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도 않게 왕을 바보로 만들 만큼 자아도취라도 된 걸까('고려거란전쟁')
[엔터미디어=정덕현] 어쩌다 <여인천하>가 되어버렸을까. KBS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은 낙마해 사경을 헤매는 현종(김동준)이 부재한 틈을 타 원정왕후(이시아)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김은부(조승연)와 원성(하승리)을 전쟁 통에 사리사욕을 꾀한 인물들로 몰아세우는 과정을 그렸다. 거기에는 혹여나 원성에 대해 현종이 마음을 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원정왕후의 질투와 견제도 들어 있었다.
물론 이 이야기에는 정치적인 상황이 더해졌다. 공주절도사로 있으면서 호족들의 위세를 경험했던 김은부(조승연)가 현종에게 호족들을 혁파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고, 이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이 호족 세력들인 관리들의 거센 저항을 맞이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는 전쟁에서 아들 둘을 잃고 현종에게 복수심을 가진 박진(이재용)이 원로대신이자 유력한 호족 가문의 일원인 유진(조희봉)을 부추겨 형부시랑으로 황제와 뜻을 같이 하는 김은부를 내치는데 앞장서는 것으로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원정왕후 또한 유진과 뜻을 함께 하고, 호족을 혁파하려는 현종의 뜻을 막기 위해 김은부가 과거 호족 가문 자제들을 전장에 내보내지 않은 사실을 추궁하고 여기에 강감찬(최수종)을 앞세워 탄핵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현종을 압박하게 만든다. 결국 강감찬에 그토록 의지했던 현종은 끝내 그를 개경에서 떠나라고 말한 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말을 급히 달리다 낙마하는 사고를 겪고 의식을 잃는다. 그렇게 현종이 의식을 찾지 못한 사이, 원정왕후는 현종이 하려던 개혁을 막기 위해 뜻을 같이 하던 신하들을 지방으로 보내버리고 김은부를 죄인으로 만드는 일에 스스로 나선다.
현종이 이상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시청자들만이 아니라 이 드라마의 원작소설을 쓴 길승수 작가도 지적한 바 있다. 낙마하는 상황 같은 건 원작에도 없는 설정이고, 실제 역사에서도 현종은 명군으로 평가받는 인물인데 드라마가 그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질타한 것. 실제로 드라마는 거란군이 물러간 이후, 재차 침공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현종의 무리수를 강조했고, 그 과정에서 원정왕후 또한 무리한 행보를 보이는 모습을 그렸다.
결국 깨어난 현종이 조정을 제 마음대로 유린한 원정왕후와 척을 지게 되고 위기에 몰린 김은부를 구해내기 위해 강감찬이 내놓은 묘안으로써 그의 딸인 원성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과정이 그려졌다. 원정왕후와 원성왕후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진 것으로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정쟁과 궁중 암투로 이어지는 <고려 거란 전쟁>의 새로운 양상이 전개된 것.
길승수 작가가 질타한 내용에 따르면 현종이 강감찬과 척을 지는 그런 일들은 실제 역사와도 다르다고 한다. 환갑을 넘은 강감찬을 극진히 대접했다는 것. 그런데 드라마는 극적인 상황을 만들기 위해 현종이 직접 강감찬의 집까지 말을 타고 찾아와 목을 조르려 하는 장면까지 연출해 넣었다. 어느 정도의 상상력을 더해 풀어낼 수는 있다고 해도 너무 과한 설정이고 무엇보다 이런 설정이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다는 게 문제다. 지난 연말 <2023 KBS 연기대상>을 휩쓸더니 제작진이 자아도취라도 된 걸까.
사실 <고려 거란 전쟁>이 시작부터 흥미로웠던 건, 본격적인 거란대군과의 전쟁 상황을 다각도로 속도감 있게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양규(지승현)는 사실상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존재감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양규가 전투에서 끝내 죽음을 맞이한 이후, 드라마가 힘이 빠진 건 다시 흔한 정쟁과 심지어 <여인천하>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은 궁중 암투가 전개되면서다.
다시 본래 <고려 거란 전쟁>이 보여줬던 '전쟁'의 양상들을 본격적으로 그려나가야 하지 않을까. 강감찬이 좀더 전면에 나서서 재차 전쟁을 일으키는 거란의 대군과 맞서 싸우는 그 과정들을 다시금 펼쳐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괜한 정쟁과 궁중암투 상황을 애써 만들어 심지어 역사가 명군으로 평가했던 인물까지 이상하게 그려내는 무리수는 피해야 하지 않을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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