐쇄됐다.
산업체부설학교 개설 명분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근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명분일 뿐 “가능한 한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가능한 한 저렴한 노동력”을 원하는 국가와 자본의 착취와 이어졌다. 소녀가 다닌 한일여자실업고교가 있던 마산은 “ ‘저렴한 국내의 노동력’을 내세워 ‘외국인의 자본투자’를 독려하고 국내에서 생산된 상품 수출을 장려”하려 만든 자유수출지역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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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기업들은 가난한 청소년들의 향학열을 미끼로 “여성청소년의 노동력을 산업체부설학교라는 제도를 통해 합법적으로 저렴하게 착취”했다. 산업체부설학교는 “임노동을 하는 여성청소년동자들을 저임금 노동자로 활용하면서 통제하는 기제”였다. “ ‘일하며 배우고 싶다’는 향학열을 채워주기 위해 출발”했지만, 여러 회사가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일을 시키면서 이를 현장실습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국·영·수 과목을 비롯한 ‘주요’ 과목은 일반 중고의 3분 2만 이수해도 된다는 규정을 뒀다.
소녀가 죽기 두 달 전인 1988년 3월 충남예덕실업고등학교(충남방적부설학교) 학생들은 학내 민주화와 현장 민주화,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현장관리자의 학생 강간 문제도 제기했다.
소녀가 산업체부설학교로 간 건 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먹여 살려온 부모가 내린 결정이었다.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농산물과 노동력이라는 물질 에너지는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이윤 남기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삼는 사회에서는 가장 쉽게 저렴한 것이 되어버린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도시 공업단지에 값싼 노동력을 무제한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 낮은 곡물 가격을 유지”하려 했고, “빠른 공업화와 수출을 중추로 발전하는 경제체제에서 식량 증산은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쌀 총 수확량이 1960년대 말 대비 30% 이상 증가한 1977년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했다.
이 ‘녹색혁명’ 공신 중 하나가 농약이다. “수출자유지역에서 운영되던 산업체부설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열여섯 살의 한 청소년/노동자/학생은 그해 오월 어느 날 본가로 돌아와 ‘녹색혁명’의 공신인 ‘제초제’를 마시고 제초제가 뿌려진 들판의 싱싱한 풀이 죽듯 죽었다.”
농약이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30년 일제강점기하에서 ‘조선삼공농약사’가 설립되고부터다. 1970년대부터 농약업이 증가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급격히 성장했다. “이후 많은 유기합성농약이 개발되어 사용되어 왔다. 이 중 일부는 생태계 및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문제시 되면서 사용 및 제조가 금지되기도 했다.” 유기합성농약 음독자살은 전 세계적으로도 많이 사용되는 자살방법이다. 전체 자살의 14~20%를 차지한다. 2013년 자료를 보면, 한국사회 전체 자살의 30%가 농약 자살이며 전체 중독 중에서 60%를 차지한다.
박이은실은 “끊임없이 이윤을 남겨 끊임없이 자본을 축적”하려는 자본주의와 “좀비가 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인간들의 몸부림과 줄기차게 급증하며 살아있는 이들을 물어뜯어 좀비로 만들려는 좀비”를 각각 현 체제이자 산물로 연결한다.
“자본주의는 계속 늘어나는 물질적, 비물질적 상품을 위한 시장을 계속해서 만들고 확장하지 않으면, 즉, 경제를 계속해서 성장시키지 않으면 지속되지 못한다.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와 물질은 주로 원주민 거주 지역이나 소위 ‘저개발’ 지역의 상품 개척 경계로부터 추출한다. 뜯어먹는 것이다.”
이 글은 여이연(여성문화이론연구소)이 지난해 말에 내놓은 <신유물론×페미니즘>에 실렸다. “권력의 사회적 관계 안에 담긴 신체들의 구체적이지만 복잡한 물질성”에 주목하는 신유물론자들의 방법론을 가져온다. 어떻게 “사회적인 것이 몸에, 몸이 사회적인 것과 ‘겹쳐’지는지” 보여주려 한다. 박이은실은 산유물론 이론화에 참여하는 이들 중 한 사람인 스테이시 앨러이모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학자들은 실재성과 서사성, 집합성이라는 문제를 어느 하나만 치중해 연구하도록 훈련받는다’”고 비판하면서 제안한 “이를 한꺼번에 다룰 수 있는 분석방법”을 시도했다.
박이은실은 “소녀의 삶과 그녀가 처했던 구체적인 상황을 최대한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 이 16년 동안 무슨 일이 물질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일어났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은 중요하다”며 이렇게 썼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 그저 꿈으로 사라져버리지 않게, 그 삶의 실재성을 다시 한번 붙드는 일이다. 그리고 어떤 개인도 오롯이 개인이라는 섬에서 살지 않으며 수많은 물질들의 연결 속에서 구체적으로 영향 받고 또 줌으로써 삶이 구성된다는 것을 한 번 더 상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문을 쓴 미학자 김남이는 이 글을 두고 “세계적 ‘녹색혁명’, 한국의 산업화, 농어촌과 생태파괴, 화학적 물질인 농약, 그리고 자본주의까지를 한꺼번에 분석의 테이블에 올리고 신유물론이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의 정치학을 시도한다”고 밝혔다.
학자 8명이 <신유물론×페미니즘>에 글을 썼다. ‘젠더에서 성(차)로: 신유물론의 지도 그리기’ ‘새로운 질문들: 물질과 과학기술’ ‘재생산과 섹슈얼리티의 지대’ ‘생명과 죽음, 그리고 얽힘의 실제들’에 관한 글들이 이어진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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