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날리면’…진실 없는 허위가 가능한가
사실 관심 밖이었습니다. 2022년 12월 외교부가 문화방송(MBC)을 상대로 제기한 ‘바이든-날리면’ 정정 보도 청구 소송은 그저 ‘액션’에 불과하다고 치부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해 9월22일 미국 뉴욕 국제회의장에서 뭐라고 말했다는 건지, 원고인 외교부조차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서 상식적인 재판부라면 정정 보도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으리라 확신했습니다. 아니 그보다 당사자도 아닌 외교부가 소송 주체로서 적절한지, 자격 여부가 먼저 문제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24년 1월12일 1심 재판부는 외교부 손을 들어줬습니다. 당혹감과 실망스러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찬찬히 판결문을 읽는 내내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정정하라는 것인가요?”
대통령·외교부 아닌, MBC가 증명해내라고요?
어떤 보도를 ‘허위’로 규정하기 위해선 당연히 대비되는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외교부는 1년 넘는 재판 과정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끝내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대통령실이 했던 것처럼 ‘날리면’이라는 주장도 꺼내 들지 않았습니다. 외교부가 신청해 진행된 음성 감정에선 ‘욕설’과 ‘비속어’는 확인되지만 ‘바이든-날리면’은 판독 불가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판독 불가 판정이 나온 것은 의아했지만 백번 양보해 그렇다 쳐도 가능성은 다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바이든은’이라고 발언한 사실도 없음이 밝혀졌다”라는 문구로 정정 보도를 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외교부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데도 알아서 허위 여부를 가려준 괴이한 판결이었습니다. 소송 당사자도 머뭇거리는 지점에서 어떻게 재판부는 주저 없이 판결할 수 있었을까요. 정녕 ‘진실’ 없는 ‘허위’가 가능한가요?
윤 대통령의 실제 발언이 무엇이었는지 그 증명 책임을 MBC에 돌린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정 보도에서 진실에 대한 증명 책임은 원칙적으로 청구자에게 있다’라고 판단했던 대법원 판례에 비춰보면, 외교부의 청구는 기각되는 게 상식적입니다. 물론 ‘과학적 사실’에 관한 보도는 언론사에도 입증 책임이 부여된다고는 하지만 ‘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는지’가 과학의 영역에 속하기라도 한단 말인가요? 정작 대통령 자신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말을 무슨 수로 MBC가 증명한단 말인가요? 60% 가까운 국민이 ‘바이든’으로 들린다고 답했듯 MBC 기자들 역시 상식적인 눈과 귀로 상식적 판단을 했고, 확인과 논의를 거쳐 보도했습니다. 당시 140개 넘는 언론사가 같은 내용으로 보도했습니다. MBC에 책임을 전가한 이번 판결대로라면 다른 언론사들은 자체 판단 없이 MBC의 영향으로 허위 보도를 하게 됐다는 말인가요?
14시간 뒤에야 나온 해명, 그리고 공격
재판부는 단정적으로 결론지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미국 의회와 바이든을 향해 욕설과 비속어를 썼다고 볼 수 없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한·미 대통령의 연설 내용, 여소야대 국회 상황 등을 판단 이유로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맥락상 미국 의회가 아닌 한국 국회를 지칭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바이든-날리면’의 사실 여부가 가려지진 않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바이든’이라고 들리지 않으므로 ‘허위 보도’라고 지적하면서도 정작 맥락과 정황을 근거로 결론을 내는 모순, 판결문 곳곳에서 발견되는 엉성한 논리를 보며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운 건 저뿐일까요?
다시 2022년 9월22일 그날로 돌아가봅니다. 오전 10시7분 MBC 디지털뉴스팀이 유튜브에 관련 영상을 최초로 게시한 이후 별다른 반응이 없던 대통령실은 14시간이 지난 뒤에야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었다”는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MBC를 향한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정부·여당은 MBC를 ‘가짜뉴스 진원지’로 매도했고, 영상을 조작했다거나 야당과 사전 교감을 나눴다는 황당한 음모론까지 들고나왔습니다. 일부 극우 커뮤니티에선 관련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실명과 이력까지 ‘신상털기’에 나섰습니다. 대통령실의 해명이 나온 이후엔 그 적절성 여부를 떠나 MBC는 ‘바이든-날리면’을 함께 적어 후속 보도를 이어갔지만 이미 ‘국익을 훼손시킨 허위 보도 방송사’로 낙인찍힌 뒤였습니다.
이후 정부·여당의 괴롭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집요해졌습니다. MBC 기자의 질문 태도를 핑계 삼아 대통령의 출근길 문답을 중단했고, 심지어 전용기가 자신들의 소유물인 양 MBC 기자 탑승을 배제했습니다. 인사청문회 기간 기자들 사이에 오가는 정보임에도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 개인정보 유출 혐의를 들어 이례적으로 MBC 뉴스룸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도했습니다. <뉴스타파>의 김만배 인터뷰가 문제 되자 당시 인용 보도를 한 수많은 언론사 가운데 비판 언론만을 문제 삼았고, 그중 MBC 기자 4명을 무더기로 고발했습니다. 심지어 강승규 전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이 MBC를 ‘매국 언론’으로 표현하며 관제데모를 사주한 정황이 뒤늦게 드러났고, 실제 MBC 사옥 앞은 보수단체의 규탄 집회로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이 판결로 “국민 신뢰 회복” 기대한다는 대통령실
아직 확정된 판결은 아니지만 필시 이번 판결을 구실 삼아 MBC에 대한 공격은 더 거세질 것입니다. 이번 소송과는 별개로 당시 국민의힘 등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해 이 건을 수사 중인 경찰도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 할 것입니다.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관리감독 기관을 앞세워 MBC를 압박하고 경영진을 교체하려는 움직임은 지금보다 더 속도를 낼 것입니다. ‘국민을 상대로 한 청력 테스트’라는 냉소 속에 이런 보도조차 법정에서 진위를 가려야 하는 상황이 참담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언론 자유가 이 정도 수준이라는 무거운 현실을 또 한번 깨닫습니다.
대통령실은 이례적으로 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을 내놨습니다. “MBC의 허위 보도는 무책임한 일”이라며 “국민 신뢰 회복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논평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모르는 건지 또 다른 논란을 피하고 싶은 건지, 정작 국민 신뢰 회복에 영향을 미칠 만한 기자들의 질문에는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욕설과 비속어에 대한 입장 표명도 없었습니다. 이에 저 또한 한 명의 기자로서 다시 묻습니다. “그래서 대통령께선 그날 대체 뭐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까?”
박주린 문화방송(MBC)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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