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소설의 재발견 - 안쳬 라빅 슈트루벨의 '푸른 여자' [PADO]
독문학자 잉고 마이어(Ingo Meyer)는 한 인터뷰에서 오늘날보다 더 많은 독일 소설이 있었던 적은 없지만, 몰락의 경향을 간과할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1980년대 이후 독일 소설들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의 나열일 뿐, 진정성을 상실했으며 역사를 심도 있게 다루는 거대 서사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 독일 소설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소위 말해 통속문학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체코의 리젠게비르게산맥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10대 소녀 아디나의 여정은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베를린으로 향하며 시작된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도약은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소녀를 독재 정권에서 구해낼 수는 있어. 하지만 그 소녀로부터 독재주의는 아니야."
베를린에서 만난 포토그래퍼 리키를 통해 알게 된 독일인 친구들이 아디나를 향하여 던지는 이 메시지는 독일 소설의 새로운 시선을 내포한다. 그들은 아디나가 소베이트연방의 동유럽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아냥거리며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아디나를 향해 누구나 독재 정권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지만, 독재주의는 여전히 내면 깊숙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비난한다. 즉 인간은 그가 속한 정권으로부터 육체적으로 벗어날 수 있을지라도, 이미 내재돼 있는 사상과 인식 자체는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명백한 차별적 시선인 것이다. 서유럽에서 다채롭고 자유로운 삶의 방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던 아디나가 아직 온전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 시민의식과 충돌하게 되는 모습은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의 진영 체제 사이에 놓여 있던 독일의 현재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독일은 성공적인 통일을 이루어내며 거대한 경제적 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서유럽 정치적 분단의 상징이기도 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정한 마음의 통합, 즉 사회 문화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러 매체들을 통해 보도된 바 있다.
아디나는 그의 폭력을 문화원 사람들에게 고발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그들은 분노하고 호소하는 아디나를 냉장실에 가두어 버린다. 결국 아디나는 문화원에서 탈출해 헬싱키로 떠난다. 생계를 유지하지 위해 호텔에서 일을 시작한 아디나는 인권보호를 주 업무로 담당하는 유럽의 국회의원 레오니데스를 알게 되고 그와 가까워진다.
그리고 어느 한 날, 그를 따라 콘퍼런스의 오프닝 파티에 참석하는데 그곳에서 또다시 벵엘과 마주치게 된다. 아디나는 그를 보자마자 공포에 질려 도주한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레오디네스는 충격을 받고 그를 돕고자 위원회에게 알린다. 벵엘이 수상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예정대로 수상을 진행하겠다고 답한다. 심지어 아디나는 벵엘을 고소하기 위해 소개받은 레오디네스 친구 크리스티나(Kristiina)의 변호사 지인으로부터 실제로 폭력 사건의 유죄 판결은 10%에 불과하고, 그로 인해 피해자의 5%만이 고소를 진행하고 있다는 현실을 전해 듣는다.
결국 아디나는 시상식 당일, 레오디네스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도움으로 무대 뒤에 침입해 칼을 들고 벵엘을 기다린다. 결과는 소설에서 나오지 않는다. 다만 벗어날 수 없는 문제 안에서 아디나가 느끼는 공포와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 독자를 압도한다.
라빅 슈트루벨이 이 테마를 중심 서사에서 다루었던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최근 독일에서는 신체적 폭력에 관한 처벌이 절도, 학력 위조와 같은 범죄보다 훨씬 더 미약하다는 통계에 주목하고 있다. 재산과 물질적 소유물이 신체적 안위보다 더 보호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푸른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는 너무나도 선명하다. 그녀의 형상 모든 것이 환하게 빛난다. [...] 푸른 여자는 천천히 다가온다. [...] 그녀는 멈춰 서서 그녀의 머리를 정돈하고, 그녀의 손에 있는 손수건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푸른 여자가 나타나면, 그 이야기는 멈춰야 한다."
위의 단락은 부분 서사에서 처음으로 푸른 여자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여기서 멈춰야 하는 이야기는 바로 중심 서사, 즉 아디나의 이야기이다. 라빅 슈트루벨은 폭력이 멈추길 바랄 때마다 푸른 여자를 드러냈다. 실제로 그는 아디나의 무거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 안에서 너무나도 괴로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게 푸른 여자를 중간에 넣을 필요성을 느꼈다고 언급했다. 즉 비교적 짧은 단락들이 중심 서사 중간중간에 삽입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푸른 여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형상화하는 것일까.
"나는 글을 쓰는 의도를 언급한다. 나는 보통 낯선 이들에게 내가 작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푸른 여자에게 아디나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를 점점 더 잘 이해했다고."
"푸른 여자는 위로 올라가자고 제안한다. [...] 그녀는 3층에서 멈춘다. 그리고는 내가 잠시 머무르는 숙소의 문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다. [...] 이 신발 매트. 푸른 여자는 알아차리고는 말한다. [...] 내가 예전에 뒤집어 놓았었는데, 아직 여기 있네. 하고 웃는다. [...] 그녀가 이 신발매트를 알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의 숙소 문을 맞추는 것도. 나는 그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녀는 엽서들 앞에서 멈춘다. 엽서들 또한, 그녀는 알아본다."
둘의 대화에는 중심 서사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라빅 슈트루벨은 자신이 헬싱키에서 거주할 때 실제로 푸른 여자의 형상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즉 1인칭 화자는 작가 본인을 상징하며, 그가 집필의 고뇌, 사유, 다시 말해 이 무겁고도 암담한 현실이 담긴 폭력 소설을 어떻게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푸른 여자와 대화를 나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인칭 화자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푸른 여자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점, 1인칭 화자는 실제로 낯선 이들과는 집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고 언급했음에도 푸른 여자와는 고뇌를 함께 나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결국 이는 스스로와의 대화이자 라빅 슈트루벨,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푸른 여자는 작가의 또 다른 정체성인 셈이다.
라빅 슈트루벨은 아디나를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변화지 않는 사회에서 무력감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작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작품 안에 혼재시키는 이러한 시도는 다채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라빅 슈트루벨은 '푸른 여자'를 통해 동·서간의 시민의식과 사회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문학적인 요소마저 잃지 않음으로써 다시 한번 독일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문학이 점차 휴식 시간에 향유할 수 있는 문화로 자리매김한다는 우려 속에서 그럼에도 문학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그 안에 사회적인 문제의식, 문화 그리고 인간에 관한 다양한 시선들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작품들을 읽으면서 멈추게 되는 지점은 사회를 향한 시선과 삶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미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감정들과 고뇌들이 글로 표현됐을 때, 인간은 비로소 무언가를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변하지 않는 문학의 힘일 것이다.
김경민 중앙대학교 독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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