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둘이 간 여행, 아빠가 날 버린걸까…11살 딸 두고 어디로?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1. 21.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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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09] 영화 ‘애프터썬’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면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때가 많다. ‘이런 장면이 있었나’, ‘이런 소품도 등장했나’ ‘이런 대사를 했었나’ 새삼 질문하며 새롭게 발견한다. 나이를 먹는 동안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변했기 때문에 영화가 내게 걸어오는 말도 다르게 들리는 것이다. 더 많은 어휘를 공부하고 외국어 방송을 다시 들을 때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애프터썬’은 튀르키예 여행을 떠난 부녀의 이야기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그런데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누구나 ‘다시 보기’를 한다.과거의 기억을 되돌려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마치 영화를 다시 볼 때처럼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좋은 기회를 놓쳤구나’, ‘그 사람에게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와 같은 여러 발견이 있겠지만, 아마 그 중에도 우리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건 이런 깨달음일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었구나.
성인이 된 소피는 여행 도중 언뜻언뜻 비치던 아버지의 어두운 얼굴을 떠올린다. 여행 내내 자상했던 아버지의 얼굴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는 그 두 가지 기억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여성의 고뇌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애프터썬’(2022)은 인생의 변하지 않는 속성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사랑을 받는 순간에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를 때가 많다. 당연한 줄로만 알고 받았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때는 시간이 흘러 ‘다시 보기’를 할 때다. 처음 볼 땐 보이지 않았던 상대의 정성과 희생을 발견하고 가슴이 미어질지도 모른다.
튀르키예 여행에서 소피는 마음에 쏙 드는 카펫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그 카펫을 구매하는 것을 두고 고민했지만, 결국 사줬다. 당시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상황임을 고려해보면,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아빠와 둘이서 튀르키예로 떠난 여행
영화는 30대의 주인공이 캠코더에 20여년 전 담아둔 영상을 보면서 시작된다. 소피는 아빠와 둘이 튀르키예로 떠난 여행에서 캠코더로 두 사람이 보낸 시간을 담아냈다. 캠코더로 딸이 직접 찍은 영상, 그리고 캠코더에 담기지 않은 딸의 기억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관객은 두 영상의 교차를 통해 소피의 부모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아빠가 딸과의 추억 만들기를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했음을 알게 된다.
영화는 두 사람이 튀르키예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담는다. 단조롭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한 구성인데, 그 안에 담긴 서사는 단순하지 않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부녀는 원래 예약했던 것과 다른 방을 받았다. 침대 두 개짜리 방을 예약했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방 교체나 환불이 여의치 않자 아빠는 호텔 측에 간이 침대를 요청해 그곳에서 자게 된다. 또한 최고의 시설이라는 설명과는 달리, 호텔 바로 옆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열악한 환경을 발견한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종종 포개져 있다. 그것은 부녀의 절대 넉넉하지 않은 상황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서적으로 유대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진 출처=IMDb]
아빠는 그것이 못내 미안했지만, 딸은 개의치 않는다. 그저 아빠랑 수영하고, 식사하고, 걷는 시간이 즐거울 뿐이다. 아빠와 이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소피는 부모의 이혼에 대한 자기 감정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실 부모가 다시 합쳤으면 하는 마음을 비치는 것이다. 아빠는 엄마를 가족으로서 사랑하지만 결혼 관계를 유지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딸의 아쉬움을 달래려 한다.
물은 사람을 집어삼킨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함께 나오는 영화에서 물에서 노는 장면이 등장한다면,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물이 자녀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보호하고, 자녀는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곤 상상하지 않는다. 부모를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물을 이와 같은 장치로 사용한 또 다른 영화로는 ‘문라이트’(씨네프레소 30회 소개)가 있다. [사진 출처=IMDb]
언뜻 비쳤던 아버지의 어두운 표정, 삶의 무게 감당하는 중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보면 부녀의 평범한 여행기다. 그러나 어느덧 20년이 지나 당시의 아버지만큼 커버린 딸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조금 다른 결의 여행기가 된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줄곧 상냥했던 아버지는 한 번씩 다른 감정을 드러냈다. 냉담한 반응을 보이거나 자신을 거절하기도 한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애프터썬’은 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크림을 의미한다. 어쩌면 아버지와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주인공의 여정이 애프터썬을 바르는 과정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IMDb]
이를테면, 딸이 카메라를 든 채 “내 나이 때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냐”고 묻자 아버지는 답하지 못했다. 또, 호텔 투숙객들이 노래 자랑을 하는 자리에 딸이 부녀의 이름으로 참가 신청을 했으나 아버지는 나가지 않았다. 그날 밤 내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던 아버지는 딸만 밖에 놀게 두고, 자신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한참 놀다 돌아온 딸이 방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걸 듣지 못했다. 호텔 직원 도움을 받아 들어간 방에서 아버지는 나체로 골아떨어져 있었다.
한 방에서 딸은 앉아 있고, 아빠는 욕실에서 깁스를 풀려 하고 있다. 아버지는 영화에서 상당 시간 깁스를 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고통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여기밖에 없다. 아마 딸과 더 풍성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 낫지 않았는데 풀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딸의 회상이라고 봤을 때,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하며 깁스를 푸는 부분은 상상이다. 아버지는 삶의 딸에게 자신의 우울감과 고통이 전달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출처=IMDb]
아버지는 삶의 위기를 지나는 도중이 아니었을까.딸은 그때의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아버지의 자상한 얼굴과 조립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다. 아버지가 피곤해 딸의 노크 소리도 듣지 못했던 그 밤의 다음 날, 아버지 어깨에 있었던 정체 불명의 상처를 떠올린다. 마침 그날 부녀는 클레오파트라가 독사가 문 것처럼 꾸며 자살했을 것이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딸을 밖에 놀게 둔 채로 바다에 빠진 것처럼 꾸며 목숨을 끊으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지친 몸을 질질 끌며 방으로 돌아온 건 아닐까. 여행 내내 딸을 그토록 배려했던 아버지가, 옷조차 입지 못하고 누웠던 것은 목숨을 앗아가는 바다와의 싸움에 기력을 소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빠는 여행 이후 어떻게 됐을까. 자살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영화 전체가 모호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해석은 열려 있다.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죽음의 충동과 싸워가면서, 아마 촛불이 서서히 꺼지듯 소멸했을 것이다. 여행 도중엔 아버지가 꺼져가는 중임을 미처 몰랐던 어린 딸이 20년 후 이를 발견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그토록 힘든 삶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노래 자랑할 맘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 나이 때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냐”는 물음에 아버지가 바로 답하지 못했던 것은 지금과 같은 어른이 될 계획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는 딸이 자신이 애써 외면 중인 그 질문을 던졌을 때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을 한 것이다. 카메라를 끈 딸에게 아버지는 11살 생일 때 가족 중 누구도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생일이라고 말했더니 어머니께 혼났을 뿐이라고.
아버지 나이가 돼보니, 그의 고통을 이해하게 됐다
딸은 여행객들에게 요청해서 아버지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앞뒤 장면을 보고 추측건대 아마 그날은 아버지 생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아빠의 슬픈 11살 생일 이야기를 듣고 딸이 이를 넘어설 만한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건 아버지에겐 실제로 과거의 상처를 넘어서게 할 만한 선물이었다. 사실은 딸의 존재가 그 모든 걸 극복하게 할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많이 사랑해. 그걸 절대 잊지마’라는 카드를 남겼다. 마치 어딘가로 떠날 사람이 남길 만한 메시지다. 미안해하는 감정이 느껴진다. 어쩌면 아버지가 자살 시도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그날 적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딸이 있음에도 종종 자살 충동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한 사과였을 것이다.

소피는 여행객들에게 부탁해서 아버지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아빠는 감사하면서 미안했을 것이다. 딸은 아빠의 존재를 이토록 기뻐해주는데, 자신은 스스로의 존재가 그다지 기쁘지 않다는 것에 미안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20여년이 지나 갓난 아기의 엄마가 된 소피는 아빠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됐다. 아버지의 자상했던 얼굴과 종종 어두웠던 표정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초현실적으로 연출됐다. 아버지는 딸을 집으로 보내고, 마치 파티장처럼 보이는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춤을 추고 있지만, 표정은 고통을 참는 듯하다. 어쩌면 삶이란 것은 고통을 견뎌내면서 즐겨야 하는 축제인지도 모른다.딸과 신나는 파티를 즐기기 위해선, 조명이 꺼졌을 때 고통을 스스로 삭여야 한다.
개인적 경험, 대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던 나
사실 이 영화를 보는데 대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곤해하는 나는 입학식 같은 것은 갈 생각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 공식 행사에 가족이 참여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다. 어머니가 눈이 안 보이게 되면서 중학교 이후로는 각종 행사에 스스로 찾아오시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아쉬움을 가지지도 않았다. 중고등학교 입학·졸업식과는 달리 대학교 입학식은 안 가도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와 누나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자기 기억에 접속된다. 캠코더로 촬영된 신을 제외한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을 주인공의 상상이라고 봤을 때, 포옹을 담은 이런 순간조차도 주인공의 후회일지도 모른다. 왜 그때 더 세게 끌어안지 못했을까.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그런데 마침 우리 집에 와 계시던 할머니가 입학식 일정을 물어보시고, 한번 가보자고 하셨다. 그냥 할머니의 서울 나들이 중 하나라고 생각해 누나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갔다. 함께 입학식을 봤다.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학교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가 크림파스타를 좋아하신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얼마 전 그때 셋이 찍었던 사진을 우연히 다시 발견하게 됐고, 그제서야 그게 사랑인 줄 알게 됐다. 내가 모시고 갔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는 고맙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딸은 아버지와 함께 태극권을 한다. 초반에는 아빠가 태극권 하는 모습을 창피하게 여겼다.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사랑은 받는 쪽의 미안한 감정으로 완성된다
왜 어린 소피는, 그리고 그때의 나는, 그들의 사랑이 당연한 게 아님을 알지 못했을까. 그건 자식이 자신들의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까지가 그들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게 그들의 사랑이었다. 자식이 자신들의 사랑을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들숨 날숨을 매번 의식하면서 숨을 쉬지 않듯, 살아가는 것과 자신들의 사랑을 받는 건 동의어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미안해하는 감정으로 완성된다. 오랜 시간을 두고 봐야 그게 사랑임을 온전히 알게 되지만, 그때는 어느 차원에서든지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부모에게, 조부모에게, 또는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나를 많이 사랑해줬단 의미인지도 모른다.

소피의 아버지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소피에겐 자신이 못 받았던 사랑까지 합쳐 배로 돌려줬다. 소피의 입장에선 아버지의 사랑을 뒤늦게 깨달아서 아쉽겠지만, 한편으론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아마 소피는 자기 자녀에게 똑같은 사랑을 줄 것이다. 그리고 자녀는 몇 십 년이 지나 소피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 또 다른 사랑이 완성된다.

‘애프터썬’ 포스터.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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