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간병, 셀프 효도와 내 가족 챙기기의 줄타기

한겨레 2024. 1. 2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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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소소의 간병일기
내 가정 돌보기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사랑이라는 말로 간섭하지 않고, 부부라는 이름으로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따로, 또 함께 행복하겠습니다.”

2019년 9월 혼인하던 날, 나와 남편은 하객 앞에서 이렇게 서약했다. 배우자와 나를 동일시하지 말자, 나와 배우자는 개인이라는 각각의 원에 ‘부부’라는 교집합을 둔 것이다. ‘부부는 함께’라고 생각하는 남편은 100% 동의하진 못했지만, 나의 부부관은 그랬다. ‘간섭’, ‘강요’, ‘따로’라는 단어에서 보듯,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또 가족 구성원으로서 함께하고 싶었다.

결혼, 합집합 아닌 교집합

이는 혈연관계인 원가족과 법률관계인 사회적 가족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의 원가족과 남편의 교집합은 나, 남편의 원가족과 나의 교집합은 남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누군가의 합집합이 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고서는 혼자 친정에 갔다. 또 각자의 원가족에 행사가 있을 경우엔 당사자가 일정을 조율하자고 했다. 이를테면 시가에 제사가 있을 경우, 남편이 시가에 가는 교통편을 예매하거나 시어머니와 상의해서 제사 상차림 규모를 정하는 식이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효도는 셀프’고, 원가족보다 내가 새로 꾸린 가족을 우선순위에 두는 건 기본이었다.

결혼생활 2년 동안 나름 잘 유지됐던 이 철학은 엄마가 아프면서 균열이 생겼다. ‘효도는 셀프’라는 원칙은 잘 지켜졌다. 발병 초기 엄마는 한달에 몇차례씩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직장인인 나와 첫째 여동생, 돌쟁이를 기르는 둘째 여동생이 매번 병원에 동행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달에 몇차례 연차를 낼 때마다 괜히 회사 눈치가 보였지만, 나는 남편에게 엄마와 함께 병원 진료를 가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 행사가 아닌, 간병할 때 남편과 함께 엄마를 방문하지도 않았다. 남편은 “간병 부담을 나누지 않는 게 서운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남편에겐 간병과 관련해서 어떤 역할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나는 남편의 심기를 살피는 안테나를 자주 세웠다. 간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스파크만 튀면 대형 화재가 발생할 것 같아 아슬아슬했다. 내 간병 몫은 주 2~3회 엄마를 방문해 식사를 챙기고, 집안일을 하고, 말동무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주로 퇴근 뒤 평일 이틀, 쉬는 주말 하루가 엄마를 위해 할애됐다. 나머지 평일 저녁은 야근 등으로 바빠 실제 내 개인시간이나 부부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주 6일 동안 방전된 나는 쉬는 주말 하루 소파나 침대에 귀신처럼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즈음이었다. 남편이 떠밀리듯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된 건.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시간을 내지 못하는 내 탓에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진 남편은 주말엔 친구들과 캠핑을 가고 평일 저녁엔 권투나 드럼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에게 부러운 일정일 수 있지만 문제는 이것이 비자발적이라는 데 있었다. 남편은 나와 달리 ‘부부’의 방점을 ‘함께’에 찍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뿐 아니라, 집 안 환경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보자며 1년 동안 배달 음식 대신 집밥을 해먹던 습관은 다 어그러졌다. 플라스틱은 분리수거함의 칸을 넘어 종이·금속 쪽을 침범해 베란다를 채울 정도가 됐다.

청소 담당인 내가 청소를 등한시한 탓에 집 안도 이전처럼 말끔하진 못했다. 피곤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외출복은 옷걸이가 아닌 화장대 의자 위에 던져졌다. 몇달째 가사노동을 전담하다시피 한 남편은 ‘하우스메이트’ 같았던 내게 결국 “너 힘드니까 아무 말 안 했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 속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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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균실 한달 ‘가족 정비 시간’

자녀를 둔 여동생들의 경우 더 심각했다. 제부들은 동생들이 엄마를 돌보는 동안 육아 부담까지 추가로 져야 했다. 발병 초기 엄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간 제부조차 동생에게 “우리 가족도 좀 챙겨”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말만 안 꺼냈지, 다른 사위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원가족과 새로 꾸린 가족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현명한 줄타기를 하다가 내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았다.

실제 간병은 시간·비용·가사노동 등 모든 부분에서 배우자와 갈등이 생길 소지가 있었다. 노부모 간병비가 부담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2021년 12월 보험연구원 조사를 보면, 부모 간병비를 부담하는 사람은 자녀(69.4%)가 가장 높았다. 간병비 부담을 느낀다는 응답자는 81.5%나 됐다. 우리보다 앞서 저출생,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노간병 문제를 겪은 일본에선 황혼이혼 사유 중 하나로 부모 간병이 꼽혀, ‘간병 이혼’이라는 말까지 있다고 한다. 엄마를 간병하러 병원에 들어가면서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한 건 그가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엄마를 돌보면서 일상을 잃었다’는 간병일기에는 “엄마는 당신이 아기일 때부터 독립할 때까지 일상 없이 살았다” “일상생활 좀 무너진 게 그리 큰 대수냐”는 댓글이 달렸다. 주변 반응도 비슷하다. “뭐가 더 중요한지 생각해라” “당연히 남편들이나 자녀들이 이해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일방적인 이해를 바라는 건 가능하지도, 옳지도 않다.

그래서 엄마가 조혈모세포 이식을 위해 홀로 무균실에 들어간 한달은 우리 세 자매에게 모두 자신의 가족을 정비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남편과 영화를 봤고, 동생들은 그동안 챙기지 못한 자녀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사이, 나는 동생네 식구들과 함께 캠핑을 갔다. 애들은 캠핑장에서 마련한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나머지 어른들은 맥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맞이한 휴가에 양가감정이 들었다. 엄마를 혼자 병원에 밀어 넣고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건가 하는 마음 반, 쉬어서 좋다는 생각이 절반이었다. 그래도 한달 뒤 퇴원할 엄마를 위해 체력을 보충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엄마, 여기 좋다. 퇴원하면 같이 오자.”

엄마한테 사진을 찍어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사진 속엔 나와 남편, 그리고 동생들과 제부, 그의 자녀들까지 웃고 있었다.

소소
갑작스레 ‘엄마 돌봄’을 하게 된 케이(K)-장녀가 고령화사회에서 청년이 겪는 부모 돌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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