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깔린 많은 종이들 가운데 하나를 탁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 흔히 언론의 역할로 불리는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제 설정)이 그와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 뉴스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고민과 취재를 거쳐 우리가 내놓는 기사(어젠다)는 독자에 말을 거는 일이다. 뉴스 수명이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세계일보만의 기사를 소개한다.
영화 ‘서울의 봄’이 역대 한국 영화 흥행 톱 10 순위에 들었다고 한다. 지난 16일 기준 누적관객수가 1280만명을 넘었다. 세대별로 고르게 영화관을 찾는데다 ‘N차’ 관람도 적잖은 것으로 알려졌다. 관객 1000만 돌파 기록을 기뻐할 사람들은 당연히 영화 제작사, 배우, 스탭 등 영화 관계자들일 것이다. 이들만큼이나 기뻐하는 이들이 또 있다. 영화가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의 반란을 다루고 있는 만큼 ‘영화 흥행=신군부 세력에 대한 분노’를 기대하는 야권 인사들이다. 영화 흥행이 다가올 총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실 ‘서울의 봄’은 지난해 11월말 개봉했으니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총선’ ‘정치’와 무관하게 막을 내렸을 것이다. 교과서에서나 신군부세력 반란을 접했을 젊은 층이 긴박한 연출과 배우들의 실감나는 호연에 ‘심박수 인증 챌린지’ 같은 이벤트에 동참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극중 이름은 다르지만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영화 이후의 서사’도 흥행에 기여했다. ‘쿠데타 주역들 권세 누리고...참군인·가족은 비극적 삶’(1월13일자·이강은 선임기자) 기사는 영화에 등장한 실제 인물들의 삶을 다뤘다.
◆‘서울의 봄’ 흥행이 남긴 것
영화를 본 한 군출신 인사는 “거의 90%에 가깝게 재연했다고 본다”고 했다. 감독의 말처럼 행주대교앞에서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이 신군부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친 장면이나 전두광(황정민)과 이태신이 경복궁 앞에서 대치한 마지막 장면 등은 허구였지만 반란이 진행된 9시간 동안 육군본부, 국방부 등 곳곳에서 실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다큐물이 아니면서도 인물, 사건의 일치율이 높은 점이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였고, 실제 인물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반란에 성공한 세력과 이들을 막는데 실패한 사람들의 삶은 극과 극이었다. 영화에 등장한대로 성공한 이들은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군 고위직 등을 두루 맡으면서 영광을 누렸다. 김영삼(YS)정부에서 특별법에 따라 주역들이 반란죄, 내란죄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면서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다는 사례를 남기긴 했지만 당사자들의 대국민 사과, 피해자 및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보상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특전사령관을 홀로 지키다 숨진 김오랑 중령 추모회를 이끄는 김준철씨는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박희도, 장세동처럼 쿠데타 핵심 세력중 살아있는 사람들이 (전두환·노태우를 대신해서라도) 더 늦기전에 진정한 사죄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치권 논란도 낳았다. 관객수 500만명을 넘어서면서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이 “역사 퇴행을 막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대정부 비판에 나섰다. 이에 국민의힘측에서는 하나회를 척결하고 쿠데타 주역을 법정에 세운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면서 “역사를 선동에 이용하지말라”고 맞섰다. 하나회 척결은 YS가 자서전에서 상당 분량을 할애할 정도로 자부심을 드러낸 정치적 유산이다. 그는 취임 초 전광석화처럼 하나회 핵심인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을 바꾼 뒤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때 놀랐제?”
◆선거는 선거, 영화는 영화일 뿐?
‘서울의 봄’ 흥행에 고무된 야권 인사들은 김대중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10일 개봉한 ‘길위에 김대중’ 영화 흥행을 은근히 기대했다. 3부작으로 만들어지는 이 영화는 우여곡절끝에 명필름에서 맡아 제작중이다. 1부작은 개봉 6일만에 6만명을 넘기며 순항했지만 상영 영화관이 많지않은데다 관심층이 넓지 않아 얼마나 관객이 찾을 지는 좀 더 지켜봐야할 듯하다.
선거때마다 ‘정치 영화’가 주목을 받았으나 그 영향력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2007년 5.18광주항쟁을 다룬 ‘화려한 휴가’가 상영돼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손학규, 정동영 등 주요 여당 인사들이 영화관을 찾았고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그 해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역대급 격차로 당선됐다. 2012년 대선 당시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개봉됐을 때는 문재인 후보가 관람하고 눈물을 흘려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대선 결과는 박근혜 후보의 당선이었다.
제작사와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정치 영화’로 불린 ‘변호인’이나 ‘택시운전사’ ‘1987’ ‘국제시장’ 등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지만 정치권에서 기대한 ‘정치적 효과’는 없었다. 그렇다고 감성적 컨텐츠인 영화가 여론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하긴 어렵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퇴임 후 부인 미셸 오바마와 함께 콘텐츠 제작사 ‘하이어 그라운드 프로덕션’을 설립하자 일각에서는 사실상 제2의 정치 인생을 시작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 등 자신이 관심을 가져온 일자리, 공동체의 삶, 리더십에 관한 컨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당장 정치적 선호, 취향을 바꾸기보다는 정치적 어젠다에 대한 여론을 만드는데 초점을 맞춘 셈이다.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출연진이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하지 말자!”를 외치며 끝내는 코너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선거는 선거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노골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제작한 영화도 있지만 대개 그런 경우 완성도가 떨어져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영화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인, 강화하는 사례는 많아도 정체성 자체를 바꾸는 경우는 적다. 영화관이든 다른 플랫폼이든 영화를 선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감동, 재미를 원할 뿐이다. 정치권만 영화 한 편을 놓고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