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승계’ 선고 앞두고 이재용 회장…쉿!
글로벌 반도체 전쟁 중 ‘화제성 소비’ 아쉬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지난해 12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대동하고 부산 부평깡통시장을 방문했을 때다. 이 장면이 찍힌 사진은 ‘재드래곤 짤’로 불리며 소셜미디어에서 화제를 모았다. 이 회장의 소탈하고, 격식 없어 보이는 모습에 친근감을 표현하는 이들이 많았고, 일종의 밈(meme·인터넷 유행 게시물)이 됐다. 언론도 이런 현상을 놓치지 않고 보도했다. 조선비즈의 한 기자 칼럼은 ‘쉿’에서 이 회장의 소통 행보, 인재를 중시하는 경영철학을 끌어내기도 했다.
이재용 회장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만 보긴 어렵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인수 논란(1996년), 불법 대선자금 제공·X파일 파문(2006년), 증권선물위원회의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판단(2018년) 등 그간 삼성 관련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다수의 언론은 정치적 의도를 주장하며 사태의 본질을 흐리거나, 보도를 하지 않거나 사안과 상관없는 미담 보도로 이슈를 덮는 행태를 보였다. 오는 1월 26일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승계 의혹’ 1심 선고를 앞두고 우연히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삼성에 종속된 언론의 문제를 지적해온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재판을 앞뒀기 때문이 아니라 1990년대 이래로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에 대한 매우 개인적·사적 소재를 대대적으로 보도해온 것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쉿’이나 ‘이재용 패딩 완판’ 등 공적 뉴스 가치가 없는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면서 온라인에서 우호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활용하고 있다. 수사와 재판을 통해 밝혀져야 할 범죄 행위의 본질을 감추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비전 제시 적극적인 글로벌 IT CEO와 비교
심각하게 볼 사안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최고경영자에 대한 우호적 이미지 조성은 기업 경영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대부분 밈은 대중이 재미있어서 따라하는 경향이 크다. 중요한 건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렇진 않을지 모르나 대외적으로라도 조금 서민적인 모습, 평범한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길 원하는 마음이 분명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투영돼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10년 사이 오너 리스크가 끼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에 그 리스크를 줄이려는 측면에서 이미지를 관리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크고 작은 언론사를 가리지 않고 재벌가에 대한 화제성 기사를 쏟아낸다. 그런 기사들이 포털의 대문을 장식하면서 많은 조회 수로 이어진다. 그러면 다시 관련 기사들이 재생산된다. 이재용 회장 관련 기사도 이런 콘텐츠 시장의 생리를 따르고 있다. 다만 국내 최고 기업인 삼성전자의 최고경영자가 떡볶이 먹방이나 장난기 어린 ‘짤’로만 소비되는 건 안타까운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도체 시장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최고경영자로서 어떤 목표와 전략을 갖고 있는지 공개 석상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생산 현장이나 학교 등을 방문해 격려와 덕담을 하는 정도만 알려졌다.
회사 경영과 관련해선 어떤 발언을 했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평가하기도 어렵다. 적극적으로 외부 행사에 참여해 미래 전략을 설명하는 글로벌 IT 기업들의 최고경영자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 젠슨 황이 지난해 5월 대만에서 열린 컴퓨텍스의 기조연설에 나서자 이를 들으려고 많은 인파가 몰렸다. 글로벌 IT 기업 CEO들의 발언 하나하나가 시장을 읽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기 때문이다.
최한수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경제개혁연구소 자문위원)는 “엔비디아, AMD, 인텔을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 업체 최고경영자들은 모두 이공계 출신이다. 이들이 강연이나 행사에 나가서 한마디씩 하면 산업의 판도가 바뀐다. 이들은 적극 나서서 말해주는 게 회사에도 주주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레거시 시장의 강자였던 인텔의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그보다 매출이 작았던 엔비디아는 고공행진하고 있다. 시장을 선도하는 리더라면 해야 할 역할이 있다. 특히 반도체 시장은 ‘칩 워’라고 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시장 재편이 이뤄지는 중이다. 여기서 이재용 회장이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정말 알고 싶지 않나. 그래야 제대로 된 평가도 가능한 것이고. 단순히 떡볶이를 먹고, 밈으로 소비되는 것 같아 아쉽다. (정경유착의) 현상을 정확히 보여주는, 희극 같지만 비극이다.”
제일모직·삼성물산 ‘부당합병’ 관련 1심
법인세 인하, 자회사 배당소득 비과세, 사익편취 관련 총수일가 고발 원칙 후퇴 등 윤석열 정부의 ‘친재벌 정책’이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와 재벌의 정경유착 범죄를 계기로 지배구조 개혁 요구가 컸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제대로 나서지 못한 탓도 크다. 문재인 정부는 2021년 8월 9일 이 회장을 가석방했고, 윤석열 정부는 1년 뒤 광복절 특사로 이 회장을 사면했다. 이 회장은 사면으로 취업제한이 풀리면서 등기이사로 복귀할 수 있게 됐다.
변수는 1월 26일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부당합병’ 관련 재판 1심이다. 검찰은 지난해 11월 결심공판에서 “그룹 총수 승계를 위해 자본시장의 근간을 훼손한 사건”이라며 삼성그룹이 이 회장의 안정적인 승계를 돕기 위해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1 대 0.35의 비율로 합병한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제일모직보다 자산 규모가 3배 정도 큰 삼성물산이 오히려 3분의 1 비율로 제일모직에 합병되는 과정에서 삼성물산 주식을 7% 이상 보유한 국민연금은 찬성표를 던졌다. 결과적으로 이 합병으로 국민연금은 5000억∼6000억원의 손실을 봤다고 추정된다. 삼성 측은 “지배력 강화가 목적이 아니었고 사업적 필요성이 있었다”며 결과적으로 삼성물산 측에 이익이 되는 합병이었다고 주장한다.
최 교수는 “삼성의 논리라면 모두가 (승계를) 고려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행동했는데, 그 모든 결과가 우연에 따라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를 도왔다는 말이 된다. 이미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하도록 (박근혜 정권이 삼성전자의 뇌물을 받고) 국민연금을 동원한 것은 유죄가 확정됐다. 삼성의 주장과 법적으로 확정된 사실 사이 어디에 더 가능성이 있을까. 검찰이 열심히 했다면, 판사가 무죄를 줄 순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유죄를 선고하더라도 재벌 총수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해 풀어주는 사법부 행태를 뜻하는 ‘3·5 법칙’이 이번에도 되풀이될 수 있다. 김남근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변호사)은 “(합병 반대를 무마하기 위한) 시세조종의 규모가 50억원 이상이면 최하 형량이 5년이다. 시세조종으로 유죄판결을 받으면 실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김 변호사는 “삼성 경영권 승계 불법 행위 재판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헌법 이념 구현, 정경유착 폐습 단절, 경영권 승계수단으로 악용되는 계열사 간 부당지원 행위와 감시와 견제 역할을 못 하는 이사회 지배구조 개혁 등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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