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은지도 벌써 3주여가 지났습니다. 운동과 다이어트, 취업, 승진과 결혼 등 다양한 올해 목표를 세운 분들이 많을 텐데요. 건강을 위해 영양분을 고루 섭취하는 식단에 대한 관심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특히 전문가들은 거르기 쉬운 아침 식사를 가볍게라도 꼭 챙기는 것이 건강과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 항상 강조하는데요. 새해부터 무슨 뜬금없이 아침타령이냐고요?
당연히 오늘의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의 주인공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흥미롭게도 업계의 최대 라이벌이라 불리는 두 개 기업을 함께 소개할 텐데요. 공교롭게도 두 회사 모두 창업자의 이름을 따다 보니 한꺼번에 소개해 드리는 것이 나을듯 합니다. 오늘은 간편할 뿐 아니라 고루 영양분을 갖춰 오랜 기간 사랑을 받는 간편식의 대명사, 바로 시리얼 시장으로 건너가 보겠습니다.
90조원 시리얼 시장의 왕좌는 누가?
시장조사기관 FMI에 따르면 전 세계 시리얼 시장은 2023년 기준 438억 달러. 한화 야 58조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특히 FMI는 전 세계 시리얼 시장이 10년 뒤인 2033년엔 688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매년 4.6%씩 성장을 거듭해 90조원 규모의 시장으로 커진다는 뜻입니다. 주 소비시장인 미국과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 등지에서도 시리얼은 아침 식사를 대신할 간편식의 대명사로 지속적인 성장이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시리얼’ 하면 떠오르는 브랜드 무엇이 있으신가요? 많은 분들은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켈로그 콘 푸로스트를 말씀하실 거고요. 다른 분은 무슨 소리냐, 나는 사자 기운이 가득한 포스트의 콘푸라이트를 먹고 자랐단 분들도 계실 겁니다.
켈로그와 포스트를 대표하는 두 제품은 옥수수를 주된 원료로 해 설탕 바름(프로스트) 처리를 한 콘플레이크 시리얼입니다. 얇은 조각(플레이크)으로 만들어져 고소하며 달콤한 맛을 내는 해당 시리얼은 우유에 말아 먹거나, 그냥 시리얼째로 과자처럼 먹으며 학창 시절 부족한 아침 시간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켈로그와 포스트, 두 회사 모두 창업자의 이름을 딴 브랜드입니다. 그리고 두 창업자의 운명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처럼 꼬여버리고 말았습니다.
현대 시리얼의 개발자, 존 켈로그
먼저 켈로그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켈로그의 창업자는 사실 두 명입니다. 바로 존 하비 켈로그와 윌 키스 켈로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람은 켈로그 집안의 아들들로 태어난 형제지간입니다. 먼저 형, 존 켈로그는 1852년 미국 미시간주 타이론에서 존 프레스턴 켈로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낳은 직후 미시간주에 위치한 배틀 크릭이란 지역으로 이주해 빗자루 공장을 열었습니다. 사업은 그럭저럭 됐습니다.
당시 예수재림교를 믿고 있던 켈로그 가족은 정규 교육이 불필요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평소 병약했던 존 켈로그는 11살까지만 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아버지의 빗자루 공장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독서광이고 교육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높았습니다. 그는 독학을 통해 공부를 이어갔고 12살이 되던 해 공장을 떠나 인쇄소의 교정 및 편집 작업일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그의 원래 꿈은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20살이 되자 미시간주립 사범학교에서 교사 훈련과정에 등록해 공부를 이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 헌신하는 의료인 양성을 목표로 한 그의 가족들은 켈로그가 의사가 되길 바랬습니다.
결국 가족들의 설득 끝에 그는 미시간 대학 의대로 진학해 1875년 의사 면허증을 땄습니다. 졸업 이듬해인 1876년 그는 가족의 소망대로 ‘웨스턴 헬스 리폼 인스티튜’란 의료기관의 소장으로 부임했고 1년 뒤인 1877년 배틀 크릭 메디컬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향후 이 기관은 지역을 대표하는 요양원으로 자리매김했고 존 켈로그는 해당 요양원을 평생 이끌었습니다.
독실한 재림교인이었던 그는 요양원의 최고 의료책임자로 일하며 채식, 금주, 운동 요법 등 다양한 식단과 프로그램을 짜는데 공을 들였습니다. 그의 운영이 빛난 덕분인지 해당 기관은 지역 뿐 아니라 미국 안팎에서 이름난 요양원으로 소문났습니다.
이 요양원에는 윌리엄 태프트 전 대통령, 북극 탐험가 아문센, 노벨상 수상자인 조지 버나드 등 미국의 내로라하는 유명인들이 지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계가 어렵고 환경이 좋지 않은 저소득층이나 어려운 사람들 역시 이곳 요양원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알파벳 한글자 바꾼 가짜 원조?
존 켈로그는 항상 이 곳에 머무르는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쉽고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습니다. 식사 역시 마찬가지였고 좀 더 건강하면서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의 필요성을 체감했습니다. 그 결과 씹기 쉽고 소화가 잘되는 아침 식사를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밀, 귀리, 옥수수 등을 혼합해 반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전분 성분을 첨가한 뒤 굳혀내니 먹기 쉬운 켈로그표 아침 식사 메뉴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품은 일종의 모방제품이었습니다.
사실 곡물들을 한데 섞어 식사용 시리얼을 최초로 개발한 이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뉴욕주에서 요양원을 운영하던 제임스 케일럽 잭슨입니다. 그는 1869년 곡물가루를 물에 반죽한 뒤 굳혀 이를 ‘그래눌라(granula)’라고 명명합니다. 다만 해당 제품은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고 너무 딱딱해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았던 것입니다. 켈로그는 처음엔 이 그래눌라를 사다가 환자들에게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환자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사람들이 못먹겠다고 하자, 꿀을 첨가해 단맛을 보탠 뒤 좀 더 먹기 좋게 재료와 제형을 바꿔가며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들었습니다.
원조보다 더 맛있는 이 제품은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며 누가 원조냐를 놓고 소송에 처합니다. 제임스 잭슨이 자신의 그래눌라를 베꼈다고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러자 켈로그는 1881년 재빨리 알파벳 한 글자를 바꿔 그래눌라(graula)가 아닌 그래놀라(granola)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사실 요양원 내부에서 식사 대용으로만 사용할 땐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맛본 많은 유명인과 환자들이 입소문을 내는 바람에 켈로그의 그래놀라를 맛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이런 소송 문제가 발생한 것이죠. 다만 당시 미국에서도 저작권 보호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엄격하지 않다 보니 이름만 바꾼 것만으로도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인기를 모으자 켈로그는 아예 해당 식품을 제품화하고 판매하기 위한 회사 ‘Sanitas Food Company’를 1890년 설립합니다. 이 회사는 그래놀라 뿐 아니라 이를 조각내고 얇게 썬 플레이크 형태의 켈로그만의 시리얼을 개발하는 등 연구를 거듭하며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시리얼 사업은 순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실 존 켈로그는 시리얼 사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의사이자 요양원 운영자로서 환자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시설을 잘 운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켈로그 브랜드를 만들어낸 동생 켈로그
여기서 바로 그의 동생이 등장합니다. 켈로그 시리얼을 개발한 사람이 존 켈로그라면, 시리얼 사업을 발전시키고 사실상 사업가로의 면모를 보여준 사람은 그의 동업자이자, 실질적인 창업자인 그의 동생 윌 켈로그입니다.
존 켈로그보다 8살 어린 윌 켈로그는 1860년 출생합니다. 고학력자인 의사, 존 켈로그와 달리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업에 눈을 떴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빗자루 공장에서 일하며 빗자루 판매를 배웠으며 여기서 익힌 세일즈 기술을 바탕으로 텍사스 달라스에서 빗자루 사업을 이어가는 등 각종 사업 경험을 쌓습니다. 그러던 중 1879년 그는 형의 배틀크릭 요양원 관리자로 부임하게 됩니다.
사실상 낙하산이죠. 그는 존 켈로그가 개발한 그래놀라 제작 요리법을 총괄하며 사업화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개발을 위해 비율을 바꿔가며 최적의 레시피 개발에 몰두했고 실제로도 영양과 맛, 두마리 토끼를 잡는 요리법을 완성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윌 켈로그는 사업을 더욱 확장하자며 형, 존 켈로그를 설득합니다.
하지만 항상 동생을 얕잡아보던 존 켈로그는 동생을 무시하며 평가절하했고 둘의 동행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윌 켈로그는 이러한 레시피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싶어했지만 존 켈로그는 환자를 위한 일이라며 항상 환자들에게 요리법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자 했습니다. 사사건건 부딪치던 그들은 시리얼에 설탕을 첨가하느냐를 놓고 둘은 완전히 갈라서게 됩니다. 형은 환자들의 건강이 우선이라며 설탕을 첨가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고, 사업가 윌 켈로그는 설탕을 넣어서 보다 대중적이고 맛있는 시리얼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윌 켈로그는 결국 1906년 ‘배틀 크릭 토스트 콘플레이크’라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 형과의 동업을 사실상 끝냈습니다. 이 회사는 지금의 켈로그사의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이 회사의 이름은 정확히 W.K.켈로그. 윌 키스 켈로그의 이름이 고스란히 브랜드가 된 것입니다.
도둑맞은 레시피, 먼저 내놓으면 임자?
형제의 갈등엔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아이디어를 낚아챈 도둑, 찰리 윌리엄스 포스트 때문입니다. 1854년 일리노이주 출신 C.W 포스트는 사실 실패한 사업가였습니다. 농구기 판매와 각종 사업을 하던 그는 연전연패했고 신경쇠약에 걸린 그는 무일푼 상태로 요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 요양원은 바로 존 켈로그의 배틀크릭 요양원입니다.
환자로 치료받던 그는 아침 식사로 나오는 그래놀라 시리얼의 맛과 간편함을 처음 접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사업가 기질이 발동된 그는 아침식사 비용을 내겠다는 핑계로 요양원 조리실에서 일하며 몰래 시리얼 레시피를 빼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퇴원을 앞두고는 모든 레시피와 비밀을 몽땅 가져올 수 있었고 1895년 퇴원하자 마자 인근 사무실에서 살짝 변형을 가한 그래놀라 시리얼을 상품화해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포스튬 시리얼즈 컴퍼니가 바로 그 회사입니다. 즉 개발은 켈로그 형제가 해놓고 상품은 포스트가 먼저 내놓은 것입니다. 포스트가 내놓은 첫 시리얼 ‘그레이프 너츠’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이를 알게된 켈로그가 형제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은혜를 원수로 갚아버린 포스트 시리얼의 인기는 결국 켈로그 형제들의 관계까지 멀어지게 하며 시리얼 시장의 피 튀기는 전쟁을 일찌감치 예고한 셈입니다.
동생 켈로그의 타도 포스트 계획을 번번이 가로막던 형 켈로그. 우연한 사건이 결국 켈로그의 성장을 돕게 됩니다. 바로 그가 운영하던 요양원에 큰 화재가 발생해 요양원 전체가 전소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인데요. 사건 이후 존 켈로그가 낙담해 있자 윌 켈로그는 그가 투자받은 돈을 기꺼이 내놓으며 요양원 재건을 돕습니다. 단, 조건이 붙었는데요.
바로 켈로그 브랜드명과 레시피에 대한 권리를 전부 넘기라는 것이었죠. 이렇게 형제간의 갈등은 화재로 인해 완전히 일단락됐고 이후 존 켈로그는 켈로그라는 이름을 브랜드로 쓸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경영에서도 사실상 배제됐습니다. 이후 사업가 윌 켈로그의 뛰어난 사업 역량 덕분에 원조기업 켈로그도 점차 시장영향력을 늘려가며 포스트와 켈로그의 세기의 경쟁이 이어진 것입니다.
사실 이 두회사의 악연으로 인해 포스트는 미국에서도 남의 레시피를 빼앗아서 성공한 사업가란 인식이 강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켈로그의 그래놀라 역시 그래눌라를 표방한 제품이라는 점이 재미있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 뺏고 뺏기는 세상, 영리한 사업가의 기질은 어쩌면 타고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