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별천지] ㉑ 용이 승천한 전설 속 홍천 마을…전국 유일 토종 홉 재배

강태현 2024. 1.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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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서 만끽하는 '촌캉스'…농산물 수확·카누·캠핑 즐기며 '힐링'
울력·반상회로 정 나누고, 머리는 맞대고…안팎 활기 넘치는 용오름 마을

[※ 편집자 주 =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의 발걸음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시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듭니다. 강원도의 산과 강, 바다와 호수를 따라 굽이치는 길 끝에는 반짝이는 주민들의 삶이 모여 있습니다. 북적이던 발걸음은 지역소멸이라는 화두와 함께 잦아들고 있지만, 마을은 그 생생함을 되찾고자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갑니다. 길과 마을에 깃든 이야기를 연합뉴스가 1년 동안 격주로 소개합니다.]

용오름 마을에서 투명 카누 타는 외국인 관광객들 [용오름 마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홍천=연합뉴스) 강태현 기자 = 고즈넉한 강원도 시골 정취를 만끽하며 홍천에서 양양으로 향하는 국도 56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큰 골짜기가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이 골짜기를 따라 산 깊숙이 발길을 옮기면 꽤나 큰 마을 하나가 터를 잡고 있다.

최고 수령 150년 정도의 소나무 200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왠지 모를 '포스'까지 느껴지는 이곳은 홍천 서석면 검산2리 용오름 마을이다.

'검산'(儉山)이라는 지명은 마을 북동쪽에 자리한 삼신산(三神山)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지만, 마을을 둘러싼 산이 검은빛을 띠고 있어 '검은 산'이라 불리다가 검산이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용오름'이라는 명칭도 서봉사라는 사찰 계곡에 있는 폭포수에서 용이 나와 너래바위를 통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사람들이 하나둘 일컫던 게 마을 이름이 됐다.

신비롭고 잔잔한 마을 같아 보여도 주민들의 삶으로 들어가면 그 어느 곳보다도 인정과 활기가 넘친다.

매년 소망을 빌고 건강을 기원하는 제사가 수십 년째 이어지고, 마을 대소사를 논의하기 위한 반상회와 잡일을 함께 나눠서 하는 울력도 매달 열린다.

영농조합을 운영하며 체험 마을로서 도약을 꿈꾸고, 귀촌 청년 등의 노력으로 전국에서 유일한 '토종 홉 재배지'로 발돋움하고 있기도 하다.

소나무 그늘에서 즐기는 캠핑 [용오름 마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일제 상흔 서린 소나무 숲…치성제·울력 등 활기 '넘실'

마을 곳곳에는 아름드리 노송들이 가득하다.

솔밭 그늘에 앉아 물소리와 바람 소리에 젖어 들다 보면 일상의 상처를 치유하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지만, 이곳에는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에 따르면 1941년 8월 미국이 석유가 전쟁물자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석유 수출을 금지하자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치르며 부족한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송진을 수탈해 갔다.

톱이나 칼로 소나무 줄기에 V자형 상처를 낸 후 그곳에서 흘러나온 송진을 받아 송탄(松炭) 가마에 끓여 송유(松油)를 추출했고, 이를 전투기 연료로 썼다.

용오름 마을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마을 아이들까지 동원해 송진을 채취해갔다.

실제 마을에서 오래된 소나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저마다 당시의 생채기를 몸통에 새겨놓고 있다.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시원한 휴식처가 되어 준 소나무 숲에는 이 같은 애한이 남아 있다.

치성제 올리는 마을 주민들 [용오름 마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처럼 소나무 가득한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에는 209가구 386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대부분 감자, 고추, 옥수수 등 농산물과 고로쇠수액, 더덕, 곰취 등 임산물을 재배하는 농가로 이뤄져 있다. 몇 년 사이에 민박과 캠프장을 운영하는 주민들도 생겼다.

주된 생업이 농사일이다 보니 마을에는 당신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가 수십 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1반에서 6반까지 속한 마을 주민 모두가 매년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서봉사 인근 계곡에 있는 서낭당으로 모여 각자의 염원을 담은 치성제를 올리곤 한다.

텃밭 가꾸기 울력하는 마을 주민들 [용오름 마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날은 마을의 잔칫날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부녀회에서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한 해를 돌아보고 친목을 다진다.

농사와 제사 등 대소사를 논할 일이 잦은 탓에 마을 사람들은 매년 25일 반상회를 열고 서로 소통하기도 한다.

또 매월 첫 번째 토요일에는 마을 정비, 꽃 심기, 하천 정비 등 마을의 잡일을 함께 나눠서 하는 울력을 하기도 하고, 조사가 있는 경우 주민들이 함께 장례를 치르는 상포계를 운영한다.

여름이면 작은 음악회를 열어 다 함께 문화생활을 향유하기도 하는 등 마을 안은 활기가 넘쳐난다.

여름밤 마을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 [용오름 마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온몸으로 만끽하는 산골 생태체험…마을 특성 살린 축제까지

즐길 거리는 비단 마을 주민들에게만 한정된 건 아니다.

산촌생태체험마을로도 유명한 용오름 마을에서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이 덕에 매년 1만5천명 내외의 관광객이 마을을 찾고 있다.

주민들은 영농조합 운영을 통해 캠프장과 펜션을 관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묵는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감자 캐기, 옥수수·방울토마토 따기, 밤 줍기, 표고버섯 채취 등의 농산물 수확 체험을 한다.

땅콩 캐기 체험하는 어린이들 [용오름 마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체험 농가로 참여하는 주민들은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관광객들에게 작물 수확 방법을 알려주거나 소정의 농산물을 제공해 이익을 얻고, 관광객들은 특색있는 경험으로 추억을 쌓을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이다.

농촌 체험뿐만 아니라 마을 안쪽에 있는 마리소리골악기박물관과 연계한 사물놀이 체험과 계곡 송어 잡기, 투명 카누 타기 등 온몸으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계곡 체험도 할 수 있다.

산양삼, 약초산행 등 산촌 체험과 트랙터 마차 타기, 숲 밧줄 놀이, 트리크라이밍 등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용마가 승천했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폭포와 1급수 용오름 계곡, 서봉사 계곡, 광산골 올레길 등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명소가 마을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캠핑족에게는 휴식처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마을에서 이처럼 영농조합을 운영해 얻은 이익의 절반은 조합원들에게 배당금으로 지급된다.

지난해에도 약 2억6천만원의 매출을 올려 일부는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일부는 마을의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등 투자 비용으로 쓰일 예정이다.

투명 카누 체험하는 관광객들 [용오름 마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홍천 대표 체험 마을로 도약하기 위한 노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촌캉스'와 같이 산촌의 강점을 살리는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당일 피크닉이 가능한 상품도 마련하는 등 관광객 유치에 힘쓰고 있다.

이 같은 활동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도 한다.

이들은 치성제, 장례문화, 대보름 행사 등과 같은 마을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마을에서 나는 작물 등을 주제로 한 축제를 기획하고 있기도 하다.

2016년 용오름 마을로 귀촌한 류지욱(54) 사무장은 "현재 마을에서 국유림을 임대해 고로쇠를 채취하고 있다"며 "이 같은 산골 마을 특성을 살린 고로쇠 축제도 기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용오름 마을 고로쇠 수액 [용오름 마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홍천 '토종 홉'의 귀환…늙어가는 마을에 싹튼 희망

활력 넘치는 마을에도 고민은 있다.

여느 강원 산골 마을과 견줘 주민들의 연령대가 다양하기는 하지만, 젊은이가 극히 적다는 점은 이들의 큰 걱정거리다.

실제 50대와 60대가 269명으로 전체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런 탓에 지난 11일 열린 반상회에서는 마을의 고령화로 인해 "참담하다"는 반응까지 나왔다고 주민들은 토로했다.

늙어가는 마을에도 희망의 씨앗은 싹튼다.

맥주 양조 등에 사용되는 원료인 홉이 그 시작이다.

홉은 1980년대 초까지 홍천에서 주로 생산되던 작물이었다.

전국 생산량의 90% 이상이 강원도에서 생산될 정도로 많은 재배가 이뤄졌지만, 농산물 수입 개방 여파로 외국산 홉에 밀려 사라졌다.

태국에서 하던 사업을 접고 아버지 제안으로 2012년 마을에서 새 삶을 시작한 정운희(40)씨는 우연히 마을 할머니로부터 과거 홍천에서 홉을 재배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다시 홉을 재배하기로 마음먹었다.

홍천 용오름 마을에서 '홉의 왕'이 되길 꿈꾸는 정운희(40)씨 [정운희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홉 종자를 찾기 위한 노력 끝에 2015년 한 농가에서 '조선홉' 세 뿌리를 발견, 종묘 번식을 통한 재배에 성공하면서 정씨는 본격적인 토종 홉 생산·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를 시작으로 현재는 마을에서 5가구가 매년 각 2t(건화 시 400∼500㎏)씩 홉을 생산하고 있다.

홉에는 숙면을 돕는 잔토휴몰 성분이 들어 있어 정씨는 관련 제품을 개발해 상품화하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지난해 말 마을에 15년 만에 아기 울음소리를 들려준 '아빠'이기도 하다.

마을을 홉의 고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한 정씨이지만, 아이를 품에 안고 난 뒤에는 이런저런 걱정거리로 뒤척이는 밤이 적지 않다.

"출산이 임박했을 때 갑작스레 홍천 분만산부인과가 문을 닫았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춘천까지 가서 출산해야 했죠. 홍천 시내에 있는 소아청소년과도 2곳뿐이어서 아이가 아파 방문해야 할 때면 기본 2∼3시간은 기다려야 해요. 도시에 있으면 아무 일도 아닌 일들이 이곳에서는 어려움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생활의 불편함에도 홉 하나로 마을과 홍천군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마음은 식지 않는다.

그는 "홉을 통해 식품·주류 등 기업들이 군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그러면서 우리 지역이 활발히 살아나길 바란다"고 밝혔다.

홍촌 용오름 마을에서 재배되는 토종 홉 [용오름 마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taet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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