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예산제, 장애인에게 무익하거나 나쁘거나

한겨레21 2024. 1. 20.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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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기고]돌봄노동과 서울시사회서비스원 ⑨ 개인예산제의 해악
사회서비스 시장화 가속화하는 윤석열 정부의 개인예산제, ‘소비자 권리’로 장애인의 삶은 담보될 수 없다
2022년 9월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의 노원센터 장애인 돌봄사업 폐업 결정에 시민사회단체가 철회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시사회서비스원 노동조합 제공

윤석열 정부 출범 뒤 장애인의 삶과 권리는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사회서비스, 탈시설 등 모든 영역에서 답보 상태를 넘어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다양한 맥락에서 검토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현 정부의 정책 기조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철저한 맹신 속에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로 이어진 민주당 정권 역시 신자유주의를 추종했지만, 이들 정권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할 때의 표면적 명분과 핑계는 권력이 이미 시장으로 넘어가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 현재 윤석열 정부의 신자유주의는 ‘이게 최고의 선(善)이다’라는 확신과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장화한 장애인 지원을 더욱 시장화

이러한 윤석열 정부가 대통령선거 시기부터 전면에 내세운 대표적 장애인 정책이 바로 장애인 ‘개인예산제’(Personal Budgets)다. 개인예산제는 어떤 개인에게 제공될 사회서비스의 총량이 정해지면 이를 이용자에게 현금 내지 바우처 등으로 지급하고, 이용자는 시장 또는 유사시장(Quasi-market)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자유롭게 선택해 구매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2023년 6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서울 마포구, 경기 김포시, 세종시, 충남 예산군에서 모의적용 사업이 이뤄졌다. 2024년과 2025년 시범사업을 거쳐 2026년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한국에서 개인예산제는 바우처로 제공되는 활동지원서비스, 주간활동서비스(18살 이상), 방과후 활동서비스(청소년), 발달재활서비스에 대한 칸막이를 부분적 혹은 전면적으로 없애는 것(이른바 ‘통합바우처형’), 혹은 활동지원서비스의 예산 중 일부(10~20%)를 다른 사회서비스에 사용할 수 있게 용도와 용처를 확대하는 것(이른바 ‘활동지원 확대형’)으로 논의됐다. 그리고 2023년 시행된 모의적용 사업은 후자인 ‘활동지원 확대형’을 모델로 한다. 어느 쪽이든 이 제도는 우리나라의 장애시민에게 ‘무익하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장애인복지지출이 0.71%로 경제협력개발구(OECD) 평균 1.98%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러 있다.(김현지 외, <2023 장애통계연보>, 한국장애인개발원, 2023년, 367쪽)

이러다보니 스웨덴의 장애인들은 ‘주(週) 평균’ 127시간의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지만(2015년), 한국은 ‘월(月) 평균’ 127시간을 기준으로 중앙정부의 활동지원서비스 예산이 책정됐다(2020~2023년). 달리 말하자면, 한국에선 장애인서비스지원 종합조사로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서비스의 ‘최대치’가 월 480시간이지만, 스웨덴은 ‘평균적으로’ 월 480시간의 서비스를 이용한 것이다. 더구나 발달장애인의 경우 약 90%가 월 60~120시간의 서비스밖에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비스 간 칸막이를 없애 자율적으로 조정하라거나, 활동지원서비스 예산을 다른 곳에 자유롭게 활용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예산을 절감할 여지도 없는데 밀어붙여

많은 나라에서 개인예산제를 중심으로 정부와 장애계 간에 모종의 타협이 이뤄진 이유 중 하나는 예산 집행의 효율성에 있었다. 서구 국가들의 경우 현물서비스 형태로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다가 이를 현금 또는 바우처로 전환하면서 다소 비대하게 존재했던 인력(공무원 및 준공무원)의 인건비와 행정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준현금지급제도(바우처) + 유사시장 시스템’ 아래 있기에, 비용을 절감하거나 절감된 예산으로 서비스를 확대할 여지가 전혀 없다.

서구 사회의 경우 공공 중심 사회서비스 체계를 구축한 뒤 민영화라는 과정을 거쳤지만, 한국은 처음부터 사회복지법인을 중심으로 한 민간 중심 복지체계가 구축되면서 사회서비스 분야의 공적 책임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즉, 서구 사회는 민영화를 추진했더라도 공공부문이 여전히 일정 지분을 지녔지만(스웨덴의 경우 활동지원서비스 제공기관의 47.5%가 지방자치단체다), 한국은 애초 공공부문의 지분이 거의 없다. 이런 조건에서 민간시장의 역할을 더욱 확대하는 개인예산제가 도입된다면, 그것은 곧 ‘사회서비스 공공성 강화’라는 과제가 포기됨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사회서비스 영역의 공공성 미비로 발생했던 여러 폐해와 부작용을 완화하려 추진된 것이 주지하다시피 바로 사회서비스원이다. 그러나 개인예산제를 장애 분야 핵심 정책으로 내세운 현 정부는 사회서비스원의 역할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 44번 ‘사회서비스 혁신을 통한 복지·돌봄 서비스 고도화’에서는 사회서비스의 공적 공급 체계 강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사회서비스원의 역할을 서비스 직접 제공이 아니라 민간 지원으로 전환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기조 속에 2022년 9월 말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은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와 청소년 발달장애인 방과후 활동서비스 사업을 하는 노원구종합재가센터 활동지원서비스 사업의 폐업을 결정했다. 2023년 9월에는 12개의 종합재가센터를 5개로 통폐합하는 개악안을 발표하고 추진하면서, 일부 주요 사업들은 종료됐다.

사회서비스원은 돌봄 공공성 확보의 보루

시장에서의 ‘소비자 권리’를 통해 장애인의 삶이 담보될 수 없다는 점은 수십 년에 걸친 신자유주의의 폭력적인 실험에서 국제적으로 이미 증명됐다. 단적으로 활동지원사 연계에 어려움을 겪는 중증·중복장애인에 대한 안정적이고 질 높은 서비스 제공이 수익을 추구하는 시장에서 영리사업자를 통해 이뤄질 리 만무하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돌봄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확장됐지만, 그에 걸맞은 사회적 전환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사회서비스원이 제대로 된 위상을 되찾고 그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이는 사회서비스 공공성 확보를 위한 투쟁에서 최우선 과제인 동시에 결코 물러서면 안 되는 마지막 보루일 수밖에 없다.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장애학의 도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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