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미군의 합작품, 제주 4‧3 학살…이래도 이승만기념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그날이 38도선을 경계로 분단이 시작된 날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은 우리 민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38선을 그었다. 그리고 80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다. 제주사람들은 38선을 걷어내고 조국의 하나된 완전 자주독립을 쟁취하자고 외쳤다가 혹독한 희생을 치렀다. 그게 바로 '4‧3봉기'이다. 필자가 4‧3의 원 뿌리가 38선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47년 3‧1 경찰 발포가 4‧3의 도화선
1947년 3월 1일, "3‧1정신으로 통일독립 전취하다"는 슬로건 아래 시위를 벌이던 제주사람들에게 경찰이 발포, 6명이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자들은 시위군중도 아닌 구경꾼들이었다. 경찰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했고, 목격자들은 비무장 민간인들을 향한 무차별 발포였다고 반박했다. 3월 10일, 제주도민들이 총파업을 했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로 보기 시작했고 본토에서 경찰 4백여명을 내려보내 고문을 시작했다. 이어 극우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까지 파견했다. 백색테러가 횡행했지만 눈감아주었다. 1년동안 청년 2,500명을 구속시켰다. 1948년 3월 한달동안 경찰에 의해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중학생도 경찰지서에서 뭇매를 맞고 숨졌다. 제주도는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가 되었다.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은 미군정에 대한 반감 분위기와 당면한 단독선거 반대 캠페인을 접목시켜 1948년 4월 3일 무장투쟁을 실행했다. 극우세력들은 이를 두고 마치 제주도에서만 '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왜곡해 왔다. 미군 보고서에 의하더라도, 4‧3봉기 이전, 즉 1948년 2월과 3월 두달새 본토에서 모두 239건의 경찰관서 습격사건이 있었다. UN에서 '한반도에서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미 북쪽을 통치하던 소련이 반대의사를 밝혔기에 그것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의미했다. 남한사회가 요동쳤다.
유일한 5‧10 선거 보이콧, 재선거마저 실패
미군정은 4‧3 초기에는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을 투입해서 진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태가 계속 악화되자 경비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9연대 김익렬 연대장은 무장대 측 총책인 김달삼과 만나서 '4‧28 평화회담'을 추진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묵살했다. 그러면 무장투쟁은 이미 본토에서도 진즉 빈번하게 일어난 일인데, 왜 유독 제주도에서만 유혈사태로 확대된 것일까? 그것은 미군정이 시행한 5‧10 선거를 제주도민들이 보이콧했기 때문이다. 5‧10 선거는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였다. 당시는 유권자 50%이상 투표해야만 인정되는 제도였다. 그런데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유일하게 제주도 2개 선거구만 투표율이 50%를 넘지 못해 무효처리됐다.
미군정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 총사령관은 즉시 전투사령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브라운은 제주에 와서 "나의 사명은 진압, 조속히 재선거를 시행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제주도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쓸어버리는 작전을 수행한다"고 공언했다. 미군 사령관의 작전은 선거 실행에 방해가 되는 청년들을 죄의 유무 가리지 않고 무조건 검거하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되자 마을마다 보초가 생겼다. 토벌대의 마을 진입을 망보는 보초들의 신호에 따라 청년들은 산으로 도망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6주 동안 잡힌 청년만 6천명에 이르렀다. 중학생도 있었다. 이처럼 무차별 검거작전은 '폭도아닌 폭도'를 양산시키는 부작용을 속출했다. 이런 무모한 작전을 펼쳤지만 미군정이 장담하던 6‧23 재선거마저 실패했다.
미군정에게는 1947년의 3‧1 발포나 3‧10 총파업 때, 아니면 1948년의 4‧3 봉기, 4‧28 평화협상, 5‧10 선거 때 등 여러 차례 선무활동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민심 수습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힘자랑하듯, 물리력만 동원해서 사태를 진압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재선거마저 실패했으니 미군 수뇌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초토화작전 감행으로 유혈사태 초래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됐다.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하지 총사령관의 합의에 따라 한미 군사안전 잠정협정이 체결됐다.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미군에 넘겨줬다. 이를 수행할 임시군사고문단이 발족됐고, 고문단장에 로버트 준장이 취임했다.
1948년 10월 9일, 로버츠 장군은 제주 진압작전의 수정을 지시했다. 그 직후인 10월 17일 제주주둔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 5km 이외 지역을 통행하면 무조건 총살한다"는 내용의 초토화작전 감행을 선포했다. '해안선 5km 이외의 지역'이라 함은 제주도 전체 면적의 80%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1948년 11월부터 감행된 초토화작전은 제주도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중산간 지대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됐다. '폭도의 양식'이 된다는 이유로 가축들이 몰살됐다. 민가 4만여 채가 토벌대의 방화로 깡그리 불탔다.
2003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는 4‧3의 희생자 수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했다. 이 희생자들 대부분이 이 초토화작전 이후 피해를 본 것이다. 비무장 민간인들을 현장에서 즉결처형하는 초토화작전은 국제법으로 엄금됐다. 1930년대 일본군이 만주에서 벌인 만행이었다. 이런 악행이 독립된 대한민국 정부 아래서 자행된 것이다. 송요찬 연대장은 "이 작전은 정부 최고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연대장 수준의 작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최고 명령권자는 누구인가? 많은 자료들은 이승만 정권과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을 향하고 있다.
초토화작전의 배후에 미군이 있었다는 증언과 자료들도 있다. '해안선 이외의 5km 적성지역' 개념은 이미 1948년 5월 미 CIC 장교가 제안했다는 9연대 정보주임(이윤락)의 증언이 있다. 초토화작전 때 국방부에서 무기와 장비를 직접 수령했던 9연대 군수주임(김정무)은 "군수국 고문관 마쉬 소령의 사인이 나와야 무기 출고가 가능했다"고 밝혔다. 더욱이 로버츠 고문단장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는 초토화작전을 실행한 송요찬을 제주에 파견하도록 추천한 장본인이다. 그리고 초토화작전이 한창 벌어진 1948년 12월 18일, "송요찬 연대장은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했다"면서 한국정부에 이런 사실을 널리 선전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제주4‧3은 한반도 분단과 동서 냉전이 빚어낸 국제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막강한 국가권력이라 할지라도 민심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물리력만 앞세워 진압하려고 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이 종료(1954년 9월 한라산 금족지역 해제)되기까지 무려 7년7개월이란 세월이 걸렸으니 하는 말이다.
최근에 이승만기념관이 추진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공이 있다 하겠으나 4‧3 연구자로서 볼 때 그는 미군과 더불어 4‧3 학살의 한 축이었고, 그 책임이 명백하다. 만약 그대로 추진된다면 그의 공로와 과오도 공정하게 기술될 수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또한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규명도 거론되고 있다. 물론 쉬운 사안이 아니다. 그럼에도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는 미국 측에도 지속적인 책임규명을 촉구해야만 한다.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양조훈 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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