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방향은[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2024. 1. 2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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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월에는 그해 세계경제와 경제정책이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를 알 수 있는 3대 국제행사가 열린다. 경제정책에 초점을 맞춘 전미경제학회, 세계 산업 추세를 읽을 수 있는 국제전자제품 전시회(CES), 그리고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변화를 조망할 수 있는 다보스포럼이다.
    
올해는 3대 행사 모두 인공지능(AI)을 다루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논의되기 시작했던 AI가 1년 전 챗GPT로 우리에게 다가오기까지 의외로 잠잠했다. 산업발전 단계상 엄동설한에 푸른 싹이 돋기 시작한 단계(green shoot)인 챗GPT가 윤리적 문제에 봉착해 시든 잡초(yellow weed)가 될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1년 만에 모든 산업 중 가장 빨리 화려하게 꽃(golden goal)을 피우고 있다.

저소득층의 역습?

세계경제가 어려울 때는 신기술이 출회하면서 위기 극복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90년대 들어 일본발 위기론이 확산됐을 당시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기술(IT)이 꽃을 피우면서 세계경제를 구해냈다.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IT가 주도산업으로 자리 잡으면서 종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성장·저물가의 신경제 신화를 낳았다.
    
AI발 변화를 가장 빨리 체감할 수 있는 곳이 고용시장이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중국을 비롯한 저임의 저개발국 노동력 공급이 더이상 안 되는 루이스 전환점이 앞당겨져 주요국 자체 노동시장에서 저소득층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코로나 지원금에 따른 자발적 실업인 코브라 효과까지 겹쳐 저소득층의 임금은 빠르게 상승했다.
    
올해는 디지털 고도화까지 이루어지면서 구조조정 대상이 바뀌고 있다. 코로나 사태 직전까지 디지털화는 블루칼라를 대신할 수 있는 방향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AI 등이 급진전되면서 화이트칼라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필요없는 시대가 오면서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저소득층(혹은 블루칼라)의 역습 시대가 온다’고 내다봤다.
    
저소득층의 역습은 성장과 고용 간의 정형화된 사실도 깨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저소득층이 내몰리면서 ‘고용 창출 없는 경기회복(jobless recovery)’을 낳았지만 최근에는 저성장 시대가 정착되는 속에서도 실업률이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 ‘고용 풍부한 경기둔화(job full downturn)’라는 새로운 수수께끼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현상이 일시적이냐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앞으로 더 강화돼 추세로 자리 잡을 확률이 높다. 중국, 한국 등 주요국은 인구절벽으로 생산가능인구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AI, 양자컴퓨터 등으로 이어지는 디지털의 고도화는 이들의 노출도가 심한 화이트칼라와 고소득층을 더 빨리 대체해 나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이 추구하는 두 가지 대원칙이 있다. 하나는 ‘효율성(성장)’이고 다른 하나는 공정성(분배)이다. 두 원칙이 선순환 관계일 때는 희소한 자원 배분을 시장경제에 맡기는 것이 최선책이지만 악순환 관계일 때는 정부가 개입해 두 원칙 간의 최적점(일명 코즈의 정리)를 찾아야 한다.
    
연초부터 두 원칙이 새삼 화제가 되는 것은 10년 전 거셌던 토마 피케티와 앵거스 디턴 간의 논쟁이 AI 시대 도래와 함께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자본’의 저자로 잘 알려진 피케티는 성장할수록 분배가 악화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위대한 탈출’의 저자인 디턴은 성장과 분배가 같이 갈 수 있는 문제라고 봤다.


    
두 학자 간 논쟁이 한동안 수면 아래로 잠복됐던 것은 금융이 실물을 주도(leading)하고 디지털화의 진전으로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에서 성장과 관계없이 소득 불균형이 ‘K’자형이란 신조어를 낳을 만큼 악화됐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 해인 2019년까지 그랬다.
    
힘이 실린 피케티의 주장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제와 ‘1인=1표’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체제 간 불일치까지 겹치면서 포퓰리즘 정책을 낳았다. 대기업과 고소득층에게는 로봇세, 초부유세 도입 등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에게는 각종 지원의 참고 잣대가 됐다. 심지어는 횡재세 도입과 ‘빚 내서 더 쓰자’는 현대통화론자까지 나왔다.
    
하지만 올해 전미경제학회를 앞두고 디턴의 주장에 힘이 실릴 수 있는 통계가 나왔다. 미국경제연구소(NBER)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 직전인 2019년부터 2022년까지 미국의 계층별 소득증가율을 보면 하위 10%는 9%가 증가한 반면 상위 10%는 4.9% 증가하는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AI 시대 금융정책은

AI 시대가 전개되면서 종전의 정형화된 사실이 흐트러짐에 따라 물가와 금리, 그리고 경기 간의 트릴레마에 처한 각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통화 트릴레마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금리를 내리면 물가가 오르고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침체되는 현상을 말한다.
    
통화 트릴레마를 헤쳐나가야 할 각국 중앙은행을 실제 성장률과 균형성장률, 그리고 잠재성장률이 같은 황금률(golden rule)이 유지돼야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고 본 ‘해로드-도마의 칼날 이론’에 비유하면 양쪽 양동이에 ‘경기 안정’과 ‘물가 안정’이란 목표를 담은 물지게를 지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더 날카로워진 금리 위를 걸어가야 한다.
    
갈 길도 멀다. 각국 중앙은행이 두 목표를 동시에 도달하는 최종 종착지까지 금리를 계속 조정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경우 최종 종착지를 계산해보면 12월 점도표상에서 나타난 중립금리(R*) 2.5%에다 물가 목표치 2%를 더하면 4.5%다. 중립금리란 실물경기를 침체시키거나 과열시키지 않는 금리 수준을 말한다. 현재 Fed의 기준금리가 5.25∼5.5%인 점을 감안하면 빠르면 올해 3월부터 3∼4차례 금리를 변경해야 한다.
    
각국 중앙은행이 과연 더 날카로워진 칼날 위를 균형을 잡고 먼 길을 갈 수 있을까. 방법은 한 가지다. 양쪽 양동이에 물을 적게 넣는 방안이다. 올해 예상되는 경기와 물가 수준을 감안하면 현재 2%인 묵표치를 고집하면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은 만큼 이를 상향 조정해 물지게의 무게를 가볍게 하면서 최종 정착지까지 거리를 단축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다.
   
AI 시대가 전개될 경우 각국 중앙은행은 ‘어떻게 통화정책을 수행할 것인가’ 하는 또 하나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네트워킹 효과와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AI 시대에 있어서는 중앙은행의 목표를 ‘물가 안정’에만 둘 수는 없다. 기준금리 변경, 유동성 조절 등과 같은 종전의 통화정책 수단도 무력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된다.
    
통화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다른 경제주체도 공유가 가능해짐에 따라 ‘정보의 비대칭성(information asymmetry)’을 전제로 한 중앙은행의 시장 선도 기능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즉 중앙은행과 시장 참여자 간 관계가 ‘수직적’이 아니라 ‘동반자적’으로 변한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과 중앙은행 총재의 위상, 기준금리와 시장금리 간 체계(interest system)는 약화가 불가피하다.

한국은행도 AI 시대에 맞춰 중앙은행 목표 수정, 통화량 등 새로운 통화지표 개발, 통화유통 속도와 통화승수 무력화 방지, 인과관계와 추적성의 중간 표적변수 개발, 통화정책 관할 범위 확대, 통화정책 전달경로 유효성 점검, 경기 예측력 제고, 그리고 리디노미네이션 단행 여부 등을 사전에 준비해 놓아야 한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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