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질소가 울먹였다 [주기율표 위 건강과 사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모든 화학원소 대표들이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모였다. 그들의 일부 구성원이 인간처럼 잔인하고 어리석은 유기체의 몸에 포함되었던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폴로늄(Po)과 이터븀(Yb) 같은 원소는 인체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가 아니었지만, 어떤 화학물질도 그렇게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며 분노했다. 반면 역사상 수많은 학살에 연루되었던 탄소(C)는 엉뚱한 사건을 언급하며 참가자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질소(N)는 2차 대전 당시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치 경비병과 의사의 일부로 비자발적 복무를 한 것을 두고 울먹였다. 이 자리에서 소듐(Na)은 모든 인간을 죽게 할 전략을 제안하며, 그렇게 되면 우주가 탄생할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원소는 다시 죄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 〈타임퀘이크〉의 한 장면이다.
원소기호 7번 질소는 나치 경비병과 나치에 부역한 의사뿐 아니라 모든 인간, 아니 단백질로 이루어진 모든 유기체의 몸,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DNA의 핵심 성분이다. 한편 자연 상태에서 대단히 흔한 물질이기도 하다.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 중에서 여섯 번째로 흔하며, 지구 대기의 78%를 차지하고 있다. 질소가 이렇게 풍년이니, 근육을 부풀리려고 맛없는 닭가슴살을 먹으며 애쓸 것이 아니라 뻐끔뻐끔 숨만 열심히 쉬어도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다. 우리 몸이 질소를 이용하려면 다른 원소들과 반응할 수 있는 ‘불안정한’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데, 대기 중의 질소 분자는 질소 원소 두 개가 강력한 삼중결합을 이룬 매우 안정된 상태로 존재한다. 인간은 물론 어떤 동식물도 이 결합을 깨뜨려 직접 활용할 수 없다.
물론 해결책이 없지는 않다. 오랜 진화의 역사에서 번개와 세균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번개에 의해 대기 중의 산소와 질소가 질산염(NO3-) 이온 형태로 변환될 수 있으며, 이것이 빗물에 섞여 토양까지 도달한다. 또한 토양에 존재하는 뿌리혹박테리아 같은 질소고정세균은 대기 중의 질소를 암모니아(NH3)나 암모늄 이온(NH4+)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이렇게 활용 가능한 형태가 된 질소는 식물의 뿌리로 흡수되어, 먹이사슬을 타고 동물과 인간에게까지 전달되어 우리 몸을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배설하는 대소변과 사체를 통해 질소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주기율표에서 프리모 레비는 질소의 여정을 “공기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우리 인간에게로 기적적일 정도로 순환된다”라고 설명했다.
인간은 이토록 유구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순환 과정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20세기 초,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질소와 수소 기체로부터 암모니아를 대량생산하는 방법, 일명 ‘하버-보슈(Haber–Bosch) 과정’을 개발했다. 이 공로로 1918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기도 했다. 불쾌한 냄새의 대명사인 암모니아 제조 덕분에 노벨상까지 받았다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인류를 식량난에서 구한 대발견이었다. 이를 통해 합성비료를 개발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촉발된 농업혁명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 전 세계 식품 생산의 3분의 1 정도가 이 과정을 통해 생산한 암모니아를 이용해서 이루어지며, 이렇게 생산된 식품은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를 먹일 규모라고 하니 대단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과학자는 전쟁 동안에는 ‘조국’에 속한다”
뛰어난 화학자이자 애국자였던 하버는 1차 세계대전 동안 염소가스 등 화학무기를 개발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평화 시기에 과학자는 ‘세계’에 속하지만, 전쟁 동안에는 ‘조국’에 속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연구 성과는 데게슈(Degesch)라는 독일 국영 화학기업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바로 이곳에서 악명 높은 살충제 사이클론 B(zyklon B·치클론 B)가 개발되었다. 이 살충제의 주성분인 시안화수소(hydrogen cyanide·HCN)는 세포호흡을 방해함으로써 유기체 생존에 필수 에너지를 제공하는 ATP(adenosin triphosphate) 합성을 가로막아 빠르게 죽음에 이르도록 한다.
사이클론 B는 1880년대부터 과수 재배나 곡식 저장고의 해충 방제 작업에 쓰였지만, 가볍고 쉽게 비산하는 특성 때문에 사용이 불편했다. 데게슈 소속 화학자들은 시안화수소에 경고용 안(眼) 자극제(eye irritant), 규조토 등을 더해 캔으로 포장한 제품을 개발해서 상용화했다. 이는 2차 대전 이전까지 독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어 국경의 화물 검역, 창고나 화물열차, 수송선의 해충 방제에 널리 쓰였다.
그런데 세포의 ATP 생성이 필요한 것은 이(蝨)나 쥐 같은 해충류만이 아니다. 사람 역시 시안화수소에 노출되면 치명적 결과가 초래된다. 매우 빠르게 작용하는 데다 독성도 강해서, 체중 68㎏의 인간이 70㎎을 들이마시면 2분 이내에 사망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제품에 일부러 경고용 자극제를 첨가하고, 사용 시 호흡보호구 착용과 환기 같은 안전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버렸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질소가 울먹였던 것은 단지 나치 경비병과 의사의 구성요소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942년, 나치는 ‘절멸 캠프(extermination camp)’에서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이 가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1944년까지 약 3년 동안 110만명 이상의 유대인,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나치에 반대하는 정치범과 레지스탕스 등이 사이클론 B에 희생되었다. 사이클론 B의 개발에 기여한 애국심 강한 독일 국민 프리츠 하버는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자 자리에서 쫓겨나 타향에서 사망했다. 그는 유대인이었다.
사실 이렇게 큰 ‘학살’ 숫자와 마주하면 현실감을 상실하게 된다. 독일의 부헨발트 수용소,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직접 가보았을 때 든 느낌도 공포나 슬픔보다 의아함이 더 컸다. 도대체, 이게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일인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기차에 태워 이 멀리까지 이동시키고, 조금이라도 빠른 업무 처리를 위해 철로를 수용소 앞마당까지 연결하고, 그 많은 포로들을 특성에 따라 세세히 분류하여 라벨을 붙이고,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빠르게 죽이기 위해 별도로 가스실을 건설하고, 시체를 옮기는 수레에 잔여물이 남지 않도록 수레 내부를 코팅하고, 가스실에서 소각로 입구까지 시체 운반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부지런함과 효율성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냐는 궁금증 말이다.
다시 등장한 ‘쥐와 바퀴벌레’
매일매일 가스실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불태우고, 여성 포로들의 머리카락을 산더미처럼 모아 직물을 짜고, 인간 시체의 잿가루를 모아 비료를 만들어 나누어주면서도, 마음 한구석 어디에선가 의심 따위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도 그 답을 찾고자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이렇게 결론 내렸다. “답변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똑같은 내용을 말한다. 즉,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나쁜 일을 저질렀다. 내가 받아온 교육과 살아온 환경을 감안했을 때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내가 하지 않았다면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더욱 엄하게 했을 것이다(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사실 낯설지 않은 변명이다.
더욱 궁금한 것은, 직접 학살 행위를 자행한 나치보다 이를 방관하고 승인한 평범한 독일 시민들의 마음속이다. 어제까지 동네에서 인사하며 지나쳤던 유대인 이웃이 쥐나 바퀴벌레와 다름없는 존재라는 선동, 게르만 민족의 정착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내쫓아야 하고, 아리아인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동성애자·집시·장애인 같은 ‘비인간’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선전에 어떻게 괴테와 실러의 후예들이 그렇게 빠져들 수 있었는지 말이다.
많은 독일인들은 ‘몰랐다’고 이야기했다. "각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알라(Jedem das Seine)"라는 문장이 새겨진 철문과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부헨발트 수용소의 언덕에 올라서면 밤나무 숲 너머로 아랫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이곳에서 그 마을을 내려다보았을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진다. 하지만 연합군이 이곳까지 진격했을 때, 마을 주민들은 수용소가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증언했다. 어쩌면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무지의 특권이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기나긴 송환 길에 오른 유대인 포로들을 길에서 마주쳤을 때, 독일인들은 어떤 개인적 사과도 민망함도 내보일 수 없었다. 프리모 레비는 “그들 각자가 우리에게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얼굴에서 읽을 것이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고 아무도 대면해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귀머거리, 벙어리에 장님이었다. 의도적인 무지의 요새 속에 있는 양 자신들의 폐허 속에 피신해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강하고, 아직도 증오와 멸시를 할 수 있는, 오만과 죄의 그 오래된 매듭에 묶인 포로들이었다(프리모 레비 〈휴전〉).”
아이러니한 것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고향에서 쫓겨나고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역사를 경험했던 이들의 일부가 ‘정착지 확보’라는 낯익은 명분을 내세우며 팔레스타인 반도에 수천 년 거주해온 주민들을 내쫓고, 그곳에 거대한 장벽을 쌓아 세상에서 가장 큰 감옥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하마스의 공격을 빌미 삼아 압도적 무장력으로 팔레스타인에서 학살을 벌이는 중이다. 일부 정치인들은 ‘쥐와 바퀴벌레’라는 낯익은 표현을 써가며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비인간’으로 취급하고 있다.
고통의 역사조차 성찰의 힘을 저절로 만들어주지는 않는 것 같다. 불의에 눈감아버리는 무지의 특권과 방관은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제노사이드, 국가폭력, 혐오범죄를 떠받치는 동력이 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트랄파마도어의 항의 집회에서 울먹이던 질소에게 위로해줄 말이 남아 있다. 학살자와 방관자만이 아니라,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의에 저항하고, 가장 위험하고 비참한 순간에도 인류애를 보여주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꼿꼿이 버틴 사람들의 몸속에도 질소가 들어 있었다고 말이다. 나치 치하 독일에서, 히틀러-나치에게 경례를 붙이고 싶지 않았던 한 과학자는 집 밖을 나설 때면 항상 양손에 무언가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경례를 하는 사람들도 모두 진심으로 파시스트는 아니었을 것이고, 그깟 손짓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열렬하게 나치를 미워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양심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이 소심한 저항을 수년 동안 이어갔다. 거대한 폭력과 불의 앞에서 모두가 투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나의 행동 혹은 행동하지 않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스스로 성찰할 수는 있다. 이조차 포기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역사가 말해준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메시지를 담은 자석을 판매한다. 로만 켄트라는 생존자의 말이 눈에 밟힌다. “제11계: 당신은 절대로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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