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 크로커스가 만든 ‘비밀의 화원’ [ESC]
연보랏빛 붓꽃과…향신료 사프란의 원료
구근 형태 복제식물…개체 수 점점 늘어
인적 드문 폐건물 옆 자연 상태로 번성
지난해 2월에 지도연구관님과 나는 연구소 캠퍼스에서 사람들이 가지 않는 후미진 곳을 찾았다. 그쪽 부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고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 사이로 버려지거나 무너진 건물들도 있었다. 가다 보니 잠겨진 문이 있는 폐쇄된 도로가 나왔는데 연구관님은 열쇠로 문을 열고 더 안쪽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그 길의 끝에선 큰 폐건물이 나왔다. 예전에 연구소에서 사용하던 건물인데 지금은 쓰임이 없어 문과 창문은 막혀 있었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연구관님은 이곳에서 핼러윈 파티를 열면 좋겠다고 농담하셨다. 연구관님이 그곳에 나를 데려간 이유는 폐건물 옆에 큰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흔한 동백나무를 나는 연구소는 물론이고 메릴랜드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연구관님은 동백나무에 꽃이 피면 꽃을 꺾어다 부인에게 주신다고 하셨다. 동백나무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크고 나이가 많아 보였다. 오래된 건물은 이제 쓰이지 않지만 정원을 만들 때 심었던 동백나무는 그 자리에서 쉬지 않고 자랐을 것이다. 꽃이 피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빨간 동백꽃이 하나둘 막 피어나고 있었다.
2월에 만개한 수천송이
활짝 핀 동백꽃을 찾기 위해 더 안쪽으로 들어가다 건물 뒤뜰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굉장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뒤뜰이 연보랏빛 꽃들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동백꽃보다 일찍 핀 크로커스꽃들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 송이는 되어 보였다. 우리는 크로커스꽃이 만개한 정확한 시기에 우연히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누군가 캠퍼스 후미진 지역에 폐쇄된 문을 열고 그 건물까지 왔더라도 건물 뒤에서, 게다가 겨울이 지나가지 않은 2월에 크로커스를 만난 이는 없었을 것 같다. 동백꽃을 꺾으러 온 적이 있던 연구관님도 크로커스에 놀라셨다. 그곳은 비밀의 화원이었다. 숨겨진 것뿐 아니라 특정한 날짜에만 잠시 마법처럼 나타나는.
크로커스는 붓꽃과의 한 그룹으로 100여종이 있다. 보랏빛 꽃을 피우는 종 외에도 노란색이나 흰색 꽃을 피우는 종도 있고, 이른 봄이 아닌 가을에 꽃을 피우는 종도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알려진 건 아주 이른 봄에 연보랏빛 꽃을 피우는 종들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게 사랑받는 원예종들인데 이렇게 크로커스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 복수초처럼 초겨울이나 이른 봄에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전령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크로커스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문화·역사·종교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식물이기도 하다. 특히 크로커스의 한 종, 크로커스 사티부스(Crocus sativus)는 사프란이라 불리며 염료와 향신료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섬유유연제의 이름으로 더 친근하지만 사실 진짜 사프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다. 사프란은 황금빛 눈부신 노란색을 내며 독특한 향과 맛을 가진다. 나는 처음 사프란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색과 향이 궁금하긴 했지만 딱히 먹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꽃에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아마 크로커스꽃을 직접 보면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른 봄에 발에 밟힐 정도로 작은 키로 올라온다. 얇은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섬세하고 가는 잎사귀 사이에서 우아한 컵 모양의 꽃이 피어난다. 끝나지 않은 겨울 추위 속에 마른 낙엽과 눈을 헤집고 연약하게 흔들리며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손대기도 미안할 정도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사프란 향신료는 꽃을 헤집어 그 속에 있는 암술대만 뽑아서 모은 것이다. 암술대가 없어진 꽃은 곤충이 와도 꽃가루를 받을 수 없고 결국 열매와 씨앗을 맺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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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두면 더 아름다워지는
다행히 크로커스는 똑똑하게도 씨앗을 맺지 않고 번식하는 다른 방법을 알고 있다. 크로커스를 파 보면 뿌리 위쪽 줄기가 불룩하게 부푼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흔히 구근, 또는 비늘줄기라 부른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비늘줄기에는 마늘과 양파가 있다. 나는 작년에 자원봉사를 하던 농장에서 마지막으로 늦가을에 마늘을 심었다. 마늘쪽을 하나씩 뜯어 땅속에 심었는데 그 마늘쪽은 내년에 각각 복제식물로 자라날 것이다. 그처럼 크로커스도 비늘줄기를 만들어 복제식물을 만들 수 있다. 크로커스 외에도 튤립, 수선화, 히아신스, 백합, 나리 등도 이 방법을 이용한다. 씨앗을 만들고 그 씨앗이 한 식물로 자라나려면 많은 시간과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성공적인 수정과 씨앗 산포 뒤 해마다 조금씩 자라나 꽃을 피울 수 있는 성숙한 식물이 되기까지 말이다.
크로커스는 씨앗이 싹트면 처음 가느다란 단 하나의 잎으로 첫해를 보낸다. 에너지를 모아 비늘줄기를 볼록하게 만들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성숙한 식물이 되기까지 3~5년이 필요하다. 하지만 비늘줄기는 그런 수고와 시간을 줄여준다. 아마도 내가 만난 크로커스는 처음에 그 건물 옆 정원 식물 중 하나로 몇 촉이 심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거쳐 씨앗과 비늘줄기를 만들며 퍼져나갔을 것이다. 개체 수가 증가할수록 더 빨리 많은 수의 자손을 만들고 결국 그 뒤뜰을 비밀의 화원으로 만들었다.
나는 지난해 크로커스 사진을 찍은 날짜에 맞춰 올해 다시 그 비밀의 화원에 갈 것이다. 아마도 크로커스는 지난해보다 올해 조금 더 영역을 넓혀 더 많은 꽃을 피워낼 것이다. 사람이 만든 건물은 그대로 두면 시간이 갈수록 허물어지며 처량한 모습이 되지만 식물은 더 아름다워진다. ‘비밀의 화원’은 프랜시스 버넷이 쓴 소설로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으며 뮤지컬로도 재탄생했다. 뮤지컬은 브로드웨이에서 오랫동안 공연되고 있는데 이 뮤지컬을 여는 첫 번째 노래, 오프닝 곡이 ‘크로커스 꽃송이들’(Clusters of Crocus)이다. 노래 가사의 첫 구절이기도 하다. 나는 이번에 그 비밀의 화원에 가면 크로커스 꽃들에 이 음악을 틀어주고 싶다. 비밀의 화원을 만들어 낸 크로커스 꽃들에 경의를 표하며.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스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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