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毛有罪’ 첫날밤부터 아내를 혐오한 남편…부인의 이유있는 바람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1. 20.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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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54] “당신과 헤어지고 싶어요”.

집을 나간 부인으로부터 도착한 편지. 그 안에는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싶다는 아내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부부가 될 때 교환했던 반지도 동봉돼 있었지요. 기필코 혼인을 깨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습니다.

“그 여행이 이 사달을 불었군”. 돌이켜보니 그 때부터였습니다. 후원하는 화가와 부부가 함께 여행을 갔을 때였습니다. 스코틀랜드 대자연에서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와 동행했는데, 며칠 후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라파엘 전파 형제단의 이야기를 다룬 BBC 드라마 ‘데스퍼레이트 로맨틱스’ 한 장면. [사진 출처=imdb]
화가는 남편에게 부인을 모델로 하고 싶다고 했고, 남편은 처음에는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지요.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집을 비웠습니다. 남편은 홀로 기다리는 일이 잦아졌지요.

불길한 예감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녀가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마음을 훔친 새 남자는 남편이 전폭적으로 후원한 화가였습니다. 화가의 이름은 ‘라파엘 전(前)파 형제단’(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존 에버렛 밀레이입니다. 그를 후원한 남자는 유럽의 대표적 지성인 존 러스킨이었지요.

존 러스킨은 아내 에피 그레이와 함께 존 밀레이와 여행을 갔다가 아내를 빼앗긴 비운의 남자로 전락합니다. 1850년대, 영국 빅토리아 시기를 수 놓은 세기의 스캔들이었습니다.

라파엘 전파 형제단의 이야기를 다룬 BBC 드라마 ‘데스퍼레이트 로맨틱스’ 한 장면. [사진 출처=imdb]
존 에버렛 밀레이가 속한 라파엘 전파 형제단은 1848년 런던에서 결성된 예술가 모임입니다. “미술을 라파엘로 이전 세대로 되돌리자”가 모토였지요. 언젠부터인가 영국 예술이 15세기 이탈리아 거장 화가 라파엘로의 그림만을 베끼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였습니다.

르네상스보다 다채로우면서도, 보다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했기에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지요. 그들의 천명은 르네상스 이전인 중세 시대를 낭만화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오늘날 대중문화에도 ‘라파엘 전파’의 향기가 녹아있지요.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도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림 실력으로만 유명한 건 아닙니다. 이들의 사생활도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이었지요. 작품 이상으로 화려했던 이들의 삶과 영향력을 2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후원자 부부와 함께 한 여행에서 그 아내와 사랑에 빠진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 첫 번째 주인공입니다.

르네상스를 넘는 인간의 그림을 꿈 꾼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인간의 삶과 괴리된 그림을 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네.”

존 에버렛 밀레이는 라파엘전파 형제단의 대표 화가였습니다. 모든 예술가가 그렇겠지만, 그는 누구보다 소신이 강한 사람이었지요. 당시 영국 왕립 미술원(Royal Academy of Arts)은 이탈리아 라파엘과 미켈란젤로를 모든 화가가 쫓아야 할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밀레이는 미술학계의 관행을 무척이나 싫어했지요.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경 속 이야기를 과장되게 그리는 그림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화하고 그림의 통일성을 강조한 라파엘로의 작품 ‘그리스도의 변모’. 19세기 초반 영국 미술계는 그의 그림을 이상으로 여겼다.
무엇보다 (위 그림과 같은) 그 그림들은 인간의 삶과 괴리됐다고 그는 느꼈습니다. 르네상스가 그리는 신화적인 작품에서 벗어나 중세의 소박하면서도 자연적인 소재를 예술의 ‘이상’이라고 여겼습니다. “사람 냄새나는 그림을 그려보자”는 청춘들의 모임이 ‘라파엘 전파 형제단’이었던 것이지요.
영국 주류로부터 공격받은 ‘라파엘 전파’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

새로운 미학은 언제나 대중의 반발을 부르기 마련입니다. 르네상스의 아성에 도전하는 밀레이의 그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를 1850년 공개할 때였습니다. 허름한 목공소에서 일하는 예수와 그 가족들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박한 가정의 평범한 아이로 그려낸 ‘따스함’이 느껴지지요. 라파엘전파 형제단의 특징 중 하나인 세부적인 묘사와 화사한 색상 사용 역시 인상적이고요. 신고전주의 회화처럼 웅장하고 통일성이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지지요.

1850년 존 밀레이의 작품인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성 가족을 비루하게 그린 탓에 ‘신성 모독’ 비판이 일었다.
하지만 “신성 모독”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당시 도덕적·종교적 기준으로는 허용될 수 없는 묘사 때문이었습니다. 감히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남루한 가정집 주부와 천덕꾸러기처럼 그리다니요. 당대 최고의 글쟁이 찰스 디킨스는 그의 그림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밀레이는 성모 마리아를 알코올 중독자처럼 그렸다. 그녀의 추함은 너무나 끔찍해서, 마치 프랑스의 카바레나, 영국의 싸구려 술집에서 볼 수 있는 괴물 같다.”
“그럼에도 나는 사람 냄새나는 그림을 그리겠다”
존 밀레이는 내면이 단단한 예술가였습니다. 당대의 미적 기준을 전복하려는 화가였기에 이런 비판들은 당연하다고 여겼지요. 결국 묵묵히 자신의 길로 나아가니 빛을 보게 됩니다. 그림 ‘오필리아’가 당대 평론가와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으면서였습니다.
존 에버렛 밀레이가 1851년 그린 ‘오필리아’. 엘리자베스 시달을 모델로 한 이 그림으로 그는 영국 미술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림을 보시지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햄릿의 애인으로 나오는 오필리아가 강에 몸을 맡긴 채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화려한 색감과 대비되는 오필리아의 파리한 얼굴. 오늘날 디지털TV를 보는 듯한 묘사가 돋보이지요.

이 작품의 모델은 엘리자베스 시달이었습니다. 라파엘전파 형제단의 뮤즈로 활동한 여성이었습니다. 존 밀레이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겨우내 욕조에 엘리자베스를 물에 담갔다고 전해집니다.

“그 추위를 견뎌주어 고맙소 시달.” 존 에버렛 밀레이.
물을 데우고자 양초를 욕조 아래에 받치곤 했는데, 어느 날 존 밀레이가 너무 집중한 나머지 불이 꺼진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차가운 물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몇 시간을 버텨야 했습니다만, 불평하지 않았지요. 심한 폐렴을 겪은 그녀는 그러나 ‘수작’의 주인공이 된 데 만족했습니다.
당대 최고 평론가의 극찬을 받은 밀레이
“젊은 화가들은 대가를 흉내 내선 안 된다. 라파엘전파는 이를 훌륭히 수행한다”.

누군가를 모방하지 않고 길을 개척하는 이들은 언젠가 주목받기 마련인가 봅니다. 라파엘 전파를 향해 찬사를 보낸 인물이 등장합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뛰어난 평론가이자, 19세기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라고 평가받는 존 러스킨이었습니다. 존 러스킨이 극찬했다는 건 뜨내기 화가인 ‘존 밀레이’가 이제 유럽의 전 미술계가 주목하는 ‘떠오르는 스타’가 됐다는 걸 의미지요.

“당신들의 그림, 무척이나 맘에 드는군”. 존 러스킨의 초상화.
천재적 평론가와 독창적 화가의 만남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빠르게 가까워졌지요. 러스킨은 자신의 철학을 그림으로 구현한 존 밀레이에게 감탄을 표시했고, 존 밀레이는 평소 존경해오던 사상가이자 미술평론가인 러스킨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러스킨은 존 밀레이를 비롯한 라파엘 전파 형제단을 위해 지갑을 여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마음껏 예술활동에 전념하라는 응원의 메시지였지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족을 소개할 만큼 가까워집니다. 러스킨은 아내 에피 그레이와 존 밀레이를 함께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아름다운 에피의 모습을 본 존 밀레이는 그녀에게 자신의 모델이 되어주기를 청했고, 그녀도 흔쾌히 받아주었지요.

“존 에버렛 밀레이, 당신 이야기 남편에게 많이 들었어요”. 에피 그레이 초상화.
잘못된 만남...후원자의 아내와 불륜이 시작되다
“같이 스코틀랜드에 가겠나.”

러스킨은 어느 날 밀레이에게 제안합니다. 함께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가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청이었지요. 물론 아내 에피 그레이도 함께였습니다. 새로운 풍경은, 새로운 사상과 그림을 낳는 법. 존 밀레이는 흔쾌히 받아들이지요. “예 가겠습니다”.

“이봐 밀레이, 나를 봐야지 왜 자꾸 아내를 보는가”. 존 밀레이가 그린 존 러스킨.
여행은 비극이었습니다.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존 밀레이가 사랑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존경하는 후원자 러스킨의 아내 에피 그레이가 상대였지요. 비극은 더욱 그 농도를 더해갑니다. 에피 그레이마저도 존 밀레이를 마음에 품었지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지닌 스코틀랜드는 비극을 함께 잉태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온 지 며칠 후. 에피 그레이가 집을 나갔습니다. “잠시 가족을 보고 온다”는 쪽지만 덩그러니. 며칠 뒤 그러나 도착한 건 또 다른 편지였습니다. “이 결혼이 무효임을 주장합니다”는 메시지였지요. 편지와 함께 결혼반지가 동봉돼 있었습니다. 사랑의 끈을 끊어버리겠다는 명확한 의지였지요.

“왜 자꾸 그 화가가 생각이 나죠”. 존 밀레이가 그린 에피 그레이. 1853년 작품. 두 사람은 이 즈음 사랑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존 러스킨은 직감합니다. “에피가 결국 밀레이를 선택하는 구나.” 존 밀레이는 자신을 영국의 최고 화가로 이름 알리게 한 후원자 존 러스킨을 배신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의 아내를 빼앗는 최악의 방법으로요. 성적으로 보수적인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최악의 스캔들 중 하나였습니다.
결혼은 파국으로...그러나 사랑은 다시 시작된다
1854년 4월 에피는 혼인 무효 소송을 걸었습니다. 소송은 생각보다 쉽게 끝났습니다. 불과 3개월 후 혼인무효가 승인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유는 “치유할 수 없는 발기부전”. 두 사람이 결혼 5년차에도 한 번도 성관계하지 않은 사실이 증명되면서였습니다. 의사들이 에피의 몸을 확인한 결과 그녀의 ‘처녀성’이 여전히 존재한 것이었지요.

존 러스킨이 9살 연하의 아름다운 에피 그레이와 관계하지 않은 이유에는 여러 ‘학설’(?)이 존재합니다. 하나의 설은 ‘음모 혐오’입니다. (전기작가 매리 루티엔스의 설명).

“결혼 내내 외로웠어요”. 존 밀레이가 그린 에피 그레이. 1853년 작품. 이 당시부터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존 러스킨은 예술에 심취한 나머지 현실 세계에서도 그림과 같은 여성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에, 붉은 입술, 그리고 털없이 매끈한 ‘그곳’이 그의 이상향이었지요.

결혼 첫날 밤 그의 상상은 모두 무너지고 말았지요. 아름다운 아내의 나체를 상상하며 침대에 누웠는데, 무엇인가 까끌까끌하고 거칠었던 감촉을 느꼈던 것이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곳‘의 무성한 털들. 그의 상상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던 흉물이었습니다.

“제가 에피와 사이가 안좋았던 건 성격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존 러스킨의 초상화.
에피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 있는 내용도 이를 증명합니다. “러스킨이 저에게 고백하기를 ‘첫날 밤부터 당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고 하더군요”.

존 러스킨이 후에 ‘아동성애’로 의심받은 것 역시 그의 이런 독특한 취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실제로 존 러스킨은 39세 되던 1859년, 10세 소녀 로즈 라 투쉬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기도 했었지요. 18세가 되던 해에 청혼했을 정도로요. (하지만 존 러스킨의 음모혐오나 아동성애와 같은 설은 정확한 증거에 의해 확인된 사실이 아닌 추론에 가깝습니다).

존 러스킨이 사랑한 29살 연하 로즈 라 투쉬. 그림은 존 러스킨이 그렸다.
분명 불륜커플인데...이렇게 잘 살 줄은
어쩌면 세상에는 제 짝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존 밀레이와 에피는 그 이후로 천생연분으로 살아갑니다. 5년 동안 아이가 없던 에피는 존 밀레이와의 사이에서 무려 8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안정된 가정생활이 기반이 되어서였을까요. 밀레이는 화가로서도 점점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라파엘 전파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완성하면서였습니다. 존 러스킨은 이를 ”재앙“(a catastrophe)이라고 비난했지만요. (개인적 앙심이 들어간 판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보, 그림 잘 부탁해요”. 존 밀레이가 에피와 결혼한 뒤인 1862년 그녀를 모델로 해서 그린 그림 ‘성 아그네스 전야제’.
1870년 작품 ‘홍수’.
평론가들의 혹평에도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습니다. 존 밀레이는 영국의 역사, 특히 중세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 어린이 그림,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모두 대중들이 좋아하는 소재였지요.

아이를 그린 작품은 비누 광고에도 사용됐을 정도입니다. 같은 라파엘 전파 화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팔기 위해‘그림을 그린다“고 그를 모욕하지요. 미의 추구 대신 대중의 선호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건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중세 잉글랜드에서 리처드 3세에게 살해된 두 왕자를 묘사한 존 밀레이의 그림. 그가 얼마나 중세 역사화에 천착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1870년 작품인 ‘모험을 찾아 떠나는 기사’. 중세시대를 낭만화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라파엘 전파들이 잘 그린 소재였다.
귀족의 자리까지 오른 존 밀레이
존 밀레이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고, 그의 옆에는 사랑하는 에피가 함께 있었으니까요. 귀염둥이 여덟 자식은 또 얼마나 힘이 되던지요. 그는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그림을 그리려 애썼습니다.
에피는 새 남편 존 밀레이를 적극적으로 외조해 그를 귀족의 자리까지 올렸다. 그림은 에피의 중년시절 초상화.
어쩌면 ’라파엘 전파‘라는 이름에 갇혀서, 또 다른 교조주의에 빠진 건 그의 옛 동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존 밀레이는 언제나 그랬듯, 경계선을 너머 자신의 예술적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지요. 1885년 7월 빅토리아 여왕은 존 밀레이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립니다.

그의 이름 앞에 귀족의 호칭인 ’경‘(Sir)이 붙는 배경이지요. 그리고 이듬해 존 밀레이가 에피 곁에서 영면합니다. 에피도 바로 그 다음해 그의 곁으로 떠났지요.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끝사랑은 맞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요.

1884년 존 밀레이의 사진. 거장의 향기가 느껴진다.
라파엘 전파의 스캔들은 계속된다
바람맞은 남자 존 러스킨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 역시 그 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라파엘 전파에 남아있던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시달을 후원하면서요.
존 밀레이의 1879년 작품 ‘익은 체리’.
오늘날에도 세 사람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드라마·영화로 소개되곤 합니다. 그림만큼이나 숨겨진 이야기도 재밌는 법이니까요. 그게 치정극이라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러스킨이 후원한 로세티도 밀레이만큼이나 영국 사회를 소란하게 하는 또 다른 연애 파국을 부릅니다. ’라파엘 전파‘의 전통이라도 되는 듯이요. 그가 예술과 사랑의 역사에 남긴 발자욱은 다음주에 소개합니다.

“아버지, 라파엘 전파들의 스캔들은 계속된다네요”. 존 밀레이의 1871년 작품 ‘북서항로’.
<네줄요약>

ㅇ영국 예술사에 족적을 남긴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그 그림만큼이나 난잡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ㅇ존 에벗 밀레이는 자신을 후원한 평론가 존 러스킨의 아내 에피와 바람이 나났다.

ㅇ에피는 보수적인 빅토리아 사회에서 ”5년 동안 첫날밤도 안 치렀다“고 주장해 결혼 무효를 얻어냈다.

ㅇ에피와 결혼한 밀레이는 안정된 가정(?)에서 화가로서 기사 작위까지 받을 정도로 성공했다.

<참고문헌>

ㅇ김동훈, 미학-라파엘전파가 20세기 이후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한예종, 2015년

ㅇ팀 베린저, 라파엘전파, 예경,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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