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번의 죽음’ 몰아친 뒤 ‘자살생존자’ 향한 진정성이

한겨레 2024. 1. 2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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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이재, 곧 죽습니다
자살한 주인공, 12번 환생 ‘징벌’
웹툰 각색해 주제의식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들의 고통 그리며
유가족 심리치유 필요성 일깨워
티빙 제공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이재, 곧 죽습니다’(티빙 오리지널)는 주인공 이재(서인국)가 12번 고쳐 죽는 드라마다. 또 환생물인가, 싶은 사람도 한번 볼 만하다. 쇼트폼에 익숙해진 시청자 입맛에 맞게, 극단적인 죽음의 릴레이를 엑기스로 추려 놓은 모둠회 같은 드라마다. 흡사 인공지능(AI)이 쓴 듯한 응축된 서사로 ‘돌아라. 환생 열두 바퀴’가 휘몰아치면, 아찔한 장르의 쾌감을 뒤로한 채 먹먹한 휴먼드라마가 펼쳐진다.

8부작 중 지난해 12월15일 전반부가 공개된 데 이어, 1월5일에 후반부가 공개되었다. 전반부가 독특한 설정과 흡입력 있는 전개로 놀라움을 주었다면, 후반부는 장르적 완결성과 유의미한 메시지로 감동을 안긴다. 공개 사흘 만에 글로벌 오티티(OTT) 아마존 프라임비디오에서 ‘세계에서 많이 본 티브이(TV)쇼’ 부문 2위에 올랐다.

원작과 달리 공들여 묘사한 상황

취업에 실패한 청년 이재가 자살한 뒤, 죽음을 하찮게 여긴 벌로 12번이나 다른 사람 몸으로 깨어나 거듭 죽는다. 각 에피소드는 짧지만 강렬한 스펙터클과 단막극적인 묘미를 지닌다. 회차를 거듭하면서 여러 개의 죽음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게임하는 사람이 그러하듯 이재도 학습된다. 어떻게든 안 죽고 큰돈을 챙겨서 살아 보겠다는 오기가 생긴다. 보는 사람도 12번의 반복되는 죽음이 마치 게임처럼 느껴진다. 전반부의 비행기 폭발이나 공중활공 같은 강렬한 스펙터클과 카체이싱 장면이 눈을 홀렸다면 후반부는 이재가 그간의 여러 삶을 통해 얻은 기억의 조각을 맞추어 악당을 응징하는 통쾌함이 장르의 완결성을 충족시킨다. 그리고 이런 쾌감과 결을 달리하는 마지막 2개의 죽음은 자살에 대한 묵직한 주제의식을 훌륭하게 전달한다.

드라마는 웹툰 ‘이제 곧 죽습니다’(2019)를 원작으로 삼는다. 기본 설정과 줄거리를 유지하되, 각색을 통해 단점을 보완하고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하는 데 성공했다. 매력적인 빌런 박태우(김지훈)는 드라마에서 증강된 캐릭터다. 원작에서는 장건우로 환생한 이재와 지수를 차로 치어 죽인 금수저 음주운전자가 등장할 뿐, 드라마에서처럼 그가 재벌가 장남이자 수많은 죽음과 연결된 중심 악역이 아니다. 드라마는 박태우라는 중심 악역을 통해 각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그 결과 에피소드들이 산발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막고, 후반부의 극적 완결성을 높인다.

또한 원작에 비해 이재가 자살하기까지 과정을 공들여 묘사한다. 이재가 첫 면접일에 황당한 일을 겪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였으며, 팬데믹으로 2년의 취업 공백이 더해진 것까지 애정을 담아 그린다. 원작에선 코인에 투자하였으나 드라마에선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다. 원작에선 월세 독촉을 받을 뿐이지만 드라마에선 세간살이를 명도 당한다. 저런 상황이라면 나라도 자살 충동을 느낄 수 있겠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자 친구와의 관계도 원작과 달리 애틋하게 묘사된다. 원작에선 헤어진 지 3개월 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여자 친구는 (이재의 오해일 뿐) 변심하지 않았으며, 이재가 장건우(이도현)로 환생했을 때 알게 된 이지수(고윤정)와 동일 인물로 그려진다. 드라마는 지수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자살을 겪는 이의 공허한 심정을 처연하게 보여준다. 이는 마지막에 그려지는 어머니의 심정과 더불어 자살자 유가족의 심리치유에 대해 드라마가 진심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지수의 죽음을 장건우로 환생한 이재가 목격함으로써, 다른 어떤 육체적인 고통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는 것이 가장 큰 고통임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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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빙 제공

죽음도 전염되지만…삶은 기회

12번의 죽음 중에는 원작에는 없는 2번의 죽음이 있다. 하나는 아동학대로 사망하는 이름 없는 아기다. 기억도 없고 능력도 없고, 저항해볼 방법도 없이, 친부모에게 죽임을 당한 이재는 억울해한다. “부모라면 당연히…”라는 이재의 항변에 죽음(박소담)은 “당연한 것은 없어”라며 딱 자른다. 그러곤 “삶은 기회”임을 상기시킨다. 이는 12번의 죽음 후 이재가 마지막 1번의 기회를 간절히 염원하는 상황의 복선이 된다. 죽음은 시종 “삶은 기회”임을 말해왔으며, 이는 드라마가 힘주어 말하는 최종적인 주제이다.

또 1명은 극 초반에 차도로 뛰어든 남자, 이종국(김건호)이다. 그는 이재가 면접을 망치게 된 원인이자, 박태우의 살인 충동을 끄집어낸 인물이다. 10번의 죽음을 보여주는 동안 각 에피소드의 시간은 순차적으로 흐른다. 그러나 11번째 죽음에 이르러서 드라마는 이재가 면접을 보러 가는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즉 과거로 돌아가 이재가 이종국이 되었을 때 죽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까지의 일을 바로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재는 이종국의 삶을 빠르게 이해한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취업·결혼·가정 등을 이루었지만 해고·이혼 등으로 한순간에 잃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차도로 뛰어든다. 이후 흐름은 우리가 아는 바이다. 여기서 알게 되는 것은“죽음은 전염된다”는 것이다.

이재의 12번째 환생이 이재 엄마(김미경)인 것은 원작과 같다. 그러나 드라마는 단지 눈물겨운 모성애에 호소하며 “자살은 불효”라는 고전적인 교훈을 설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는 원작에 비해 싱글맘으로 일생 노동하는 여성이었던 어머니를 극 초반부터 훨씬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남성 대졸자 취업준비생 청년이었던 이재에 비해, 이재 엄마는 힘든 몸으로 더 열악한 노동과 해고를 견디며 살았고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받는 여성 중년 노동자였다. 이제 아들의 죽음으로 엄마는 자살자 유가족이 되었다. 동료들마저 꺼림칙하게 생각하여, 경조사조차 흔쾌히 챙길 수 없는. 엄마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자책하며 살아가는.

한국은 명실상부한 자살률 1위 국가이다. 자살로 가족과 애인과 친구를 잃은 사람이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들 괜찮은 듯 살아간다. ‘자살생존자’라는 말이 있다. 자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자살자 유가족을 비롯해 사회적 관계 안에서 발생한 자살을 경험하고 심리적 외상을 견디며 생존해 가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재 엄마와 지수 같은 ‘자살생존자’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절실하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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