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 줄기에 달린 ‘솜이불 성’…어떤 곤충의 겨울 집일까
대한(大寒), 씩씩한 로제트 식물과 알집 안 곤충들
가장 어둡고 음울한 겨울의 끝인 동지(冬至)를 지나면 해가 조금씩 길어진다. 오늘은 큰 추위가 온다는 대한(大寒). 영하 18도 안팎의 맹렬한 추위가 찾아오기도 했었지만, 조금씩 길어진 햇살과 부드러워진 바람이 어둡고 차가운 회색빛을 많이 걷어냈다.
동지부터 대한까지 낮이 고작 30분 길어진 것인데도 자연의 표정이 바뀐다. 풀은 줄기가 극단적으로 짧아 땅에 착 달라붙은 것처럼 보이지만, 추운 바람을 피하고 햇빛을 잘 받기 위해 사방으로 잎을 펼친 것이다. 장미꽃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로제트(Rosette) 식물은 벌써 파릇파릇하다. 냉이, 달맞이꽃, 시금치, 민들레 등이 대표적인 로제트 식물이다.
로제트 형태로 월동한 식물은 이른 봄에 가장 빨리 새잎을 틔울 수 있다. 몸을 낮춰 다른 식물보다 먼저 싹을 내고 곤충들을 일찍 맞이해서 앞서 꽃을 피운다. 잎에서 뿌리까지 수분 이동이 수월해 에너지 손실이 적고, 이미 만들어 놓은 잎으로 광합성을 하며 저장해 놓은 영양분으로 매서운 추위와 서릿발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번식을 위한 가장 안전하고 슬기로운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날이 풀려 땅속까지 봄기운이 스며들면 잎자루를 곧추세우고 햇빛을 모아 다른 식물을 제치고 빠른 속도로 자라서 온 들녘을 덮을 것이다. 냉이, 달맞이꽃, 엉겅퀴, 개망초, 꽃다지, 광대나물이 양지바른 길가에 이미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로제트 식물이지만 땅에 착 달라붙은 종류와는 달리 긴 줄기와 많은 잎을 달고 겨울을 나는 산괴불주머니는 이미 성장을 시작했다. 오색의 비단 헝겊에 솜을 넣고 예쁘게 수를 놓아서 만든 노리개를 ‘괴불주머니’라고 하는데, 꽃 모양이 괴불과 비슷하여 ‘산괴불주머니’란 이름이 붙었다. 이름은 낯설지만 한반도 전역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는 예쁜 야생화다. 지난해 가을에 싹을 내어 자리를 잡은 산괴불주머니는 한 줌 볕에도 알뜰히 자라 벌써 줄기가 한 뼘 이상 쑥 올라와 푸른 빛이 역력하다.
산괴불주머니는 양귀비목의 식물로 뿌리를 진통, 타박상의 약재로 사용하지만, 곤충에게도 사랑받는 식물이다. 꽃 끝 꿀머니에는 온갖 곤충이 모여들고, 잎은 모시나비 애벌레가 꼭 찾아 먹는 먹이식물이기도 하다. 기린초와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가 한겨울 공생 타이밍을 맞추는 것처럼 모시나비 애벌레는 산괴불주머니 잎을 골라 먹는다.
한겨울에도 자연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파릇한 식물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에 기운이 난다. 북반구 온대 지역인 한반도에 사는 생물에게는 겨울은 엄청난 시련이다. 매년 반복되는 원천적 위험 상황인 겨울을 극복하지 못하고 모두 죽어버리면 생명의 순환고리가 끊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겨울잠으로 추위를 피하거나 조건이 좋은 곳으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버텨내야 한다.
겨울을 인내하는 풀과 나무의 겨우살이와 달리 곤충은 텅 빈 숲 어디에 숨어서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까. 다음 세대를 잇기 위해 겨울과 맞서고 있는 월동 곤충을 찾아본다.
매화나무 가지에 나뭇잎으로 꽁꽁 싸매고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집이 딱 월동하는 집이다. 겹겹이 붙어 있는 나뭇잎을 뜯어보니, 털실 모양의 집이 한 겹 더 감싸고 있다. 안전 가옥 안에 포도 형태 빨간 알이 모여 겨울을 나고 있는데 만져보니 말랑말랑하다. 아직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나방 알 덩어리로 추정된다. 정체불명의 종에 대한 과학적 호기심도 있지만, 아직 국내 기록이 없던 미기록종이나 세계적으로 처음 확인하는 새로운 신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잘 키우고 있다.
메마른 갈색 가지에 갈색 사마귀 알집이 붙어 있다. 위장했지만 찬바람을 막을 두툼한 원통형의 큰 집 때문에 쉽게 눈에 띈다. 지난가을 사마귀 암컷이 산란하면서 추위와 건조를 막고, 천적으로부터 알들을 보호할 생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과연 안녕한지 거죽을 벗겨보았다. 곤충계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지만, 그들에게 기생하는 놈들은 막을 도리가 없었나 보다. 수시렁이 애벌레가 수백 개의 알과 알집을 다 파먹고 집을 차지하고 있다. 온전한 알집의 알은 촉촉한 것이 월동하기 좋은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가장 그럴듯한 방한용 보금자리는 솜 같은 푹신푹신한 이불로 전체를 싸고있는 놈들이 아닐까? 쑥 줄기에 하얀 솜으로 혹을 만들어 월동하는 집에는 과연 어떤 놈들이 살고 있을까? 겨울 추위가 닿지 않는 아늑한 곳이므로 모두가 탐낼만한 피난처다. 바깥 솜을 털어내니 안쪽은 딱딱한 목질부가 2차 방어막으로 성(城)을 만들었다. 그 성안에 또 방을 만들어 벌 종류의 애벌레들이 살고 있고 한쪽에서는 명나방과에 속하는 애벌레가 자리 잡고 있다. 서로 죽이지 않고 사이좋게 공간을 나누어 공존하고 있다.
별박이자나방 애벌레도 끈끈하고 탄력성이 좋은 하얀색 실을 통해 커다란 그물 모양의 집을 만들어 수백 마리가 집단으로 겨울을 나고 있다. 좀 엉성하지만 나름 효력이 있는 방어막이며 월동 형 집이다. 끈적끈적한 망에서 월동하는 애벌레의 생존율은 매우 높아 봄이 되면 거의 모든 애벌레가 새카맣게 쥐똥나무에 달려든다. 관상용인 쥐똥나무에 큰 해를 끼치는 산림해충으로 분류되어 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있지만, 연구소에서는 멸종위기종 먹이로 활용하니 쓰임새가 좋다.
아직 덜 자란 멸종위기종 어린 금개구리를 겨울에 사육할 땐 ‘살아있는’ 먹이 공급이 가장 어려운 문제인데, 월동 중인 별박이자나방 애벌레를 깨워 금개구리에게 먹이면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 한 마리씩 실에서 떼어내 입에 넣어주는 작업이 고생스럽지만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어 건강해진 금개구리를 보면 ‘해충’도 고맙다.
아무 생명도 살지 않는 텅 빈 숲과 들처럼 보이지만 생명들은 지난가을부터 다가올 봄을 준비하고 깨어날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사진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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