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엄마가 죽은 남매 삶아먹어”…한반도 덮친 ‘대재앙’ 실화라니 [서울지리지]
<숙종실록> 1697년(숙종 23) 음력(이하 음력) 10월 23일의 내용이다. 또 다음은 1년 뒤인 <숙종실록> 1698년(숙종 24) 10월 21일 기록이다. “심한 흉년이 겹친 것이 지금 4년이 되었도다. 살아남은 백성들은 혹독한 질병까지 걸려 봄부터 겨울까지 날과 달로 악화되어 병들지 않은 마을이 없으며, 지금은 옮길 만한 지역도 없구나. 죽은 시체가 겹쳐져 누웠으니, 경사(京師·서울)와 팔로(八路·전국)의 참혹한 재앙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라네.”
19세기 유행한 한글소설들은 첫부분이 한결같이 “숙종대왕 호시절에···”라는 상투적 표현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숙종 재위기가 가장 태평했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아 숙종 치세를 18세기 영·정조 황금시대의 서막을 여는 시발점으로 흔히 이해한다.
그러나 실록에 드러난 당시의 실상은 이런 통념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최악의 대기근과 전염병이 한꺼번에 덮치면서 서울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희생자가 속출한 ‘총체적 난국의 시대’였다.
1695년(을해·숙종 21)과 1696년(병자) 조선을 강타한 대재앙을 ‘을병대기근’으로 부른다. 참상은 두 해에만 그치지 않고 1699년까지 여파가 계속됐다. 따라서 을병대기근은 흔히 17세기말 5년간의 기근상황을 통칭한다.
“서울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다. 부모와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젖을 빨다가 따라 죽기도 한다. ··· 사방에 염병이고 (환자들을 격리수용한) 움막이 끝없이 펼쳐지니 참혹한 광경과 놀라운 심정을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현종 11) 6월 4일)
“주리고 병들어 사망한 무리를 한성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다 묻은 것이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한다. ··· 주인이 없는 주검이 모두 6969구, 구덩이에 메꾸어져 있는 해골을 수습하지 못한 것이 또 얼마인지 알 수 없다.” (<현종개수실록> 1672년(현종 12) 9월 30일)
두번의 역대급 대기근이 일어난 17세기는 기후학적으로 ‘소빙기(小氷期)’였다. 세기 전반에 걸쳐 지구의 평균 기온이 1~2도 내려가 서늘한 여름과 한랭한 겨울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전세계적으로 냉해,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이로인해 대흉작과 기근이 해마다 되풀이 되면서 기하급수적 사망자를 냈다.
조선도 마찬가지로 이상저온의 직격탄을 맞았다. “남북의 각 고을이 하나같이 가뭄, 수해, 바람, 우박의 재난을 당하여 각종 곡식이 거둘 것이 없게 되었으며 상수리 열매도 익지 않았다. 농민들이 진을 치고 모여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판을 진동시켰다.” (<현종실록> 1670년(현종 11) 8월 11일)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초근목피로 연명했고 심지어 인육도 마다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굶주린 엄마가 죽은 남매를 삶아먹었다”(<현종실록> 1671년(현종 12) 3월 21일), “실성한 백성이 사람고기를 먹었다”(<숙종실록> 1696년(숙종 22) 2월 5일)는 끔찍한 소식들이 임금에게 속속 보고됐다.
기근의 만성화는 사람들의 면역체계를 약화시켜 전염병 감염 위험을 높인다. 기근기에는 늘 역병이 기승을 부리며 역병으로 인해 대규모 사망자가 생긴다. 조선에서는 유리걸식하던 백성들이 진휼청에서 나눠주는 식량을 먹기위해 서울로 몰려들면서 역병이 급속도로 번졌고 속수무책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우리 역사상 최악의 기근참사라는 경신대기근 시기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홍수와 가뭄이 재앙이 되고 해마다 흉년이 져서 굶주려 사망하는 참상이 지난해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다. ··· 기근·전염병으로 죽은 토착 농민까지 온 나라를 합하면 그 수가 백만에 이르고, 더욱이 한 마을이 모두 죽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현종 12) 12월 5일)
<숙종실록>에도 경신대기근의 사망자가 언급된다. <숙종실록> 1695년(숙종 21) 10월 8일 기사는 “경술년(1670), 신해년(1671)의 구휼책이 완전무결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수레에 시체를 가득 실어 하루에도 6~7차례 성문을 나아가서 온 나라의 죽은 자가 백만에 가까웠다”고 했다.
경신대기근 때 인구감소와 관련한 좀더 구체적인 숫자는 <증보문헌비고> ‘호구조’의 식년호적(3년 마다 작성하는 호적)을 통해 파악가능한다. 이에 의하면, 실록의 기록에서 참상이 최고조에 달했던 1670년을 전후한 1669년과 1672년, 3년간 호수(戶數·가구수)는 16만5357호, 인구는 46만8913명 축소됐다.
하지만 실제 피해는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관이 처벌을 두려워해 사망자 수를 축소해 보고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학계는 당시의 조사가 실제 피해 호구의 50% 가량만 기록됐을 것으로 본다.
대재앙은 농촌의 붕괴를 가져왔고 대량의 유민을 양산했다. 실록에 따르면, 북방 유민이 삼남까지 대거 옮겼고 무엇보다 서울로의 유민 이동이 두드러졌다. 조선 정부는 유민들을 강제로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숙종실록> 1703년(숙종 29) 3월 27일 기록은 “진휼청에서 귀향을 원하는 굶주린 자를 뽑으니 응한 자는 10분의 1에도 못 미쳤고, 다음날 병을 이유로 가지 않거나 도망해 흩어진 자가 또 3분의 1이 넘었으니 본토에 도달한 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조정은 난상토론 끝에 유민을 수용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다. <숙종실록> 1703년(숙종 29) 2월 26일 기록에 의하면, 고향으로 가는 도중 양식 확보가 어렵고 고향에서도 곡식이 부족할 수 있어 유민들을 경기지역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모든게 절망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이상저온으로 조선후기 동해에서는 한류성 어종인 명태가 넘쳐났다.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명태를 말린 건제품이 전국에 유통되는데 매일의 반찬으로 삼고 여염 뿐 아니라 유가(儒家)에서도 이를 제사에 쓴다”고 했고,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도 “이 물고기가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 마치 오강(五江·한강)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효를 헤아리지 못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인구이동과 도성 인구증가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출현했다. <비변사등록>, <장빙등록(藏氷謄錄)> 등 문헌을 분석한 기존 연구(‘조선후기 서울상업발달연구사’-고동환)에 따르면, 도성 밖 연강산저민(沿江山低民·포구, 나루, 산 거주자)은 1645년(인조 23) 2261호에서 1670년(현종 11) 5000호로, 1743년(영조 19)에는 8463호까지 증가한다.
이들과 연계해 18세기 전후로 서소문 밖에는 칠패시장(중구 봉래동)이 번성했다. 칠패장은 무허가 난전시장이었지만, 삼남(충청·전라·경상)의 물류가 집결돼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에 위치해 어물전을 중심으로 관허시장인 종로시전을 압도하며 서울의 시장을 주도했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성호사설. 오주연문장전산고
2. 김미성. ‘조선 현종~숙종 연간 기후 재난의 여파와 유민 대책의 변화’. 역사와 현실(제 118호). 한국역사연구회. 2020
3. 김소라. ‘불과 물: 조선후기 이상저온 현상 속 한성부의 온돌 확산과 청계천 준설’. 조선시대사학보(제 102호). 조선시대사학회. 2022
4. 고동환. ‘조선후기 서울상업발달연구사’. 지식산업사. 1998
5. 김덕진.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푸른역사. 2008
6. ‘고성군 명태어로민속지’. 고성문화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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