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참석을 거부합니다” 제주 A고의 특별한 졸업식
학생들, 학교장 이름 없는 졸업장 요구 등 강경하게 대처
2024년 새해를 며칠 앞둔 12월 말의 어느 날. 제주의 A고등학교에서 조금 ‘특별한’ 졸업식이 열렸다. 졸업을 앞둔 학교 풍경은 여느 졸업식과 다를 게 없다. 이별과 시작이 교차하는 자리. 반쯤 들뜬 학생들과 꽃다발을 한 아름 안아 든 부모들. 마지막 교가를 부를 땐 눈물이 글썽이는 학생들도 보인다.
평범한 풍경에도 이날 졸업식이 특별했던 이유가 있다. 졸업식은 내내 학교장과 교감이 불참한 가운데 진행됐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학생들이 교장·교감의 참석을 거부했다. 학생들이 받아든 졸업장도 남달랐다. 보통은 졸업장을 수여하는 학교장의 이름이 들어가지만 이날 졸업장에는 학교장의 이름이 빠진 채 학교 이름만 들어갔다. 이 역시 학생들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다.
졸업식은 입학식과 함께 학교의 가장 큰 연례행사이자 경축일이다. 교장과 교감이 모두 참석을 거부당한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졸업장에서 학교장의 이름을 삭제한 것도 ‘파격’을 넘어 ‘파문’에 가깝다. 사실 졸업식 당일 아침까지만 해도 식순에 ‘교장 축사’가 들어 있었다. “참석을 강행할 경우 졸업식을 보이콧하겠다.” 학생들의 강경한 태도에 교장이 결국 물러섰다. A학교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학교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 학교장은 ‘쉬쉬’
사건은 지난해 10월 중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 체육관에 딸린 여자 화장실을 이용하던 교사가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화장실에 놓여 있는 ‘갑 티슈’ 한 통.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에 열어본 교사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갑 티슈 안에는 동영상 녹화 기능이 켜진 스마트폰이 들어 있었다. 그는 즉시 교장에게 ‘화장실 내 불법 촬영’ 사실을 알렸다.
해당 화장실은 교사·학생 모두 이용하는 곳이다. 학교폭력(학생이 피해자)인지 교권침해(교사가 피해자)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 교육부의 ‘2023 학교 내 성희롱·성폭력 사안 대응 업무 가이드(성폭력 가이드)’를 보면 교내 성폭력 범죄 발생 시 바로 교육청과 수사기관에 통보 및 신고하도록 돼 있다. A고 사건도 발생 당일 통보와 신고가 모두 이뤄졌다. 이튿날 불법 촬영한 같은 학교 학생(가해자)이 집 근처 지구대를 찾아가 자수하면서 사건이 본격화됐다. 사건 발생 이후 최근까지 석 달여간 제주 지역사회를 뒤흔든 이른바 ‘A고 불법 촬영 사건’의 시작이었다.
사건은 가해자의 자수로 쉽게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사건 처리 과정에서 학교·도교육청·경찰이 약속이나 한 듯 부실 대응을 거듭했다. 사건의 진상규명이 늦어졌고, 피해자들을 향한 2차 가해까지 발생했다.
교육부의 성폭력 가이드는 처음부터 작동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시 가장 먼저 취해야 하는 조치가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조치임에도 지켜지지 않았다. 가해자는 지구대에 자수한 당일에도 등교했다. 경찰은 “무죄 추정원칙”이라며 등교를 막지 않았고, 교장은 방관했다. 이 때문에 불법 촬영 피해 교사가 교실에서 가해자와 만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피해 교사는 이튿날 병가를 냈고, 그제야 가해자는 ‘병결’로 처리돼 등교가 금지됐다.
며칠 뒤에는 교감이 황당한 요구를 했다. 또 다른 피해 교사 등 여교사 2명에게 “가해자 가정방문을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학교폭력 진술서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찾아가 대면하라고 요구하는 건 명백한 2차 가해다. 피해 교사 등은 교감(남교사)이나 학교 경찰(스쿨 폴리스)의 동행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가정방문에서는 가해자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등 위압적인 분위기가 연출됐다. 교감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 교사의 거듭된 병가 요청도 번번이 불허했다. 피해 교사가 직접 대체 기간제 교사를 구한 뒤에야 병가를 낼 수 있었다.
교장은 사건을 감추는 데 급급했다. 피해자인 여교사들이 사건의 진행 결과 공개 및 공론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 사이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리고 가해자에 대한 퇴학 처분이 내려졌다. 학교 측의 사건 은폐 의혹에 대해 문제 제기(제주교사노조) 및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그제야 교장은 여교사들과 면담을 갖고 교내 사건의 발생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사건 발생 20여 일이 지난 뒤였다.
■도교육청은 우왕좌왕, 경찰은 ‘부실 수사’ 의혹
경찰 수사 결과 가해자는 9월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교내 화장실 3곳에서 불법 촬영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불법 촬영된 신체와 얼굴 등 피해 사실이 확인된 피해자만 교사·학생을 포함해 50여명이다. 그럼에도 학교는 사건 발생 한 달이 넘도록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범죄 발생 사실을 숨겼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서”(학교장)라는 이유를 댔다. 학부모들에게 범죄 사실을 알리는 가정통신문이 발송된 건 지난해 11월 말이었다.
제주도교육청은 학교 관리·감독과 지원 의무가 있다. 이번 사건은 교내 성범죄가 학교폭력인 동시에 교권침해인 사안이다. 사건 발생 초기부터 도교육청 유관 부서의 통합대응이 필요했지만 우왕좌왕했다. 그 결과 피해 교사와 피해 학생에 대한 보호와 지원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학부모와 학생, 교사 등이 자구책으로 ‘불법촬영피해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대응에 나섰다. 이후 대책위 요구로 도교육청 주최 공청회가 열렸고, 최근까지 양측이 주기적으로 만나 후속 대책을 논의 중이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피해자가 다수이고, 교사와 학생이 모두 피해자인 까닭에 관련 매뉴얼이 없어 초기 대응이 미숙했던 부분이 있다”며 “현재 대책위와 소통하며 교내 안전 대책 마련 및 피해자 지원 등 후속 조치를 이행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에는 부실 수사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피해 교사 등에 따르면 경찰이 사건 관련 피해자와 가해자 조사에 착수한 건 11월 초였다. 가해자가 자수한 지 10여 일이나 지난 뒤다. 사건의 주요 단서가 될 가해자의 스마트폰, SNS 계정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나 포렌식도 뒤늦게 이뤄졌다고 피해 교사 등은 주장한다. 대책위가 경찰서를 항의 방문해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초 학교에서 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한 경찰의 수사 결과 설명회가 열렸다. 대책위 관계자는 “경찰이 초기에는 피해자 확인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피해자 모두를 ‘신원 미상’으로 처리하려고 했다”며 “사건을 축소해 수사하려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밝혔다. 수사를 진행한 경찰 관계자는 “포렌식 등 과정에서 초동대응에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었지만 피해 및 혐의 사실을 모두 밝혀 검찰로 송치했다”며 부실 수사 의혹을 부인했다.
■의연했던 학생들, ‘교장 없는 졸업식’으로 ‘응답’
검찰은 가해자에 대해 징역 7년, 단기 4년, 취업제한 10년 등을 구형했다. 선고 공판은 본래 지난 1월 17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연기됐다. 검찰 추가 포렌식 과정에서 가해자가 불법 촬영물을 10여 차례 이상 유포한 혐의가 새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불법 촬영물 유포 혐의 등을 기존 혐의와 병합해 재심리할 방침이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더 무거워질 수 있다.
재판과정에서 피해 교사와 학생들은 제대로 된 법률 지원을 받지 못해 특히 어려움을 겪었다. 도교육청은 처음엔 피해 교사에 대한 변호사비 지원을 거부해 노조에서 변호사 비용을 지원했다. 교사가 아동학대 혐의 등으로 피소된 경우에만 변호사비를 지원하도록 돼 있는 규정 탓이다. 파문이 확산되자 도교육청은 “일부 비용을 지원하고, 관련 제도의 개선도 정부에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피해 학생과 학부모들도 십시일반으로 변호사비를 모금했다가 도교육청으로부터 뒤늦게 법률지원을 받아 소송을 진행했다.
어른들이 ‘못난’ 모습을 보이는 동안 정작 의연했던 건 학생들이다. 학교가 수능을 이유로 늑장 가정통신문을 발송하기 전 학생 상당수는 불법 촬영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피해자일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큰 동요 없이 수능을 치러냈다. 사태를 보고만 있지도 않았다. 학생자치회는 학생들의 피해 상황과 원하는 후속 조치 등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였다. “화장실 가기가 두렵다”, “가만히 있으면 동영상 녹화·중지 버튼음이 자꾸 들리는 것 같아 괴롭다” 등의 호소가 잇따랐다. 학생자치회는 설문조사를 근거로 도교육청과 대책위의 회의에 매번 참석해 학생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교장·교감 없는 졸업식’은 그 결과물이다.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 했던 교장·교감을 향해 학생들이 내놓은 ‘응답’이기도 하다. 이들은 서로의 의견을 물어가며 졸업식을 직접 기획했다. 각 학년 대표가 나와 선후배에게 남기는 말을 전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졸업식 행사 뒤에는 교내 밴드의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강당 한켠에는 포토존도 예쁘게 꾸몄다. 한 학부모는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음에도 졸업식이 초라하지 않게 학생자치회에서 최대한 준비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서로 연대하고 위로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현재 사건 관련 교장·교감에 대한 감사를 진행 중”이라며 “감사가 끝나는 대로 인사(전보) 및 징계 조치를 내릴 방침”이라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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