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은 왓슨과 크릭에게 노벨상을 도둑맞았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 발견’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 업적을 뽑을 때 빠지지 않는다. DNA의 구조는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둘만큼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 물리화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1953년 4월 25일, 영국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 실험실의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임을 밝히는 논문을 출판했다. 이 발견으로 1962년 왓슨과 크릭, 그리고 킹스 칼리지 런던 의학연구부 생물물리부서의 모리스 윌킨스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수상 후인 1968년 왓슨은 발견 과정을 회고하는 ‘이중나선’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왓슨은 책에서 물리화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촬영한 DNA 분자의 X선 회절 사진, 소위 ‘51번 사진’을 그녀의 상관 윌킨스를 통해 몰래 봤고 이를 보자마자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임을 확신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의 발언은 과학계 안팎의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프랭클린은 이처럼 51번 사진으로 DNA 구조를 밝히는 데 기여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이보다 훨씬 광범위했다. 우선 51번 사진에 대한 신화부터 재고해 보자. 왓슨이 사진을 본 것만으로 DNA가 이중나선 구조라는 것을 단박에 깨닫는 일은 없었다. 그는 먼저 이중나선 구조라는 개념적 모델을 완성한 다음 이를 확증하는 데 킹스 칼리지 런던 연구팀의 DNA 구조에 관한 결정학 연구 보고서와 51번 사진과 같은 데이터를 사용했다. 바꿔 말해 51번 사진은 회자되는 만큼 이중나선 발견에 결정적이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1951년 1월 킹스 칼리지 런던 생물물리부서에 합류해 1953년 3월 버크벡 칼리지로 옮기기까지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DNA 연구와 관련된 여러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프랭클린은 습도에 따라 액체에 들어있는 DNA의 형태가 변화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A형과 B형으로 명확하게 구분했다. 1930년대의 결정학자들이 이러한 차이를 모르고 A형과 B형 DNA를 혼합해 X선 회절 실험을 진행한 탓에 흐릿한 패턴만 얻었던 혼란을 해결한 것이었다.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 논문을 발표하기 두 달여 전인 1953년 2월 프랭클린 역시 A형 DNA가 두 가닥의 나선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염기 A, T, G, C가 A-T, G-C로 결합하는 상보적 염기쌍을 이룬다는 점 등을 깨닫지 못해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지는 못했다.
프랭클린은 DNA 구조 이외에도 다양한 연구 성과를 일궈냈다. DNA 연구를 진행하기 이전에는 탄소에 대한 X선 회절 분석 연구를 진행했다. 30세가 되는 1950년경에는 탄소 구조 연구에서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연구자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1953년 이후에는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의 3차원 구조 모형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랭클린은 1958년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훨씬 다양한 연구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벨상에 관해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왓슨과 크릭, 윌킨스에게 노벨상이 수여된 1962년에 프랭클린은 이미 세상을 떠나 노벨상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나아가 프랭클린은 이중나선을 발견하는 데 기여한 적극적인 협력자였다. 1950년대의 미출간 기사를 포함해 최근에 발굴된 사료는 과학사학자들이 지금까지 간과한 자료로 DNA 이중나선 발견이 프랭클린을 포함한 킹스 칼리지 런던 연구팀과 왓슨, 크릭의 협업이었음을 시사한다. (doi: 10.1038/d41586-023-01313-5)
왓슨과 크릭이 속한 케임브리지대 연구진과 프랭클린이 속한 킹스 칼리지 런던 연구진은 비공식적으로 소통을 지속하며 연구 성과를 교류했다. 1953년 6월 런던 왕립학회 집담회는 DNA 이중나선에 대한 최초의 공적 발표 가운데 하나인데 이 발표의 저자를 보면 프랭클린과 그녀의 지도 학생 고슬링, 프랭클린의 상관 윌킨스, 왓슨과 크릭 등 두 연구 그룹의 인물들이 모두 이름을 올렸다.
특히 프랭클린은 결정학과 관련된 강연에 크릭을 초청하기도 했다. 1954년 출판된 ‘디옥시리보핵산의 상보적 구조’라는 논문에서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DNA 구조에 관한 결정학 데이터가 없었다면 이중나선 모델을 공식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임을 인정했다.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을 취재한 시사잡지 ‘타임’의 기자 조안 부르스 역시 X선 회절 분석을 통한 실험적 증거 수집 팀(윌킨스와 프랭클린)과 이론 팀(왓슨과 크릭)의 협업으로 이해했다. 그는 기사 초고에서 두 연구 그룹을 독자적으로 연구하면서도 때때로 서로의 연구 성과를 확인하는 등 공통된 문제를 두고 씨름한 협력 관계로 그려냈다. 다만 기사는 프랭클린이 원고의 과학적 내용을 올바르게 수정하는 데 많은 품이 들 것이라고 지적해서인지, 출간되지 못했다.
이처럼 왓슨과 크릭은 이중나선 발견의 초창기에 프랭클린의 공로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음에도 노벨상 수상 후로는 프랭클린의 기여를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더구나 왓슨은 프랭클린을 X선 회절 사진만 잘 찍는,옷차림이 촌스러운 히스테릭한 여성으로 묘사했다.
프랭클린에 관한 왓슨의 평가를 두고 프랭클린이 자신의 공로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것은 협업하기 어려운 그녀의 성격 탓이었을 수도 있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 국립과학연구센터의 동료들은 프랭클린을 사교적이고 활력있는 여성으로 기억했다. 또한 프랭클린은 본격적으로 독립 연구자의 경력을 시작한 버크벡 칼리지에서 직접 모은 연구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 구조 연구에서도 프랭클린의 협업 능력이 빛났다. 그는 경쟁 관계의 독일 튀빙겐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의 생화학자들과 자료를 교환하며 협업 관계를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프랭클린은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에 관한 결정학 연구를 다양한 과학자들이 국경과 분야를 넘어 협동하는 주제로 만들었다.
이처럼 프랭클린은 과학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협력들을 이끌어내는 데 분명한 재능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DNA 구조를 연구하던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만 그렇게 독선적이고 고립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던 걸까.
그 답은 프랭클린의 성격이 아니라 킹스 칼리지 런던이라는 기관의 성차별적이고 위계적인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프랭클린이 근무하던 1950년대 초 그곳은 여성 과학자가 남성 동료들과 협력하기 어려운 문화를 갖고 있었다. 가장 큰 식당은 남성만 출입가능했고 심지어 직원들이 커피를 마시는 휴게실조차 성별에 따라 분리돼 있었다. 동료 연구자들과 실험실 바깥의 공간에서 지적으로 교류하거나 유대 관계를 맺는 일이 구조적으로 차단돼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생물물리부서를 이끄는 연구자 존 랜달의 부족한 리더십은 프랭클린과 동료 연구진들 사이의 오해와 단절을 낳았다. 프랭클린은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펠로우십을 받고 연구진에 합류했으며 랜달은 프랭클린에게 부서 내에서 오직 그녀만이 DNA 구조에 관한 결정학적 연구를 수행할 것처럼 알렸다. 따라서 프랭클린은 비록 연구소 소속이지만 자신이 DNA 구조의 X선 회절 분석에 관한 독립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연구 책임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물물리부서의 교수이자 X선 회절 분석을 그전부터 수행해왔던 윌킨스는 랜달에게 이와 같은 조치를 전혀 통보 받지 못했고, 프랭클린을 자신의 연구를 보조하는 조교로 대했다. 독립 연구자이자 동료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의 상황은 프랭클린을 함께 일하기 어려운 성격의 사람으로 비춰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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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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