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사상 최고의 커미션을 거부했던 그가 깊고 어두운 색조로 그렸던 이유

심영구 기자 2024. 1. 2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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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그 미술관만이 기획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 전시 <마크 로스코 회고전> (글 : 황정원 작가)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 마크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54년, 주류 회사 시그램은 뉴욕 파크 애비뉴에 권력과 부를 자랑하는 본사 건물을 세우기 위해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스타 건축가를 기용했다. 시그램 측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958년, 로스코에게 일련의 그림을 위촉했다. 당시 현대 미술계에서 전례 없던 액수, 3만 5천 달러가 약속되었다.

그림이 걸릴 공간은 빌딩 1층에 입점할 고급 레스토랑. 로스코는 레스토랑의 구조대로 스튜디오를 개조하고 위촉된 일곱 점을 위해 서른 점을 그리는 등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에 임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의도는 불순했다. 가난과 실패를 오래 경험했고, '한 끼에 5달러 이상 쓰는 것은 범죄'라고 말하던 그로서는 호화로운 식당에서 고가의 식사를 누리며 뻐기는 상류층이 적잖이 못마땅했다. 숨 막힐 정도로 깊고 어두운 색조로 시그램 벽화들을 그리며 그는 말했다.

"그 방에서 밥 먹는 모든 개자식들의 밥맛을 뚝 떨어뜨렸으면 좋겠어. 레스토랑이 내 벽화들을 걸지 않겠다고 하면 그만한 찬사도 없겠지."

이듬해인 1959년, 벽화가 걸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난 그는 돌연 계약을 파기했다. 이후 십여 년이 지나 시그램 벽화 중 아홉 점을 테이트 브리튼에 기증했다. 시그램 벽화들이 갤러리 내 특별히 마련된 '로스코 전시실'에 걸리던 바로 그날, 로스코는 붉은 피 웅덩이 속에 누워 숨진 채 발견되었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팔의 동맥을 잘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로스코는 왜 당대 최고의 커미션을 거부했을까? 연극 <레드>


그날의 식사 후 로스코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 연극 <레드>는 바로 그 질문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무대는 시그램 벽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로스코의 뉴욕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자연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어두운 공간이다. 그림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원했던 로스코는 실제로 그렇게 철저히 자연광을 막고 조도를 조절했다.

마치 바닷속 잠수함 같은 그곳에서 로스코와 가상의 젊은 조수 켄은 시그램 벽화를 그려간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함께 캔버스를 틀에 고정하고, 물감을 섞어 끓이고, 페인트칠을 한다. 간혹 침묵이 흐를 때도 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아버지와 자식, 스승과 제자, 저무는 세대와 떠오르는 세대 간의 대화다.

연극 <레드>의 한 장면. 출처 신시컴퍼니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 그중에서도 비극에 천착했던 로스코는 니체를 읽으라고 켄에게 훈계하면서도 자신이 멸종되어 가는 공룡이 아닐까 우려한다. 그래도 핫하게 떠오르는 팝 아트의 선두주자, 앤디 워홀의 수프 캔은 절대 예술이 아니다, 그런 천박한 상업미술이 예술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켄은 추상 표현주의로 이전 세대인 입체와 짓밟았던 로스코의 젊은 시절을 상기시킨다.

"그때는 신났지만 지금 자기 차례가 되니 물러나기 싫다는 거죠?"

로스코가 주장하는 것은 예술의 순수성과 절대성이다.

"세상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 그림을 감상해야 해."

로스코의 이런 주장에 켄은 집요하게 맞선다.

"하지만 선생님은 대기업에 목돈을 받아 고층 빌딩에 들어갈 고급 레스토랑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소비의 신전에 걸릴 그림을 그리는 현대 미술의 대사제라니, 그만 위선을 인정하시죠!"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둘의 대화는 치열한 설전으로 치닫는다.

연극 <레드>의 작가는 <글래디에이터>, <007 스카이폴>의 시나리오 작가 존 로건이다. 그가 이 연극을 집필하게 되는 데에는 뮤지컬 계의 전설 스티븐 손드하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영화화 작업을 함께 했다. 그때 손드하임으로부터 연극을 써보라는 강한 권유를 받은 로건은 로스코와 <시그램 벽화>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냈다. 화가 쇠라와 그의 대표작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소재 삼아 뮤지컬을 만든 손드하임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탄생한 <레드>는 최우수 연극 작품상, 연출상 등 6개의 토니상을 거머쥐었으며 세계 30여 개국에서 공연되었다. 로건은 <레드>를 손드하임에게 헌정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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