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시신 없는 살인 사건’ 육절기와 함께 사라진 여인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끝까지 부인했지만 CCTVㆍ디지털 포렌식 등 과학수사로 ‘덜미’
(시사저널=정락인 객원기자)
조선시대 수사기관에서는 죽은 시신의 독살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은(銀)을 사용했다. 은이 독약의 주원료였던 비소나 질산염에 반응해 색깔이 검게 변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과학수사의 한 기법이었다.
경찰의 집 수색 통보 후 갑작스런 불길
우리나라는 195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과학수사의 장을 열었다. 그 후 과학의 발전과 함께 수사 방법도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했다. 과학수사의 성과는 놀랍다. 영원히 미제로 남을 것 같던 사건이 속속 해결되고 있는데, 이것도 과학수사 덕분이다. 완전범죄를 노리던 범죄자들이 진보한 과학수사 앞에서 속속 덜미가 잡히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는 박아무개씨(여·67)가 살고 있었다. 마당 한쪽의 별채 가건물에는 김아무개씨(59)가 오랫동안 세 들어 지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씨는 새벽예배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며 깊은 신앙생활을 해왔다.
2015년 2월4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박씨가 실종된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 함께 가기로 했던 같은 마을에 사는 교인이 찾아왔지만 박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 생활 패턴으로 보면 갑자기 사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박씨의 아들은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자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박씨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부터 수색에 들어갔다.
본채에 이어 별채를 수색하려고 하자 김씨가 막아섰다. 그는 계속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협조하지 않았다. 경찰은 더는 미룰 수 없으니 2월9일 수색하겠다고 하루 전에 통보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박씨 집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근처 논밭을 수색하던 경찰이 달려갔지만 이미 불길에 휩싸여 손을 쓸 수 없었다. 본채 일부와 별채 전체가 타버렸다.
불이 나고 한 시간 후에 나타난 김씨, 그의 행동이 수상했다. 15년 동안 살던 집이 흔적도 없이 불탔는데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태연하게 "가스히터를 틀어놓고 간 것뿐인데 불이 났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때부터 김씨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사건 담당부서를 여성청소년팀에서 강력팀으로 넘겼다. 당초 실종 사건을 살인 등 강력사건으로 판단한 것이다. 유력 용의자는 김씨였다.
경찰은 실종된 박씨와 김씨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 집중했다. 우선 마을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를 천천히 돌려가며 분석했다. 박씨가 2015년 2월4일 오후 8시20분쯤 교회 셔틀버스를 타고 집 근처인 정남면 오일리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하차해 집으로 가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포착됐다. 이후 박씨가 집을 나가는 장면은 없었다.
그러다 김씨의 수상한 장면이 포착된다. 그는 박씨 실종 당일에 박씨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자신의 1톤 화물차인 더블캡 포터(흰색)를 몰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런 정황으로 보면 박씨와 김씨 모두 집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김씨가 트럭을 몰고 집을 빠져나갔는데, 트럭 뒷좌석에 전날에는 없었던 상자가 눈에 띄었다. 뿐만 아니라 짐칸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도 있었다. 김씨가 향한 곳은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지인이 운영하는 공장이었다. 그는 이곳에 차를 세우고 짐칸에 있던 기계를 내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나온다.
집주인에 연정 품고 토지보상금까지 노려
김씨의 행동은 점점 의심을 더해 갔다. 그는 공장에서 나와 어디론가 향했는데, 차로 몇 분 거리에서 약 3시간을 머물렀다. 이후 황구지천 둑길 CCTV에 포착됐는데, 뒷좌석에 있던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경찰은 이때 김씨가 상자 안에 들어있던 시신을 처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김씨를 범인으로 특정하고 증거 확보에 주력한다. 김씨가 찾아갔던 공장에서 트럭 짐칸에 실려있던 기계의 정체가 정육점에서 고기를 썰 때 사용하는 '육절기'라는 것을 확인했다. 경찰이 찾아갔을 때 육절기는 공장에 없었다. 박씨 집에 화재가 발생한 다음 날 밤에 김씨가 다시 찾아와 육절기를 가져간 것이다. 그는 이날 트럭에 육절기를 싣고 서울로 향했는데, 다시 화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육절기가 없었다.
김씨가 박씨를 살해한 후 시신을 처리했다는 정황은 여기저기서 나왔다. 화재 분석 결과 인화물질에 의한 방화로 결론 났다. 상자가 실려있던 트럭 뒷좌석에서는 박씨의 혈흔이 검출됐다. 육절기를 내려놨던 공장과 절단기 성능을 실험한다며 잘랐다는 나무 토막에서도 박씨의 DNA가 나왔다.
경찰은 김씨를 방화 등의 혐의로 긴급체포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인다. 하지만 그는 박씨 살인 등의 추궁에 "나는 모른다" "나는 아니다"를 연발하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시신과 범행도구인 육절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씨를 살인범으로 몰아붙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살인이 의심돼도 시신이 없으면 유죄를 입증하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경찰은 김씨가 시신을 유기했을 것으로 보이는 하천에 대규모 인력을 투입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 마지막 희망은 범행도구로 추정되는 육절기를 찾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이것을 어디에 버렸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단서가 있다면 김씨가 공장에서 육절기를 회수한 후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기까지의 행적이었다. 이 구간 어느 지점에서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워낙 지역이 넓어 인력을 투입해 수색에 나설 수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던 경찰은 김씨의 동선을 분석해 의왕이나 수원 지역을 유력한 장소로 특정했다. 그리고 의왕시 청계산 인근에서 육절기에서 분리해 버린 톱날이 발견되자 수사가 활기를 띤다. 이제 육절기 몸체를 찾는 일만 남았다. 경찰은 육절기를 가장 자연스럽게 버릴 수 있는 곳은 고물상이라고 판단했다.
이때부터 의왕과 수원 지역 고물상을 뒤지기 시작했고, 기적처럼 수원의 한 고물상에서 문제의 육절기를 찾아낸다. 감식 결과 육절기의 단면 100여 곳에서 박씨의 피부, 뼛조각, 혈흔, 근육 등이 무더기로 나왔다.
묵비권 행사했으나 트럭에서 '혈흔' 나와
경찰의 보강수사에서도 새로운 사실들이 추가로 드러났다. 김씨의 컴퓨터(PC)에 대한 디지털 포렌식 분석 결과 인터넷을 통해 '인체 해부도' '인체 해부학' 등 관련 내용과 범행도구로 추정되는 '육절기' '골절기' '띠톱' '민찌기' 등을 검색한 사실도 확인했다. 할머니를 대상으로 한 음란물도 다수 발견됐다.
김씨의 범행동기를 추정할 수 있는 정황도 나왔다. 박씨의 남편은 사건이 발생하기 약 5개월 전에 사망했다. 평소 박씨에게 연정을 품어왔던 김씨는 이때부터 노골적으로 애정 공세를 펼친다. 박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집에서 나가 달라고 요구했다. 이 와중에 박씨가 토지보상금으로 1억9000여만원을 받자 범행을 결심한 것으로 추정됐다. 김씨는 이전에 파산선고를 받아 돈이 절실했다. 박씨는 이 돈으로 벽돌집을 지어 노후를 보낼 생각이었지만 김씨는 이걸 노렸던 것이다.
김씨가 인터넷 중고거래를 통해 13만원을 주고 육절기(높이 60cm, 무게 40kg)를 구입한 것도 박씨가 토지보상금을 받은 후였다. 그러니까 김씨는 최소 1주일 전부터 범행을 계획하고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김씨는 또 특허를 출원하는 등 전기와 컴퓨터 분야에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경찰은 김씨가 박씨를 본채에서 불상의 방법으로 살해한 후 별채로 옮겼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어 미리 구입한 육절기를 이용해 시신을 잘게 훼손한 후 여러 개의 상자에 나눠 담아 인근 개울가에 유기했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김씨는 수사 과정에서 범행을 전면 부인했고, 불리한 질문에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육절기 용도에 대해서도 "나무공예를 하려고 구입한 것이고, 열흘 만에 고물상에 버린 것은 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짐칸에서 자꾸 덜컹거렸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경찰은 보강수사를 벌인 후 사건 발생 약 4개월 만에 김씨에게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를 추가로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1심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 내용을 인정해 김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시간에 피고인은 (피해자가 거주하는 본채 옆) 별채에 있었고 다음 날 여러 개의 상자를 싣고 외출했다. 그 트럭에서는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됐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의 범행 수법이 매우 잔인하고 피해자의 인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범행을 부인하고 자신의 책임을 경감시키려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 반성의 기색이 전혀 없어 피고인을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할 필요가 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김씨는 여기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으나 항소심과 대법원도 원심을 인용해 형량을 확정했다.
■완전범죄 무너뜨리는 첨단 과학수사 기법들
최근 장기 미제 사건들이 하나둘씩 해결되고 있다. 여기에는 수사관들의 노력도 컸지만 1등 공신은 첨단 과학수사 기법이다.
경찰이 지문감식에 의한 신원 확인을 범죄수사에 활용한 것은 1948년부터다. 그동안 지문 채취기법과 감정기법을 지속 발전시켜 2010년에는 지문감정 분야 'KOLAS(한국인정기구로 미국·영국 등 회원국과 상호 인정 가능) 인정'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2010년부터 해결되지 않은 현장 지문 재검색을 실시했고, 살인 등 중요 미제 사건에 대해 재검색을 실시하면서 많은 건을 해결했다.
현재 범죄와 관련한 신원 확인을 위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는 '지문감식' 외에도 '유전자(DNA) 감식'이 있다. DNA는 인체 정보의 보고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뿐만 아니라 체질과 질환에 관한 정보도 담겨있다. 때문에 범죄 현장에서 DNA 확보는 사건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유전자 감식으로 해결한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화성 육절기 살인'이다.
과거에는 DNA 분석으로 신원만 확인하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추하는 '행동 수준' 분석도 가능해졌다. 범죄 현장에서 발견한 DNA로 범인의 나이와 행동방식 등을 그려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또 범죄 현장에서 채취한 DNA를 통해 몽타주를 만드는 기술로까지 발전했다. 경찰은 앞으로 첨단 과학수사 기법을 총동원해 억울한 범죄 피해자가 없도록 범인을 끝까지 추적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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