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베트남전 학살은 그냥 다 거짓말”이라는 정부
정부 대리인단 두 배 늘렸으나 논리는 맹탕
“가해자 특정해야” “57만분의 1” 황당 논리도
실제로는 130개 마을에서 1만명 이상 학살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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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23년 전 찍었다. 41살의 여성이 자신의 윗옷을 들어 왼쪽 옆구리에 깊게 난 흉터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2001년 3월의 어느 날, 베트남 중부에 있는 꽝남성 디엔반현(현 디엔반시사) 디엔안사 퐁니 마을의 한 집에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생존자와 목격자들이 모였다. 사진 속 응우옌티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날 응우옌티탄은 8살이던 1968년 2월12일 자신의 집 방공호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다가 총격을 당한 일을 증언했다.
이날 카메라 앞에서 당혹스런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던 응우옌티탄은 몰랐다. 사진을 촬영하며 취재를 한 기자도, 그로부터 22년 뒤인 2023년 2월7일, 그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원고가 되어 승소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경위와 의도가 불온하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에게 3천만100원과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이후 처음으로 전쟁 중 베트남 민간인을 향해 총격을 가한 불법행위와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23년 전 사진을 찍던 기자와 응우옌티탄은 소송을 예상이라도 했을까. 19일 응우옌티탄의 국가배상소송 항소심 첫 변론기일을 앞두고 피고 대한민국(정부)의 대리인단은 재판부에 낸 준비서면 첫 문장에서 “원고가 소를 제기하게 된 경위와 의도가 불온하다”고 했다. “이 사건 소송은 원고가 아니라 월남에 있는 원고를 찾아간 한겨레21 기자 등이 (응우옌티탄을) 이 사건 소송의 원고로 내세워 대한민국 법정에 대한민국을 피고로 제기한 소송이라고 보여진다”고 했다.
사실관계와 법리를 우선해야 할 변호사들이 ‘불온한 의도’ 운운하며 이를 앞세운 점은 둘째치고, 23년 전 언론사 기자의 취재가 소송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는 식의 주장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황당했다. 이런 식의 태도와 주장은 법정에서도 이어졌다.
19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제1별관 312호에서 열린 응우옌티탄의 국가배상소송 첫 항소심(제3-1민사항소부, 재판장 양환승) 법정에는 10여명 가까운 정부 대리인단이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1심에 비해 두 배 이상의 숫자였다. 1심에서는 정부법무공단과 국방부 법무관(소송 수행자)만 참여했다면, 항소심엔 정부법무공단과 국방부 법무관은 물론 법무부 법무관과 별도의 법무법인 두 곳의 변호사들이 대리인단을 구성했다. 1심에서의 패소를 크게 의식해 의욕적으로 해보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1심 결과를 뒤집을 만한 증거와 주장은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57만건의 작전을 했다고?
정부쪽 대리인은 항소이유를 설명하면서 “국군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총 32만명이 참전해 57만건의 작전을 수행했다”는 말부터 꺼냈다. 57만건의 작전이라니. 당시 한국 정부는 1964년 9월1일부터 1973년 3월23일까지 32만여명의 국군 병력을 파병했다. 기간으로 치면 8년 7개월인데 이를 최대 3130일로 잡아도, 단 1일도 쉬지 않고 매일 182건의 작전을 소화해야 57만건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국방부가 펴낸 파월한국군전사를 보면, 파병 병력(4만9869명)이 가장 많았던 1968년 한해의 총작전 수가 120여건이다. 정부 대리인단은 중대 또는 소대급 단위의 일일 임무 수행 일지 내용조차 다 개별 작전으로 처리한 것인지, 이상한 계산법을 들이댔다. 570,000 대 1, 즉 그만큼 한국군의 불법행위를 사소하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사건으로 치부하려고 이런 대비법을 쓴 것일까.
“국군이 이런 57만 건의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중에 지금 이 사건은 한 건, 그 한 건 중에서도 특정도 안 되는 가해자 1명의, 고의가 있었는지 과실이 있는지도 확인도 안 되는 그 상황에서 피해자와 피해자 오빠 정도의 진술만 가지고 이렇게 엄청난 행위에 대해서 사실인정을 과감하게 하고 국가배상을 인정하는 거는 부당하고 정의에 반한다는 게 취지이다.” 1이라는 숫자를 10,000으로 키워본다. 베트남전쟁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가 실제 130개 마을에서 1만명을 넘는다는 통계에 근거해서다. 어쩌면 응우옌티탄은 57만분의 1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 1만분의 1인지도 모른다.
정부 대리인단 보강은 했으나 준비는 허술
정부 대리인단은 인력을 대거 증강했지만 준비 정도는 허술해 보였다. 응우옌티탄이 한국군의 총격 때문에 다치고 마을 주민 74명이 죽은 1968년 2월12일 퐁니·퐁녓 사건과 관련해 정부 변호인단은 “응우옌티탄과 그의 오빠 진술만 들었다”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마을 주민, 한국군, 미군 등 수많은 이들의 진술이 1심 법정에 제출되었다. 작전을 수행한 한국군 참전군인이 직접 법정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정부 대리인단은 이 증거들을 알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새로운 주장은 ‘한-월(베트남) 청구권 협정’이었다. 정부 변호인단은 “한-월 청구권 협정을 참고해 여기서부터 법적 논의가 이뤄져야 하는데 원심에서는 한-월 군사 실무약정서만 이야기하고 이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월 청구권 협정이란 1967년 1월16일 체결된 ‘대한민국 정부와 월남공화국(남베트남) 정부 간의 군대 구성원에 의한 공무 집행 중의 인명피해 및 정부재산손실에 대한 청구권 협정’을 일컫는다.
정부 대리인단의 주장대로 두 나라간 청구권협정은 원심에서 다뤄지지 않았지만 유효하지 않다는 게 원고쪽 대리인단의 설명이다. 원고쪽 대리인단의 임재성 변호사는 “협정 자체에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등의 내용이 전혀 없고, 청구권협정 이후 체결한 1969년 실무약정서를 보면 ‘개인의 청구권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시적으로 기재돼 있다”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또 “한-월 청구권협정에 대해서 1심에서 주장도 못하다가 인제 와서 하는데, 심지어 협정에도 없는 내용이라 너무 억지스럽다”고 덧붙였다.
1심 때 정부 대리인단은 청구권협정이 아니라 한-월간 군사 실무약정서를 ‘소 제기 배제’의 근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실무 약정서 등만으로 베트남 정부가 자국민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포기하였다거나, 국가 간 합의에 따른 배상 방식 외에 피해자가 직접 대한민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권리를 포기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상호보증·소멸시효 등 똑같은 논리 반복
그 밖에도 정부 대리인단은 상호보증·소멸시효 등을 얘기했으나 이 역시 1심 재판부가 명쾌한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상호보증은 베트남인이 배상을 받는 것처럼 베트남전 당시 상해를 입은 한국 군인이 베트남 정부에 손해배상 소송을 요청할 수 있냐는 문제다. 1심 재판부는 “당해 외국에서 구체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에게 국가배상청구를 인정한 사례가 없더라도 실제로 인정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상태이면 충분하다”며 정부 주장을 배척했다. 소멸시효에 관해서도 “이 사건 피고(대한민국)가 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손해배상청구 등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는 경우, 국가가 소멸시효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정부의 소멸시효 주장을 배척한 것이다.
정부 대리인단의 주장 중 눈에 띈 부분은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였다. “특정도 안 되는 가해자 1명”이라는 표현도 썼다. “이렇게 사람이 죽거나 다친 중대한 불법 행위에 있어서 사람을 특정할 수도 없는 경우에, 어떻게 이렇게 책임을 인정할 수 있는지, 왜냐하면 사람을 특정해야 고의가 있었는지 과실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총격을 당하던 당시 그곳에 있던 부대가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1대대 1중대라는 사실은 2000년부터 언론보도뿐 아니라 그해 비밀해제된 미 국방부 문서를 통해서도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정부 대리인단은 총을 쏜 군인의 이름과 군번 정도는 알아야 국가 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1950년대 한국전쟁기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가해 군인이 특정된 적은 거의 없다. 부대의 특정만으로도 사실관계 입증은 충분하다. 국정원의 불법구금과 인권침해 사건에서도 수사관의 실명을 특정해야 국가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나온 적은 없다.
베트남 사람들은 56년간 거짓말로 입 맞췄나
배상 문제를 떠나 정부 대리인단의 결론은 기본적으로 ‘원고의 주장은 신뢰할 수 없다’는 취지다. 준비서면에서는 베트남 쪽 자료가 ‘공산당 자료’라 믿을 수 없다고도 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응우옌티탄을 비롯한 퐁니·퐁녓 마을 주민들은 1968년 2월12일 사건 이후 조직적이고 지능적으로 입을 맞춰 56년 동안 거짓말을 해온 셈이다. 한겨레는 2001년 현장을 찾아 그러한 거짓말로 대한민국에 국가배상소송을 진행하도록 부추겨 마침내 응우옌티탄을 한국의 재판정에까지 오게 한 셈이다.
항소심 재판장은 항소이유를 다 들은 뒤 “(정부 대리인단이) 쟁점별로 다 다툰다는 취지”라며 “증거들의 신빙성이 중요한데 뭘 할 거냐”고 물었다. 정부 대리인단은 “증인을 여러 방면으로 모색하고 있다. 확정되면 증인 신청서를 내겠다”고 했다. 원고 쪽 대리인단은 정부 대리인단의 증인이 결정되면 그에 맞춰 대응하겠다고 했다. 이날 참전군인 단체인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가 신청한 재판 보조참가신청은 불허됐다. 항소심은 2월 법원 인사로 인해 이후 재판부가 변경되어 진행될 예정이다. 다음 변론기일은 4월5일 오전 10시로 잡혔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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