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집단살해’ 국제재판, 인류 양심이 걸렸다

정인환 기자 2024. 1. 2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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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자의 참극]남아공, 국제사법재판소에 구속력 있는 가처분 요구… 1월 내 결정 날까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전쟁을 ‘집단살해죄’로 제소한 로널드 라몰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법무장관(왼쪽)과 부시무지 마돈셀라 네덜란드 주재 대사가 2024년 1월11일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공개심리에 출석해 증언을 준비하고 있다. REUTERS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하 협약)은 1948년 12월9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됐다. 1945년 10월24일 창설된 유엔이 채택한 첫 인권 관련 협약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벌어진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같은 참극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인류의 의지를 담았다.

협약 제1조는 집단살해(제노사이드)가 전시는 물론 평시에도 벌어질 수 있으며, 협약 체약국은 국제법상 범죄인 집단살해 방지와 처벌을 위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제2조는 집단살해를 “국민적, 인종적, 종교적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행해진 행위”로 규정하고, 그 유형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집단의 구성원을 살해한다. 둘째, 집단의 구성원에게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를 가한다. 셋째,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 부과한다. 넷째, 집단 내 출생을 막으려 의도된 조치를 부과한다. 다섯째, 집단 내 아동을 강제로 타 집단으로 이동시킨다.

가자 집단살해는 수십 년 폭력의 산물

2023년 12월29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이 집단살해를 저지른다고 국제사법재판소(ICJ·이하 재판소)에 제소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집단살해를 막기 위해 즉각적인 군사행동 중단을 비롯한 9개항에 이르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잠정조치’(일종의 가처분)를 내려주도록 재판소에 요구했다.

남아공의 제소에 따라 재판소는 ‘가자지구에 대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 적용' 문제를 두고 2024년 1월11일과 12일 이틀간 공개심리를 했다. 이른바 ‘남아공 대 이스라엘’ 사건이다. 재판소가 누리집(www.icj-cij.org)에 공개한 심리 내용 전문은 첫날과 둘째날 각각 85쪽과 75쪽 분량이다.

1월11일 오전 10시,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궁에 자리한 재판소에서 첫 심리가 시작됐다. 먼저 발언에 나선 부시무지 마돈셀라 네덜란드 주재 남아공 대사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제도화한 차별을 “인종분리”(아파르트헤이트)라고 규정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광범위하고 제도화한 인권유린이 자행됐음에도 처벌받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은 더욱 대담해졌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이 벌이는 국제적 범죄행위의 빈도와 강도도 더욱 강화됐다”고 말했다.

또 마돈셀라 대사는 “이스라엘의 집단살해는 장기간 벌여온 불법행위의 연장선에 있다”며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75년에 걸친 인종분리,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56년 동안 이어진 점령, (2007년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한 이후) 16년에 걸친 봉쇄를 두고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 가자지구 담당 국장은 ‘침묵의 살인자’라고 표현했다”고 덧붙였다.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력과 파괴 행위는 2023년 10월7일 시작된 게 아니다”라는 얘기다.

1월 내 ‘잠정조치’ 내려질까

이어 로널드 라몰라 남아공 법무장관이 증언대에 올랐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끝장낸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가 1997년 12월4일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에 한 연설을 인용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우리가 하나인 인류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라몰라 장관은 이어서 말했다.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 민간인을 공격하고 인질을 붙잡아간 행위를 단호하게 비난한다. 하지만 특정 국가의 영토에 대한 무장공격이 아무리 심각해도, 또 잔혹한 범죄행위를 동반했더라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협정 위반을 정당화할 수 없다. 10월7일 사건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응은 선을 넘은 것으로, 집단살해에 해당한다. 그 증거를 마주하고, 집단살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협약이 부과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남아공 정부는 이스라엘을 제소했다.”

마돈셀라 대사와 라몰라 장관의 발언에 이어, 아딜라 하심 변호사를 비롯한 남아공 법률가 6명이 차례로 나서 이스라엘의 ‘집단살해 행위’를 조목조목 짚었다. 재판소가 최종 판결을 내릴 때까지 여러 해가 걸리는 게 관례인 탓에, 심리의 핵심은 이르면 1월 안에 결정을 낼 수도 있는 잠정조치로 모아졌다.

남아공 쪽은 재판소가 로힝야 난민 집단살해 제소 건(감비아 대 미얀마 사건)에서 내린 잠정조치 사례를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행위가 집단살해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최종 결론에 도달할 필요가 없다. 혐의 내용의 일부만이라도 협약 위반 소지가 있다면 잠정조치를 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이 벌이는 행태를 분석한 결과, 최소한 일부 행위는 협약 위반에 해당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무차별적 살해 등 이미 협약 위반

첫째, 팔레스타인 주민 살해다.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이 집계한 결과, 2023년 10월7일부터 2024년 1월16일까지 이스라엘군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주민 2만425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70%는 여성과 어린이다. 실종자는 7천여 명인데,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에 갇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2023년 12월6일 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낸 서한에서 “가자지구에 안전한 곳은 없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둘째,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가한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다. 이스라엘 공격에 따른 팔레스타인 부상자는 2024년 1월16일 현재 6만1154명이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세계인권선언 75주년을 맞은 2023년 12월10일 성명을 내어 “가자지구에서 15살 이상 청소년과 성인 남성이 체포돼, 강제로 옷을 벗겨 속옷 차림으로 눈을 가린 채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2024년 1월17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에서 피란민들이 음식을 배급받기 위해 늘어서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 부과하는 행위”는 어떤가? 의약품과 식량 등 인도주의적 구호물품조차 공급이 극도로 제한된 상태에서 가자지구 인구의 85%가량이 강제로 피란길에 올랐다. OCHA 쪽은 1월6일 현재 이스라엘군이 파괴한 가자지구 가옥이 35만5천여 채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2월21일 펴낸 보고서에서 “가자지구 주민 93%가 심각한 수준의 굶주림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했다.

림 알살렘 유엔 여성폭력특별보고관은 2023년 11월20일 낸 자료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여성과 신생아, 영유아에게 가한 폭력행위는 집단살해 협정 위반, 곧 ‘집단 내 출생을 막기 위해 의도된 조치를 부과하는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협약 제2조가 규정한 집단살해죄의 넷째 유형이다.

유엔인구기금(UNPFA)은 1월5일 펴낸 보고서에서 가자지구에서 매일 약 180명의 여성이 출산한다고 추산했다. 앞서 WHO는 2023년 11월3일 가자지구 임산부 15%가량이 임신·출산 합병증으로 치료가 필요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하심 변호사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생명과 재산, 존엄과 인간성에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이 매일 가해지고 있다. 재판소의 잠정조치 결정이 나오지 않는다면 참상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장세력 치부한들 집단살해 명분 되랴

1월12일 속개된 심리에서 이스라엘 쪽 대응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첫 발언에 나선 탈 베커 변호사는 유대인 600만 명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경험부터 입에 올렸다. 2023년 10월7일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 상황도 길고 자세하게 거론했다. 또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 등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이스라엘 쪽은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 통계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믿을 수 없는 출처에서 나온 정보”라고 반박했다. “가자지구 사망자의 상당수는 무장세력이며, 하마스의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도 많고, 민간인 사망자 가운데 직접 교전에 가담한 사례도 있다”고 했다. 이어 “가자지구에서 전투행위를 중단하면 이스라엘은 더는 자기방어를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하마스만 보호하는 꼴이다”라고 주장했다. 남아공의 잠정조치 요청을 기각하고 심리를 중단할 것을 재판소 쪽에 요구한 것은 당연한 결론이었다.

해를 넘긴 가자지구 전쟁이 100일을 넘어섰다. 유엔 총회도, 안전보장이사회도 전쟁을 멈추지 못했다. 미국과 유럽 각국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월7일 복수의 전·현직 이스라엘군 고위 당국자의 말을 따 “가자지구 전쟁이 적어도 향후 1년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미 벼랑 끝에 매달린 가자지구 주민들이 버텨낼 수 있는 기간이 아니다. 무한 폭력과 죽음의 행렬이 이어질 터다. 재판소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인류의 양심이 걸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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