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도 국경도 없어 매혹적인…나는 곧 남극으로 간다
그 모든 ‘없는 곳’으로
문명 없는 자연에 압도되기를
20대 때부터 품은 간절한 꿈
‘하계 연구대’와 함께 2월 출국
7월부터 검진·교육 준비 착착
지금은 2024년이 시작된 1월의 첫주이고 거실에는 붉은색 25인치 캐리어가 온갖 짐을 품은 채 입을 벌리고 있다. 당장 입남극 비행기가 뜬다고 해도, 물론 여기가 남극의 관문인 칠레 푼타아레나스가 아니라는 문제가 있지만, 당장 들고 뛰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준비를 해놓았다. 짐을 싼 건 극지연구소에서 수하물 무게를 미리 알려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대략의 짐 무게를 알기 위해 시작된 준비는 이후에도 멈춰지지 않았고 나는 이미 완성된 짐을 보면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다. 3주 이상을 떨면서 긴장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로 견뎌야 하는 것이다. 남극에 갈 예정이니까.
이 글은 아주 사소하고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길 것이다. 누군가 남극에 가고 싶어졌을 때 펼쳐 읽으며 방법을 찾아볼 수 있도록, 혹은 나처럼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남극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지만 익명성을 원할지도 모를 등장인물들을 위해 5% 정도는 정보의 가감을 할 예정이다. ‘우리’의 폴라(Polar) 일지가 아니라 ‘나의’ 폴라 일지이므로, 이 여정에는 나라는 사람의 관점과 입장이 들어가 있다는 점을 읽는 사람들이 참작해주었으면 한다.
‘없는 것’에 강하게 끌리다
오늘은 파상풍과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갔다. 접수를 하고 의사에게 여행을 위해 파상풍 주사를 맞고 싶다고 하자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남극에 갑니다.”
“그러면 여행이 아니잖아요?”
의사는 정확히 정정해주었다.
“그럼요.”
나도 얼른 동의했지만 스스로 뭔가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남극을 가다니, 하지만 오래도록 바라왔던 일이 이뤄진 것이므로 그 꿈에 있어서만은 당당할 수 있었다. 만약 꿈의 크기로 본다면 나는 남극 시민권을 충분히 획득할 만한 사람이다. 다만 과학적 발견이나 연구와는 상관없으니, 다소 ‘잉여적인’ 시민일 수는 있다. 물론 남극에는 주권도 화폐도 국경도 당연히 도시도 없지만 말이다.
극지연구소에서는 여름이면 각 분야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하계 연구대’를 파견한다. 한국은 남미 대륙과 가까운 세종기지와 남극 내륙의 장보고 기지를 가지고 있다. 남극이 어떻게 생겼는지 통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여러 책에서 엄지를 세운 손등 모양으로 설명하는 것을 읽고 겨우 기억할 수가 있었다. 엄지손톱 끝이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이라면 엄지 자체는 남극반도이고 손등 전체가 남극점이 있는 남극 내륙이다. 손등 중에서도 엄지손가락 쪽은 서남극, 새끼손가락 쪽은 동남극이며 우리의 장보고 기지는 손목 중간쯤인 테라노바만에 자리한다.
남극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사실 나는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들에 강하게 끌렸다. 거기에는 지폐가 없다. 돈과 신용카드를 들고 가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읽은 월동 대원들의 수기에서는 주로 초콜릿 같은 간식들을 통해 기쁨과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지금 초콜릿을 준비해두었다. 이걸로 누구에게 호감과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게 될지, 아니면 그 정도의 관계조차 맺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고열량의 간식을 다 먹어치우고 올지는 모르겠다. 모두의 환영을 받을 것 같기도 하고 모두의 무관심 속에 쓸쓸한 아웃사이더가 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며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고 체력도 좋지 못하다. 몇년 동안 남극과 관련된 책들을 읽어왔지만 그 정보란 만년빙 위의 눈 한송이처럼 보잘것없다. 낯가림이 심해 누구든 나를 보면 ‘긴장하고 있구나’ 하고 느낄 정도이고 겨울이 되면100여개의 핫팩을 준비해둘 정도로 추위를 싫어한다. 하지만 그런 내 한계들도 남극을 향한 열망을 꺾지는 못했다. 스스로도 불가해한 열정과 투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남극에는 인간이 (거의) 없다. 일년 내내 남극의 육지에서 지낼 수 있는 동물도 없다. 남극에 갔다 왔다고 하면 으레 사람들이 북극곰 봤냐고 묻는다던데 나도 며칠 전 그런 질문을 받았다. “남극에 가면 북극곰도 보겠네!” 북극곰은 다행히 북극에만 있다. 만약 북극곰이 남극에 있다면 인간은 물론이고 바다에서는 시속 40~50㎞로 재빠르지만 육지에서는 더딘 펭귄들이 위험해질 것이다.
인간과 그것이 만들어낸 문명이 없는 자연 속에서 나는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느끼고 싶었다. 여행을 떠나 잠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르며 인간종으로서 작고 단순하고 아주 겸손해지는 과정을 겪어보기를 원했다.
남극에는 또 자연이 만들어준 지리적 경계 이외에 다른 인위적인 경계가 없다. 누구도 그 대륙의 주인이 아니며 국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무엇보다 나는 그 점에 매혹당했다. 그곳의 빙원은, 빙산은, 유빙은 ‘국가’라는 제도 안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지구상에 그런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어딘가 숨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사실 20대 때 극지연구소에 취재를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난 홍성민 박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남극에 대한 단순한 흥미를 더 반짝이고 간절하게 만들었다.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급행버스를 타고 컴컴한 경인고속도로를 지나 퇴근할 때면 문득 차창 밖 풍경들이 얼음처럼 매끈한 어둠 속에 되비치면서 여기가 아닌, 그 없음의 대륙이 떠오르곤 했다. 그렇게 작가가 되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꿈은 사라지지 않았고, 어느새 인터뷰 중에 다음 작업 이야기가 나오거나, 독자들이 앞으로 쓸 작품의 공간을 궁금해할 때 “남극”이라고 조심스레 고백하기 시작했다.
여러번 시도 끝에 드디어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남극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몇년간 여러 경로로 시도했고 여러 경로로 거절당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그곳은 되도록 인간의 발자국이 닿지 않아야 하는, 내가 매혹되었듯이 ‘인간의 없음’이 본질인 곳이니까. 그럴 때마다 내 꿈에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포기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남극의 장면들을 품고 상상하고 말았으니까. 눈을 감으면 사실상 들어본 적도 없는 남극의 소리와 장면이 돌아가면서 거기서 살고 싸우고 사랑하고 역경과 맞서는 인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러면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다시 들었다. 쓰이지 못한 이야기는 가능할 때까지 내 안에서 말하고 흐를 테니까.
마지막 방법으로 또 한번 취재지원서를 쓰고 답을 기다렸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을 또 기약해봐야지 뭐,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는 비관도 들었다. 마침내 극지연구소에서 긍정적인 회신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날, 평소와 다름없이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양팔을 들고 소리치면서 감격하는 대신 곧바로 병원에 전화해 건강검진을 예약했다. 평소에도 내가 그리 즉흥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때는 정말 미리 매뉴얼을 짜둔 것처럼 신속하게 다음 단계로 옮겨갔다. 미루고 미루다가 12월에야 마지못해 건강검진센터에 나타나는 사람이었는데, 그때는 무려 7월이었다. 이틀 뒤 건강검진을 받았고 내시경 마취에서 깨어나면서도 ‘남극에 가야 하는데 별 이상은 없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남극 기지에 파견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준비도 있고 연구소에서 요구하는 훈련들도 있다. 내 경우는 하계에 파견되는 통신원이기 때문에 연구대에 준하는 훈련을 받았는데, 극지일반 교육 , 육상안전교육, 기초안전교육, 해상생존교육, 아스파(ASPA) 관리계획교육이었다. 남극 자체가 특별히 보호해야 하는 대륙이지만 그중에서도 환경적, 과학적, 역사적으로 존재 가치가 높아 조심히 접근해야 하는 공간을 ‘남극특별보호구역’(Antarctic Specially Protected Area)이라고 부른다. ‘아스파’라고 부르는 이곳을 출입할 때는 허가증이 있어야 하고 환경오염 가능성에 대한 계획서도 제출해 환경부와 외교부의 승인을 미리 얻어야 한다. 나 역시 동일한 절차를 거쳤다.
세종과학기지에서 2㎞ 떨어진 나렝프스키곶(나레브스키곶), 이른바 ‘펭귄마을’은 한국이 주도해 제정된 최초의 아스파다. 여름이면 1만여 마리의 젠투펭귄, 턱끈펭귄들이 모여 둥지를 만들고, 흰바다제비, 남방큰풀마갈매기, 갈색도둑갈매기 같은 새들도 날아와 새 생명을 품는다.
조약돌을 굴려 정성스럽게 집을 짓는 펭귄들, 솜털을 단 채 어른 펭귄들이 만든 ‘유치원’에서 공동 육아되는 아기 펭귄들. 남극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대하고 있을 그곳에 대한 기대를 품고 교육에 들어갔을 때 담당 강사는 “당신이 남극에 감으로써 남극에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일들”에 대해 따끔하게 경고했다. 우리 자신이 남극 생태계를 위협하는 균, 식물, 벌레 이동의 ‘매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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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외래종 유입 막으려…
“되도록 새 물건을 가져오세요. 가죽처럼 천연으로 된 옷과 신발을 준비하시고요.”
이 말은 내게 깊숙이 박혔고 한편으로는 엄청난 쇼핑의 빌미가 되어주었다. 강사는 인간의 왕래로 남극으로 들어와버린 나방파리, 겨울각다귀, 집게벌레의 상세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남극에 갔을 때 화장실 등지에서 이런 벌레들을 본다면 당장 때려잡으라고 강조했다. 과연 화장실 같은, 아무 일 없이도 나른하게 무방비 상태가 되는 곳에서 내가 벌레를 재빨리 처리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었지만 그게 내가 남극에 가했을지 모를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라니 노력은 해봐야 했다.
물론 남극이 아무것도 살지 않는 무생물의 공간이었던 건 아니다. 벌레는 물론이고 지의류 같은 식물들도 존재한다. 각다귀의 일종인 파로클루스 스타이네니는 남극에서 줄곧 살아온 고유종으로, 2천여년 전 영구동토층에서도 화석이 발견된다. 남극의 이 유일한 비행 곤충은 리빙스턴섬의 림노폴라 호수를 비롯해 남극 전역에 산재하는 빙하 피난처에서 위대하게 생존해왔다. 빙하 피난처란 남극 대륙의 긴 역사 동안 존재해온 얼음 없는 일종의 ‘오아시스’ 지역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런 고유종들과 달리 외래종들은 남극 생태계를 혼란케 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외래종인 겨울각다귀와 남극토종각다귀를 구분할 자신은 없었지만 뭐든 맞닥뜨리면 해치우리라 다짐했다.
강사는 과학연구를 목적으로 한 방문이라도 우리의 발자국은 남극에 남는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현재 남극에서는 미세플라스틱 농도가 증가하고 있는데 치약, 샴푸, 화장품, 샤워젤 같은, 체류 인원들의 일상용품이 원인 중 하나라고 했다. 이 이야기도 내 쇼핑의 빌미가 되어 친환경 제품들을 찾아 헤매는 계기로 작동하게 된다.
시기상 내가 가장 먼저 받은 교육은 해상생존교육과 기초안전교육이었다. 아직 출국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나는 곧바로 교육을 신청해 드디어 8월, 1박2일 일정으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어린 시절 떠나왔지만 부산은 내 고향이었고 갈 때마다 엄마와 동행하거나 적어도 알리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전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남극에 간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대체로 내가 뭘 하겠다고 하면 말리는 분들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아이들을 기르며 자연스럽게 익힌 불안과 경계가 부모님에게는 늘 있었다. 가끔 “어떤 아빠 밑에서 자랐어요?” 하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약간의 농담과 유감을 담아, 영화 ‘테이크 쉘터’랑 비슷했다고 답하곤 했다. 영화는 오지 않는 토네이도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뒷마당에 피난처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다. 작가가 된 뒤로는 “작가”니까 할 수 없다고 잘라버리는 통에, 그리고 나이도 들을 나이가 아니니까 포기하곤 했지만 부모의 걱정과 불안은 여전히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남극에 간다고 한다면? 나는 준비가 시작되기도 전에 몰아닥칠 반대를 떠올리며 아예 말을 않기로 했다. 여차하면 칠레까지 가 돌아올 수 없을 상황이 되어서야 “나 사실 남극 가”라고 전화로 알려야겠다고 비장하게 다짐했다.
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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