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毛有罪’ 첫날밤부터 아내를 혐오한 남편…부인의 이유있는 바람 [사색(史色)]
[사색-54] “당신과 헤어지고 싶어요”.
집을 나간 부인으로부터 도착한 편지. 그 안에는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싶다는 아내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부부가 될 때 교환했던 반지도 동봉돼 있었지요. 기필코 혼인을 깨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습니다.
“그 여행이 이 사달을 불었군”. 돌이켜보니 그 때부터였습니다. 후원하는 화가와 부부가 함께 여행을 갔을 때였습니다. 스코틀랜드 대자연에서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와 동행했는데, 며칠 후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녀가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마음을 훔친 새 남자는 남편이 전폭적으로 후원한 화가였습니다. 화가의 이름은 ‘라파엘 전(前)파 형제단’(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존 에버렛 밀레이입니다. 그를 후원한 남자는 유럽의 대표적 지성인 존 러스킨이었지요.
존 러스킨은 아내 에피 그레이와 함께 존 밀레이와 여행을 갔다가 아내를 빼앗긴 비운의 남자로 전락합니다. 1850년대, 영국 빅토리아 시기를 수 놓은 세기의 스캔들이었습니다.
르네상스보다 다채로우면서도, 보다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했기에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지요. 그들의 천명은 르네상스 이전인 중세 시대를 낭만화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오늘날 대중문화에도 ‘라파엘 전파’의 향기가 녹아있지요.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도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림 실력으로만 유명한 건 아닙니다. 이들의 사생활도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이었지요. 작품 이상으로 화려했던 이들의 삶과 영향력을 2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후원자 부부와 함께 한 여행에서 그 아내와 사랑에 빠진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 첫 번째 주인공입니다.
존 에버렛 밀레이는 라파엘전파 형제단의 대표 화가였습니다. 모든 예술가가 그렇겠지만, 그는 누구보다 소신이 강한 사람이었지요. 당시 영국 왕립 미술원(Royal Academy of Arts)은 이탈리아 라파엘과 미켈란젤로를 모든 화가가 쫓아야 할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밀레이는 미술학계의 관행을 무척이나 싫어했지요.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경 속 이야기를 과장되게 그리는 그림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미학은 언제나 대중의 반발을 부르기 마련입니다. 르네상스의 아성에 도전하는 밀레이의 그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를 1850년 공개할 때였습니다. 허름한 목공소에서 일하는 예수와 그 가족들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박한 가정의 평범한 아이로 그려낸 ‘따스함’이 느껴지지요. 라파엘전파 형제단의 특징 중 하나인 세부적인 묘사와 화사한 색상 사용 역시 인상적이고요. 신고전주의 회화처럼 웅장하고 통일성이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지지요.
“밀레이는 성모 마리아를 알코올 중독자처럼 그렸다. 그녀의 추함은 너무나 끔찍해서, 마치 프랑스의 카바레나, 영국의 싸구려 술집에서 볼 수 있는 괴물 같다.”
이 작품의 모델은 엘리자베스 시달이었습니다. 라파엘전파 형제단의 뮤즈로 활동한 여성이었습니다. 존 밀레이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겨우내 욕조에 엘리자베스를 물에 담갔다고 전해집니다.
누군가를 모방하지 않고 길을 개척하는 이들은 언젠가 주목받기 마련인가 봅니다. 라파엘 전파를 향해 찬사를 보낸 인물이 등장합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뛰어난 평론가이자, 19세기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라고 평가받는 존 러스킨이었습니다. 존 러스킨이 극찬했다는 건 뜨내기 화가인 ‘존 밀레이’가 이제 유럽의 전 미술계가 주목하는 ‘떠오르는 스타’가 됐다는 걸 의미지요.
러스킨은 존 밀레이를 비롯한 라파엘 전파 형제단을 위해 지갑을 여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마음껏 예술활동에 전념하라는 응원의 메시지였지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족을 소개할 만큼 가까워집니다. 러스킨은 아내 에피 그레이와 존 밀레이를 함께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아름다운 에피의 모습을 본 존 밀레이는 그녀에게 자신의 모델이 되어주기를 청했고, 그녀도 흔쾌히 받아주었지요.
러스킨은 어느 날 밀레이에게 제안합니다. 함께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가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청이었지요. 물론 아내 에피 그레이도 함께였습니다. 새로운 풍경은, 새로운 사상과 그림을 낳는 법. 존 밀레이는 흔쾌히 받아들이지요. “예 가겠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온 지 며칠 후. 에피 그레이가 집을 나갔습니다. “잠시 가족을 보고 온다”는 쪽지만 덩그러니. 며칠 뒤 그러나 도착한 건 또 다른 편지였습니다. “이 결혼이 무효임을 주장합니다”는 메시지였지요. 편지와 함께 결혼반지가 동봉돼 있었습니다. 사랑의 끈을 끊어버리겠다는 명확한 의지였지요.
존 러스킨이 9살 연하의 아름다운 에피 그레이와 관계하지 않은 이유에는 여러 ‘학설’(?)이 존재합니다. 하나의 설은 ‘음모 혐오’입니다. (전기작가 매리 루티엔스의 설명).
결혼 첫날 밤 그의 상상은 모두 무너지고 말았지요. 아름다운 아내의 나체를 상상하며 침대에 누웠는데, 무엇인가 까끌까끌하고 거칠었던 감촉을 느꼈던 것이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곳‘의 무성한 털들. 그의 상상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던 흉물이었습니다.
존 러스킨이 후에 ‘아동성애’로 의심받은 것 역시 그의 이런 독특한 취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실제로 존 러스킨은 39세 되던 1859년, 10세 소녀 로즈 라 투쉬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기도 했었지요. 18세가 되던 해에 청혼했을 정도로요. (하지만 존 러스킨의 음모혐오나 아동성애와 같은 설은 정확한 증거에 의해 확인된 사실이 아닌 추론에 가깝습니다).
안정된 가정생활이 기반이 되어서였을까요. 밀레이는 화가로서도 점점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라파엘 전파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완성하면서였습니다. 존 러스킨은 이를 ”재앙“(a catastrophe)이라고 비난했지만요. (개인적 앙심이 들어간 판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를 그린 작품은 비누 광고에도 사용됐을 정도입니다. 같은 라파엘 전파 화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팔기 위해‘그림을 그린다“고 그를 모욕하지요. 미의 추구 대신 대중의 선호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건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의 이름 앞에 귀족의 호칭인 ’경‘(Sir)이 붙는 배경이지요. 그리고 이듬해 존 밀레이가 에피 곁에서 영면합니다. 에피도 바로 그 다음해 그의 곁으로 떠났지요.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끝사랑은 맞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요.
러스킨이 후원한 로세티도 밀레이만큼이나 영국 사회를 소란하게 하는 또 다른 연애 파국을 부릅니다. ’라파엘 전파‘의 전통이라도 되는 듯이요. 그가 예술과 사랑의 역사에 남긴 발자욱은 다음주에 소개합니다.
ㅇ영국 예술사에 족적을 남긴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그 그림만큼이나 난잡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ㅇ존 에벗 밀레이는 자신을 후원한 평론가 존 러스킨의 아내 에피와 바람이 나났다.
ㅇ에피는 보수적인 빅토리아 사회에서 ”5년 동안 첫날밤도 안 치렀다“고 주장해 결혼 무효를 얻어냈다.
ㅇ에피와 결혼한 밀레이는 안정된 가정(?)에서 화가로서 기사 작위까지 받을 정도로 성공했다.
<참고문헌>
ㅇ김동훈, 미학-라파엘전파가 20세기 이후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한예종, 2015년
ㅇ팀 베린저, 라파엘전파, 예경,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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