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대선과 한국 총선, 그리고 북한[용산실록]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한 데 이어 헌법에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을 명시하겠다고 밝혔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부정하고 ‘민족’과 ‘통일’을 삭제하면서 ‘철저한 타국’, 한민족이 아닌 ‘타국민’으로 대하겠다는 선언이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한국이 ‘도발’을 한다면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분단 71년이 되는 첫 해 한반도가 다시 ‘교전국 상황’이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한반도 문제에서 북한이 주도권을 가지겠다는 의지이지만, 이로 인해 윤석열 대통령이 평화의 열쇠를 쥐게 된 것이기도 하다.
16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통해 김 위원장의 시정연설이 공개되자, 같은 날 오전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김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언급했다.
그동안 북한의 ‘말폭탄’에 ‘무대응’으로 대응했던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 2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보내는 신년메시지’ 담화로 윤 대통령을 비방했을 당시에도 용산은 직접 나서지 않고 통일부 부대변인 명의의 입장문으로 대응했다. 직책은 당 부부장이지만 ‘백두혈통’으로 대남 메시지에 무게를 실었던 김 부부장에 대해 “격에도 맞지 않는 북한의 당국자”로 일축했다.
그랬던 윤 대통령이 ‘무대응’을 깼다. 김 위원장이 15일 시정연설에서 “불법무법의 ‘북방한계선’(NLL)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우리는 이를 몇 배로 응징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공화국이 대한민국은 화해와 통일의 상대이며 동족이라는 현실모순적인 기성개념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철저한 타국으로,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제했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는 “북한 정권 스스로가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 집단이라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발언에 대해 정상이 언급하겠다는 원칙도 보이면서도 '김 위원장'이라는 호칭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북한의 도발에 우리가 대응하면 또 반응하면서 확대하려는 북의 의도가 있어 건건히 대응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북한의 의도가 내부의 균열을 일으키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선전 선동이라는 것을 준엄하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이 헌법 개정을 예고한 것은 지난해 연말 당 전원회의에서 밝힌 ‘두 국가론’을 말 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용산은 북한의 대남 정책 전면 전환으로 위협하는 것은 윤석열 정부 탓으로 돌리고, 윤 대통령에 대한 비방 담화를 발표하는 것에 대해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내부 분열을 노리는 수라고 판단하고 있다.
앞서 김 부부장의 담화 직후 정부는 “북한은 과거 2012년 총선시 각종 대남 선전전을 전개하고, 2016년 총선시 GPS 교란, 2020년 총선시에는 탄도미사일을 4회 연쇄 발사하는 등 우리 총선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지속해 왔다”며 “이러한 점을 감안해 우리 국민들이 북한의 총선 개입 시도를 명확히 인식하고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즉 북한의 일련의 행동이 ‘전쟁이냐 평화냐’를 내세우며 선거에 개입하려는 해묵은 수법이라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도발 위협에 굴복해 얻는 가짜 평화는 우리 안보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릴 뿐”이라며 “우리 국민과 정부는 하나가 되어 북한 정권의 기만전술과 선전, 선동을 물리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마치 ‘평화를 위한다면 타협에 나서야 되지 않느냐, 타협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건 전쟁을 원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식으로 북한이 공세를 하며 내부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문구는 공교롭게도 대만 대선 결과와도 이어진다.
전세계 주요 선거가 몰린 2024년 첫 스타트를 끊은 대만 대선은 결국 ‘안보’가 최대 이슈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연임에 성공하면서 대만에 대한 무력 침공 가능성이 대두되고 대만해협에서의 군사적 위기가 커지면서 ‘반중’(反中) 대 ‘친중’(親中) 구도가 재현됐다.
집권 여당이었던 ‘반중’ 민진당은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선택’을, 제1야당인 ‘친중’ 국민당은 ‘전쟁(민진당) 대 평화(국민당)’를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지난 13일 치러진 대만의 제16대 총통 선거 결과 민진당의 라이칭더(賴淸德) 총통·샤오메이친(蕭美琴) 부총통 후보가 당선됐다.
결과적으로 ‘전쟁이냐 평화냐’의 프레임은 실패했고, 민진당은 최초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다만 대만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부분도 주목해야 한다. 총통 선거와 함께 실시된 제11대 입법원(총선)에서 총의석 113석 가운데 민진당은 51석, 국민당은 52석으로 여당과 제1야당 모두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중도 노선’을 표방한 제2야당 커윈저(柯文哲) 민중당 주석은 대선에서 2030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로 양당 구조를 깼다. 민중당은 총선 8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됐다.
정부는 북한이 50년 넘게 쌓아온 남북관계를 전면 부정하는 것에 대해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마디로 윤석열 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대북지원부’라고 질타한 이후 통일부는 조직개편을 통해 81명을 감축하고, 남북교류협력 담당 조직을 ‘남북관계관리단’으로 통폐합했다. 개성공단지원재단도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내각의 대남기구 중 하나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폐지했고, 곧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 당의 대남기구인 통일전선부를 폐지하거나 개편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의 카운터파트인 조평통이 폐지됐고, 국정원의 카운터파트인 통전부의 개편이 예고되면서 이미 변화가 시작됐다.
해석이 분분한 것은 김 위원장이 선대의 유훈마저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삭제를 지시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 원칙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합의한 평화 통일 3대 원칙이다.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의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도 부정하고 있다.
2000년 6·15 공동선언, 2007년 10·4 공동선언, 2018년 판문점 선언과 같은 해 평양공동선언까지 모두 무효화할 수 있다는 으름장이다. 다만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남북합의를 모두 무효화한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지 않고 있어 향후 움직임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북한이 ‘민족’과 ‘통일’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이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쥔 것은 윤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헌법을 수호하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silverpap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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