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아이에게 칼을 선물하는 까닭 [평범한 이웃, 유럽]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결혼 이야기〉(2019)는 한 부부가 이혼하는 과정을 통해 지난 결혼 생활의 진실을 묻는 작품이다. 가장 가까워야 할 사이에서 일어나는 소통 부재의 문제,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증오의 대상으로 변할 때의 아이러니한 감정이 잘 그려졌다. 부부로 등장하는 스칼릿 조핸슨(니콜 역)과 애덤 드라이버(찰리 역)의 연기도 훌륭하다. 그런데 결혼과 이혼이라는 주제와 별도로, 이 영화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었다. 별거 중인 찰리가 아들 헨리와 둘이 지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집에 사회복지사가 찾아와 감정을 하는 장면이다. 아이가 지내는 환경을 관찰한 뒤 양육권 분배 결정에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사회복지사가 찾아온 이유를 모르는 헨리는 아빠 찰리에게 ‘칼 묘기’를 보여달라고 부탁한다. ‘칼 묘기’란 열쇠고리에 달린 작은 접이식 칼을 이용한 자해 연기로, 찰리가 재미 삼아 종종 헨리에게 보여주곤 했다. 찰리는 앞에 앉아 있는 사회복지사의 눈치를 보며 안 된다고 말한다. 아들 앞에서 칼로 장난을 치는 게 양육권 확보에 도움이 될 리 없어서다. 실망한 헨리가 자기는 언제쯤 잭나이프를 가질 수 있느냐고, 열 살이 되면 가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 “안 돼, 스무 살쯤 되면 사줄게”라는 게 찰리의 대답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스위스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해봤다. 왜 열 살짜리 아이가 잭나이프를 가질 수 없는지, 왜 스무 살이나 되어야 그럴 자격이 생기는지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역시 미국인’이라며 애매한 비웃음을 보일지도 모른다. 스위스에서는 대여섯 살 꼬마가 칼을 쓰는 일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칼이란 날카로운 부엌칼 같은 게 아니다. ‘스위스 아미 나이프’로 잘 알려진,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빨간색 접이식 칼을 말한다.
스위스 독일어권에서 ‘자크메서(Sackmesser)’라고 부르는 이 주머니칼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 구멍이 송송 뚫린 에멘탈 치즈와 더불어 스위스의 상징이다. 126년 전인 1897년 카를 엘제너가 스위스 슈비츠 지역에 회사 빅토리녹스를 설립하고 첫 주머니칼을 생산했다. 이 회사가 현재 판매하고 있는 제품 라인 중에는 ‘나의 첫 빅토리녹스’도 있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주머니칼이다. 성인용 주머니칼보다 작은 크기이긴 해도 도구가 아홉 가지나 들어 있다. 날 끝이 뭉툭한 칼, 이쑤시개, 병따개, 캔따개, 나사돌리개, 와이어 스프리퍼, 핀셋, 톱, 열쇠고리다. 유치원생 아이들은 숲에 소풍을 갈 때 이 칼을 가져가 직접 마른 나뭇가지를 잘라 불을 피우고, 그 불에 가져간 소시지를 구워 먹는다. 내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아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 주머니칼을 사주라는 추천을 받았다. 그때 옆에 있던, 미국에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던 한 엄마는 충격이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플라스틱 칼을 쓰는 것도 금지한다고 했다.
내가 나고 자라지 않은 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문화 차이를 겪을 때, 내가 적용하는 첫 번째 원칙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자, 그 법 때문에 내가 크게 다치는 게 아니라면’이다. 아동용 주머니칼에 달린 톱으로 나뭇가지를 베면서 대단히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는다. 기껏 손 좀 베이는 정도다. 한두 번 손을 다치고 나면 아이들도 칼을 조심히 다루는 법을 배운다. 자기 손만 보호하는 게 아니라 남의 손을 보호하는 법도 배운다. 배워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내 딸이 아홉 살 생일을 맞았을 때 친한 친구들과 나무타기 파티를 열었다. 나무들마다 자일(등산용 밧줄)이 설치된 숲에 가서 나무들 사이를 미끄러져 가기도 하고 까마득한 나무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이 체험 행사를 주최한 업체는 모든 아이들에게 주머니칼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아동용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두 가지 사이즈의 칼날과 가위 등 14가지 도구가 들어 있는 성인용 칼이었다. 아홉 살쯤 되면 성인용 주머니칼을 지닐 자격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6학년 딸이 4박5일간 수학여행을 떠날 때도 이 칼을 가지고 갔다. 학교에서 보내온 필수 준비물 목록에 칼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머니칼과 나, 녹슬지 않는 사랑
칼을 아이들 옆에서 치워야 할 것, 금지해야 할 것으로 보는 문화권에서는 스위스의 이런 방식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미국, 영국 출신 부모들은 칼 사용을 장려하는 문화에 충격을 받고, 아이들을 통제하는 데 익숙한 아시아 국가 출신 부모들은 아이에게 칼을 사주라는 교사 권유를 무시한다. 심지어 같은 유럽 국가 출신의 부모들도 ‘스위스 아이들은 유독 거칠게 논다’며 불만을 표시한다. 나는 회색지대에 서서 오락가락한다. 주변 스위스 부모처럼 내 아이들에게도 칼을 사주었지만, 자기 손 베여가며 알아서 배우도록 멀리서 지켜보기란 쉽지 않다. 조심해서 써야 한다고 늘 신신당부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칼을 갖고 놀았더라면 뭔가 달랐을까.
얼마 전 한 신문(바젤 지역 일간지인 〈바즐러 차이퉁〉)에 실린 주머니칼에 대한 칼럼을 읽었다. ‘주머니칼에 바치는 송가(頌歌)’라는 제목 밑에 ‘주머니칼과 나-결코 녹슬지 않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스위스인 작가 마르틴 푸러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빨간색 주머니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인지 설명한다. “주머니칼을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라고 하면 될까? 그건 주머니칼에 대한 과소평가다. 주머니칼은 그 존재만으로도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도구다. 비록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우리는 결코 녹슬지 않는 사랑으로 묶인, 떼려야 뗄 수 없는 커플이다.” 인간과 주머니칼이 사랑으로 묶인 커플이라니, 좀 심한 것 아닌가? 푸러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내 주머니칼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차원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할 때 행운의 부적으로 오래된 동전이나 조약돌을 가져가기도 한다. 나는 주머니칼을 챙긴다. 그러면 순식간에 나사(NASA) 우주비행사처럼 중대한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된 탐험가로 변신한다. 주머니칼이 없으면 직립보행을 처음 시작한 사람처럼 벌거벗은 채 무방비 상태가 된다”.
‘녹슬지 않는 사랑’, 어쩌면 이것이 핵심일지 모른다. ‘빅토리녹스(Victorinox)’라는 스위스 주머니칼 브랜드를 다시 떠올려보자. 설립자 카를 엘제너는 자신의 어머니 이름인 ‘빅토리아(Victoria)’와 ‘녹슬지 않는(inoxidable)’이라는 단어의 줄임말을 결합해 회사 이름을 지었다. 빅토리녹스 이전에도 비슷한 다목적 주머니칼은 존재했다. 다른 상품을 제치고 빅토리녹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손잡이 양쪽으로 칼날이 나오는 혁신적인 디자인(다른 칼들은 한쪽으로만 칼날이 나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머물렀던 미국 군인들이 돌아가며 기념품 삼아 대량 구매한 일, 그리고 어지간해선 녹이 슬지 않는 질 좋은 스테인리스 스틸이 그것이다. 녹슬어 무뎌진 칼날은 쓸모가 없다. 스위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 용도를 배우는 주머니칼은 무딘 칼이 아니다.
날선 칼과 무딘 칼 중 무엇이 더 위험한가.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127시간〉(2010)이 생각난다. 미국의 등반가 애런 랠스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랠스턴은 2003년 유타주 블루존캐니언에서 등반을 하던 도중 큰 바위에 오른쪽 팔이 끼였다. 팔을 빼내는 건 불가능했고 아무도 자신이 그곳에서 등반 중임을 몰라 구조 가능성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살기 위해 자신의 오른팔 아래를 잘라냈다. 랠스턴은 이후 발표했던 몇몇 회고록에서 이때 사용한 칼이 ‘15달러짜리 손전등을 구입하면 얹어주는 싸구려 다용도 칼’이라고 묘사했다. 너무 무뎌서 피부를 찢지도 못하는 칼이라, 할 수 없이 뼈를 부러뜨린 뒤 팔을 잘랐다. 평소 들고 다니던 스위스 아미 나이프가 있었는데 등반을 떠나던 날 우연히 그것 대신 무딘 다른 칼을 들고 가는 바람에 팔을 자르는 과정이 더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스스로 팔을 잘라내겠다는 결심이 선 그에게 필요한 건 끔찍한 과정을 단축시켜줄 날카로운 칼이었다. 구조 당시 이미 과다출혈로 위험한 상태였던 그에게 무딘 칼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짓누르는 절망적 도구였을 것이다.
칼의 쓸모는 쓰는 사람에게 달렸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스위스 주머니칼 얘기를 한 것은 ‘나는 칼을 제대로 쓸 줄이나 아는가’ ‘내가 가진 칼은 날이 서 있나 무딘가’ 돌아보기 위해서다. 날카로운 칼이라고 마냥 자신만만할 일은 아니다.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남는 건 상처뿐이다. 영화 〈결혼 이야기〉에서 아빠 찰리는 결국 사회복지사 앞에서 ‘칼 묘기’를 선보인다. 아들이 부탁한 장난이 별것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묘기는 평소대로 되지 않고, 그는 작지만 날카로운 칼날에 팔을 깊이 베이고 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사회복지사를 배웅한 뒤 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다. 질 좋은 스위스 주머니칼도 늘 ‘나사 우주비행사’로 변신시켜주거나 ‘녹슬지 않는 사랑’만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몇 달 전에는 취리히의 한 학부모가 자기 아이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 교사와 상담을 하던 중 일부러 이 빨간 주머니칼을 교사 앞에서 꺼내 칼날을 뺐다 넣었다 하며 협박한 일이 보도됐다. 칼의 쓸모는 쓰는 사람에게 달렸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고용정책국장으로 일하는 경제학자 이상헌의 저서 〈같이 가면 길이 된다〉에 칼 얘기가 나온다. 일본의 대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 〈회복하는 인간〉을 인용하면서, 이상헌은 이렇게 쓰고 있다. “겐자부로는 어렸을 때 날카로운 작은 칼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이는 잘 드는 칼을 쓰면 안 된다고 걱정하자 그는 당돌하게 답했습니다. “다치는 것은 칼이 잘 들어서가 아니라 안 들기 때문이야.” 그의 아버지는 옆에서 아들 편을 들었습니다. 별것 아닌 이 얘기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중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또는 그들을 상처로부터 막지 못하는 것은 내가 가진 칼이 무뎌서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날카로워서일까요.”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갈등이 넘쳐나는 시대다. 정치적 견해 차이는 물론이고 성별이나 나이가 다르다는 게 갈등의 주요 이유가 될 때도 많다. 누구나 입에 칼을 물고 산다. 그럴수록 이게 칼 쓸 일인지, 그 칼이 갈등의 핵심을 겨냥하는 날카로운 칼인지, 무딘 칼이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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