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15주기…"건설사 배만 불리는 '재개발 속도전' 안돼"

▲ 지난 2009년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농성 중인 한강대로변 재개발지역 한 건물 옥상에서 진행된 경찰 강제진압

"지난날의 과오를 돌아볼 수 있는 곳인데 서운하죠. 하다못해 서울시에서 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웠다면 좋았을 텐데…."

이른바 '용산참사' 희생자 고(故) 이상림(당시 71세) 씨의 아들 이충연(51) 씨는 지난 18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옛 남일당 건물 자리에 들어선 43층짜리 빌딩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2009년 1월 19일 새벽, 재개발에 반대하던 철거민 32명은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 점거 농성을 벌였습니다.

점거 농성 25시간 만인 이튿날 경찰은 특공대를 투입해 진압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회원들은 화염병 등을 이용해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불이 나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쳤습니다.

이 씨의 아버지도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탄 시신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이 씨는 망루에서 떨어져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고,입원 일주일 만에 구속돼 4년을 복역했습니다.

이 씨는 설마 그냥 내쫓는 법이 어딨겠나 싶었는데 진짜 그냥 내쫓더라며 누구 하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범죄자 취급만 하니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철거용역들은 자주 가게에 쳐들어와 횡포를 부렸고, 이 씨의 아버지는 며느리 앞에서 용역들에게 뺨까지 맞았다고 합니다.

이 씨는 경찰에서 철거민들이 시민에게 화염병을 계속 던지는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농성하던 건물 바로 옆 과일가게는 종일 장사를 하고 있었다며, 일반 시민이 통행하는 도로 쪽으로는 화염병을 던지지 않아 교통 상황도 원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씨는 동네에 살던 평범한 세입자들한테 마구잡이로 들이닥치는 이른바 '재개발 속도전'이 무리한 진압 작전의 원인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검찰은 이 씨를 포함해 농성 참가자 20명을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으나 경찰에 대해서는 모두 무혐의 처리했습니다.

대법원은 2010년 11월 농성을 주도한 것으로 지목된 이 씨 등에게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핵심 쟁점인 화재 원인을 농성자들이 뿌린 시너와 화염병으로 판단하고 경찰관의 진압 작전은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대법원은 다만 경찰의 직무집행(진압작전)에서 시기 등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참사 10년 뒤인 2019년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과거 검찰이 경찰 지휘부에 대한 수사 의지가 없었으며 철거민과 경찰 수사를 균형 있게 다루지 못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용산참사 생존 철거민 이충연(51) 씨

이 씨는 참사 당시 숨진 경찰특공대원 고(故) 김남훈 경사를 언급하며 현장에 있었던 사람 모두가 경찰 수뇌부의 무리한 작전이 낳은 피해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나중에 무전 녹취록을 보니 현장 경찰이 위험하니 작전을 중단해야 한다고 보고하자 겁나서 그러냐는 대답이 돌아왔다며 국가가 살아남은 경찰과 철거민, 유족에 대한 트라우마 치료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씨는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현 국민의힘 의원) 등을 겨냥해 진압에 앞장섰던 자들이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다며, 가족을 잃은 것도 모자라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전과자가 된 사람들에게 지금의 현실은 지옥이라고 울분을 토했습니다.

재개발 이전에 용산4구역에 살았던 300명 중 지금까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10명 남짓으로 땅값이 너무 비싸지니 임대조차 할 수 없어서 지방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습니다.

이 씨는 정치권이 하루빨리 '강제퇴거 제한에 관한 특별법'(강제퇴거금지법) 논의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개발사업을 할 때 사전 인권 영향평가를 해 거주민의 인권에 미칠 영향을 파악하고 철거가 이뤄지기 전에 용역들이 주민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제퇴거금지법은 참사 이후 지난 18∼20대 국회에서 매번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으며, 21대 국회에서는 발의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용산구 토박이인 이 씨는 참사 이후에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남영동 임대주택에 살고 있으며, 철거 전 가족과 함께 운영했던 호프집을 2014년 11월 다시 남영동에 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2020년 정리했습니다.

"처음에는 용산에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살아남은 증인'인 제가 피하면 누구도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지 않을 거고 비극도 반복될 겁니다. 여기 쭉 살면서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에 목소리를 내고 잘못된 개발정책을 막을 겁니다."

(사진=연합뉴스)

류희준 기자 yoohj@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