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람들’의 글로벌 열풍…새로운 성공 신화 쓰는 한국계 이민자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2024. 1. 21.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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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성난 사람들' / 넷플릭스


처음엔 미국의 한 마트 앞에서 두 사람 사이에 운전으로 인한 사소한 시비가 붙는다. 그러다 점점 분노가 커지고, 서로의 일상을 뒤흔들 만큼 극단적인 싸움들이 일어난다. 넷플릭스에서 지난해 4월 공개된 오리지널 드라마 ‘성난 사람들’이다. 블랙 코미디에 해당하는 이 작품에선 매회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많은 시청자들이 그 분노에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호평을 보냈다. 미국 매체 뉴욕타임스는 “근래 가장 활기차고 놀라우며 통찰력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난 1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75회 에미상’ 시상식의 미니시리즈·TV영화 부문에서 ‘성난 사람들’은 작품상, 감독상, 남·여 주연상 등 8관왕을 휩쓸었다. 에미상은 ‘방송계 오스카’로 불릴 만큼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시상식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 수상의 영광을 안은 주인공들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연출을 맡은 이성진 감독, 남자 주인공인 스티븐 연을 비롯해 한국계 배우와 스태프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작품은 에미상뿐 아니라 주요 글로벌 시상식을 휩쓸었다. 앞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선 작품상 등 3관왕, 크리틱스초이스 시상식에선 4관왕을 차지했다.

물론 이런 순간이 낯설지만은 않다. 한국 콘텐츠 ‘오징어 게임’, ‘기생충’이 글로벌 시상식의 주인공이 된 것도 이미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또 다른 무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국계 이민자들이 직접 만들거나 연기한 콘텐츠가 명실상부한 하나의 장르가 되어 커다란 열풍을 만들고 있다.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늘 이방인과 경계인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던 이들은 어떻게 글로벌 콘텐츠 시장의 중심에 서게 됐을까.


 ‘패스트 라이브즈’, ‘엘리멘탈’까지…거대 화력을 뿜어내다

오랜 시간 이민자들의 콘텐츠는 늘 ‘비주류’에 해당했다. 미국과 유럽과 같은 주요 글로벌 시장에선 더욱 그랬다. 성공 신화는 철저히 해당 국가 출신, 그리고 백인의 차지였다. 콘텐츠의 성적표가 콘텐츠 자체가 아니라 국적과 피부색에 따라 차이가 난 것이다.

그런데 다양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엔 한국계 이민자들이 있다. 이들이 뿜어내는 화력은 남다르다. 2021년 나온 ‘미나리’는 큰 화제가 됐다.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품이 호평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배우 윤여정은 이 작품으로 오스카에서 여우조연상을 차지했다. 2022년엔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플TV플러스의 드라마 ‘파친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현상은 한두 작품에 그치거나, 일시적인 이벤트에 그치지 않았다. 2023년엔 ‘성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여러 작품이 동시다발적으로 사랑을 받았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이 연출하고, 한국계 미국인 배우 그레타 리, 한국 배우 유태오가 출연한 ‘패스트 라이브즈’는 올해 오스카 유력 후보로 꼽힌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이민으로 헤어지게 된 남녀가 20여 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지난해 큰 인기를 얻은 애니메이션 ‘엘리멘탈’ 역시 한국계 미국인 피터 손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불’과 ‘물’ 등 원소를 의인화하여 이민자 1세와 2세의 이야기, 이민자의 사랑 이야기를 자연스럽고 사랑스럽게 풀어냈다.

기존에도 한국계 이민자들의 콘텐츠는 제작되어 왔다. 하지만 ‘디아스포라 콘텐츠’라는 큰 범주 안에서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데 그쳤으며, 다른 나라 출신이 만든 작품들과도 크게 차별화되지 못했다. 주로 이민자 1세대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됐으며, 이들의 어렵고 척박한 이민 생활에 초점이 맞춰졌다. 물론 뛰어난 작품들이 많았지만, 일반 대중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데는 일정 부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의 한국계 이민자 콘텐츠는 이 틀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무한 확장하고 있다. 최신작 대부분은 한국계 이민자 2세들이 성장하여 만든 콘텐츠에 해당한다. 그러다 보니 이민자 1세보다 2세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간 낯선 땅에서 자라며 자신이 느꼈던 정체성 혼란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만약 여기에 그쳤다면, 이 또한 큰 공감을 받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혼란을 이민자의 이야기에 국한하지 않는다. ‘보편성’이란 코드를 심어 새로운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미국식 이름? 아니, 이젠 한국 이름으로”

‘성난 사람들’은 보편성을 적극 활용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국계 미국인 대니(스티븐 연)는 미국에서 수리공으로서 어렵게 살아가며,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삶에 지쳐 있다. 대니와 대적하게 되는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앨리 웡)은 자수성가를 해서 번듯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겉과 달리 내면엔 분노가 쌓이고 있으며, 남편에게조차 제대로 위안받지 못한다. 그러다 대니와 에이미가 충돌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그렇게 두 인물이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분노 안엔 결국 애초에 분노의 대상이 누군였는지, 진짜 화가 난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근원적이고 다양한 질문들이 내포되어 있다. 나아가 이 질문은 작품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에게 함께 던져진다. 이민자가 아니더라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일상에서 느꼈을 감정과 마음속 깊이 내재된 분노를 살펴보게 하는 것이다.

작품의 감각적이고 세련된 스타일도 호평을 받고 있다. 이전의 콘텐츠들이 가진 다소 투박하고 거친 방식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할리우드식 스타일이 덧대어진 것이다. ‘파친코’를 공동연출한 저스틴 전 감독도 ‘성난 사람들’에 대해 “한국 영화는 감정적 차원에서 울림과 공감, 흡입력이 강한 반면 할리우드 영화는 구조나 플롯을 중시하는 차이가 있다. ‘성난 사람들’은 이 갭을 연결했기에 엄청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때마침 커다란 산업적 변화가 일어난 것도 한국계 이민자 콘텐츠의 확산에 큰 도움이 됐다. 기존에 할리우드에선 대규모 블록버스터가 아닌 독립 영화, 다양성 영화는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제작사 A24가 만든 작품들을 중심으로 대중적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2012년 설립된 A24는 작은 규모에도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콘텐츠를 꾸준히 제작해 왔다. ‘미나리’, ‘성난 사람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등도 A24에서 제작했다. ‘패스트 라이브즈’ 역시 A24와 CJ ENM이 공동제작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인 미국 드라마 ‘동조자’에도 A24가 참여했다.

한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며,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한 것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성난 사람들’엔 한국어, 한인 교회, 카카오톡, 안마 의자 등 지극히 한국적인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럼에도 전 세계 시청자들은 콘텐츠 속 한국적 요소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신기하고 매력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에미상 시상식 감독상을 받은 이성진 감독은 과거엔 다른 이름을 썼었다. ‘소니 리(Sonny Lee)’라는 미국식 이름이었다. 하지만 2019년부턴 자신의 작품에 한국식 이름을 표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의 이름을 얘기할 땐 미국인들이 실수하지 않고 정확하게 발음하게 노력하더라고요. 좋은 작품을 만들면 제 한국 이름을 듣고도 사람들이 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마침내 에미상 시상식에선 그의 한국 이름이 당당히 울려 퍼졌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며 한류를 확산시켜 온 사람들, 그리고 그 노력과 성과를 본받아 자신만의 색깔과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어낸 한국계 이민자 감독과 배우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한국 이름이 글로벌 시상식에서 호명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될지 기대된다.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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