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자연 위 찬란한 예술꽃…걷고 보고 즐기며 [ESC]
햇살·바람 품고 미술품 400점 전시 ‘하슬라아트월드’, 대지미술 결정판
국내 유일 해안 계단 지형 ‘바다부채길’…푸른 하늘·바다에 ‘호연지기’
케이블카 인도하는 ‘천년주목숲길’…청소년올림픽 관람은 ‘금상첨화’
알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차디찬 빙판이 내려다보이는 스케이트장 관람석에서 달보드레한 빙수가 떠올랐다. 벼리고 벼린 칼날을 들이대면 금방이라도 얇디얇은 얼음이 갈려 나올 것만 같은 빙판이었다.
지난 11일 강원도 강릉에 있는 ‘2024 강원 겨울청소년올림픽대회’ 스피드스케이트 경기장을 찾았다. 19일 개막과 동시에 다음달 1일까지 14일간 뜨거운 열기로 북적일 경기장이다. 2012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열린 첫 대회 이후 4년마다 열리는 겨울청소년올림픽대회 네번째 개최국은 한국이다. 80여개국 1900명 청소년(15~18살) 선수들이 강원 4개 도시(강릉·평창·횡성·정선)에서 실력을 겨룬다. 강릉·평창 일대를 여행하기에 이보다 좋은 때가 있을까. 이번 대회 모든 경기 관람은 무료다. 경기도 보고 여행도 하고 일석이조다. 이미 인기 있는 대표 겨울 여행지이지만 잘 살피면 새로운 콘셉트의 여행 코스도 많다.
유구한 예술 도시 강릉
지난 12일 오후 강릉 경포해변. 예닐곱이 들어가면 맞춤한 작은 집 3개가 보였다. 모래사장 위에 집이라니! 생경하다. 그 집 문을 열자 폐기물 위에 버려진 염소가 울고 있었다. 실체는 반복되는 영상 속 염소다. 또 다른 벽에는 황폐해진 사막을 담은 영상이 걸려 있었다. 집의 안과 밖은 지구와 목성만큼 이해할 수 없는 간극으로 벌어져 있었다. 이 영상들은 작가 ‘방앤리’(방자영과 이윤준)의 작품 ‘초원의 거인’과 ‘해리, 메타염소’다. 작품 안내원 임미지씨는 “폐기물이 없던 시절을 상기시키는, 환경의 중요성을 담은 작품”이라고 했다. 해변에는 이뿐만 아니었다. 작가 최수앙과 도마도마식당이 공동 제작한 ‘플루리버스: 여러 세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세상’, 외계 행성 조형물 같은 ‘소통의 통로’(박치호·한경희 작) 등 19개 작품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강릉과 평창에 차려진 이 전시는 겨울청소년올림픽이 폐막하는 2월1일까지 계속된다. 제목은 ‘지구를 구하는 멋진 이야기들’. 경포해변에는 ‘지구를 지키는 공생의 강원’이, 평창에는 ‘미래로 가는 디지털 강원’(평창 대관령 트레이닝 센터)이란 이름으로 펼쳐졌다. 김시습 강원문화재단 기획자는 “청소년올림픽 개최에 맞춰 문화올림픽도 같이 열어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청소년올림픽 폐막과 동시에 전시가 막을 내려도 아쉬운 마음을 달랠 곳은 많다. 강릉은 본디 역사가 오래된 예술 도시다. 조선시대 대표 화가이자 문인인 신사임당(1504~1551)이 태어나고 활동한 곳이다. 이런 유산은 새 옷을 입고 현재로 이어진다. ‘하슬라아트월드’(이하 하슬라)가 대표적이다. ‘하슬라’는 삼국시대 강릉 지역의 지명이다.
등명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괘방산에 터 잡은 하슬라에 도착하면 10여m가 넘는 코끼리 모형의 철제 작품이 반긴다. 햇살에 반짝이는 원색 건물도 인사한다. 그 위에 한 사람이 발 한쪽만 딛고 달려갈 자세를 하고 있다. 저 사람은 누굴까. 기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형상을 한 조각품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 투영됐다. 하슬라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미술품은 이것만이 아니다. 400점이 넘는다. 미로 같은 건물에 들어서서 계단이 아래로 뻗어 있나 싶으면 위로 향하고, 바닷바람을 외면했다 싶으면 어느 틈에 산바람이 닥친다. 건물 자체부터 작품이다. 전시장 한쪽 귀퉁이 벽에 뚫린 터널(작품 ‘시간의 터널’)로 들어서면 마치 우주로 나아가는 듯한데, 빠져나오면 햇살이 비치는 땅에 도착한다. 빛에 따라 그림자가 바뀌는 ‘해시계’를 만난다. 6개의 미술관 이외에도 목각인형으로 잘 차려진 피노키오 박물관은 아이들이 가장 환호하는 공간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거대한 하슬라는 강릉에서 나고 자란 최옥영(65·국립강릉원주대 교수) 조각가와 그의 아내이자 경주 태생 박신정(63) 조각가가 2003년부터 ‘조각’했다. 최 작가가 추구하는 ‘대지미술’의 완결이자 박 작가의 선구안이 빚은 결정체다. 대지미술은 대지를 캔버스 삼아 자연과 예술의 결합을 추구하는 예술 장르다. 부부는 강원도 자연환경을 친절하게 살리며 거대한 창작물을 만들었다. 신비로운 감동을 준다. 10만9000㎡(약 3만3000평) 규모의 야외 조각공원까지 합쳐 49만5000㎡(약 15만평) 크기다. 이비지동·솔거동 등으로 나뉜 지상 4층, 지하 2층 건물로 구성돼 있다.(입장료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1000원, 소인 9000원)
미디어아트 전시관인 ‘아르떼뮤지엄 강릉’도 신기한 아트 투어 장소다. 오감을 긴장하게 하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방의 여섯면이 다 유리인 데부터 작품에 손가락을 대면 화면 속 사슴이 움직이는 체험 공간까지 1시간 넘는 관람 시간이 아이스크림 녹듯 지나간다. 특히 8m 높이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를 형상화한 작품은 자연에 견줘 보잘것없는 인간의 존재를 재확인해준다. 제주, 전남 여수에 이어 2021년 12월23일 문을 연 아르떼뮤지엄 강릉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야외에 작품 ‘웨이브’를 설치해 큰 반향을 일으킨 디지털 디자인 기업 ‘디스트릭트코리아’가 설계했다. 총 12가지 콘셉트로 구성됐다.(성인 1만7000원, 청소년 1만3000원, 어린이 1만원) 지난해 7월 문을 연 ‘뮤지엄 딥다이브 평창’(14살 이상 대인 1만8000원, 소인 1만1000원)도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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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단구 위 하늘과 파도
예술이 극대화한 경지도 자연에 비하면 초라하다. 인간의 근원인 자연에 우리가 경외감을 갖는 이유다. 230만년 전 지각변동을 유일하게 국내에서 볼 수 있는 해안단구(해안 따라 형성된 계단 모양의 지형)인 ‘정동 심곡 바다부채길’(천연기념물 437호, 이하 부채길). 이 길은 출렁이는 파도와 함께 뻗어 있다. 2016년 개방하기 전까지만 해도 해안경비를 위해 군이 경계근무 정찰로 이용한 길이다.
지난 11일 도착한 강릉 심곡항 심곡매표소. 부채길의 시작점이다. 도착지인 썬크루즈 정동 매표소에서 출발한다면 이곳이 종착지인 셈이다. 총 2.86㎞(편도 70여분) 거리의 부채길은 심곡매표소에서 부채바위, 투구바위, 정동 매표소로 이어진다.
이날 바람은 거셌다. 여행객들에게 잔뜩 겁줄 태세였다. 하지만 조용히 걷는 여행객의 겸손함에 바람도 누그러졌다. 오른 지 몇분 되지 않아 사각형의 철제 구조물이 나타났다. 여행객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인스타용 사진’을 찍는다. 철제 길과 나무 데크 길이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며 이어진다. 부채길에서 여행객이 만나는 건, 하늘과 그 하늘보다 더 푸르른 파도다. 길을 품은 바위는, 바위의 이웃인 하늘과 파도는 자신들처럼 ‘당당하라’고 한다. 겸손을 장착한 자신감에서 인심도, 배려도 나온다. 20여분 걸었을까, 삼각형 모양의 뾰족한 바위가 나타났다. 부채바위다. 이어 투구를 닮은 투구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채길은 걸을수록 마음이 넓어지는 여행 로드다.
자박자박 걸을 때마다 격려와 응원을 받는 길도 있다. 평창에 있는 발왕산 천년주목숲길이 대표적이다. 한껏 설경으로 멋 부린 자연에 닿는 순간 감탄하고야 만다. 해발 1458m로 남한에서 12번째로 높은 산이 발왕산이다. 정상까지 등산로가 나 있으나, ‘모나 용평’(구 용평리조트)이 운영하는 관광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발왕산 정상에 조성된 천년주목숲길에 쉽게 닿는다. 총 길이 2.4㎞인 이 순환 데크 길은 평창군이 산림청, 모나 용평과 함께 몸이 불편하거나 어린이·노인 등 여행 약자를 위해 만든 숲길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대 주목 군락지다. 주목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란 꾸밈말이 붙는다. 다 자라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죽어도 그 모습을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만난 천년주목숲길에는 초등학생부터 일흔 노인까지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녹지 않은 눈은 나뭇가지마다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시간의 두께’가 두툼하게 얹힌 것 같았다. 가지마다 고드름 같은 얼음이 붙어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땡땡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더 센 바람에는 아예 툭 하고 눈밭으로 직진한다. 그 모양새도 감탄을 부른다. 23살 동생과 이날 이곳을 찾은 직장인 김승미(34)씨는 “뚜벅이가 오기 좋은 거울 여행지”라고 했다. 겨울 왕국의 매력이 뜨거운 겨울청소년올림픽 열기만큼 치솟았다.
강릉 평창/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하슬라’ 일군 최옥영·박신정 부부
“땅은 캔버스이자 도화지”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지난 12일 강릉에 있는 ‘하슬라아트월드’(이하 하슬라)에서 최옥영(65·국립강릉원주대 교수)·박신정(63) 조각가 부부를 만났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하슬라가 터 잡은 괘방산은 황량한 야산이었다. 이들은 이곳을 매년 여행객 40만명이 찾는 강릉 대표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땅만 있으면 조각공원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덜컥 저지르고 사표 내고 시작했는데 아이가 세명이었으니, 이 일 하랴, 애 키우랴 너무 힘들었어요.” 하슬라의 작은 돌멩이 한개에도 박 작가의 땀이 배어 있다. 강릉에서 나고 자란 남편 최 작가와 달리 그는 경주가 고향이다. 서울에서 미대를 졸업하고 대구 경일대에서 교수로 일했다. “떨어져 지내는 가족이 모여야 했고” 덜컥 저지른 일도 감당해야 했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2003년에 하슬라를 개장했다.
처음에는 그저 작업실이 필요했다고 한다. 부피가 큰 조각품을 완성하고 보관할 공간 말이다. 2002년 한반도에 닥친 태풍 루사가 이들의 왕산면 폐교 작업실을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최 작가는 “운이 좋았다. 마침 국가보훈처가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강릉 지역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제작을 의뢰했는데 완성한 후 탑 인근에 있는 이곳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유도 차곡차곡 쌓였다. “(젊은 날부터 여러 차례) 전시하면서 소수에게만 가닿는, 상업적인 소통 위주의 한국 현대미술에 회의가 들어 고민이 컸어요. (미술 대하는) 방식도 심각하고요. 프랑스만 해도 루브르박물관에서 뮤직비디오 찍고 뉴욕(미술계)도 대중과 친절하게 커뮤니케이션하잖아요.”(박신정) “처음부터 자연환경과 공간이 어우러지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어요. 지금 (야외공원에) 다녀 보면 곳곳에 작품이 있어요. 자연환경에 가장 알맞은 공간이 미술관이죠.”(최옥영) 땅과 산을 캔버스 삼는 대지미술가답다.
하지만 굳은 의지와 마땅한 명분이 있다 해서 모든 결심이 열매 맺는 건 아니다. 400점이 넘는 작품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했고 넓은 공간을 무언가로 채워 넣어야 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교수님(남편)이 시공, 심지어 수도 파이프 공사까지 매달려 했으니 어려움이 컸죠.”(박신정) 미술관을 설계하고 디자인한 최 작가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대지미술가 입장에서 운이 좋았습니다. 땅이 캔버스고, 도화지였죠. 심리적 공간이자 시각적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최 작가의 탁월한 미학적 공간 구성 감수성이 실력을 발휘했다. 반전 미학에 빛나는 국내 보기 드문 박물관이 탄생했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이 이 공간에 와서 재밌게 즐기고 그냥 웃거나 미소 짓고 가면 됩니다.” 이곳에선 호텔도 운영된다. 미술품 가득한 특별한 잠자리다.
강원도 다른 지방자치단체 의뢰로 제2, 제3의 하슬라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019년 영월에 ‘젊은달와이파크’가 개관했고 곧 삼척에도 멋진 박물관이 들어선다. 젊은달와이파크가 개관한 뒤 군민이 고작 3만7900명(2021년 기준)인 영월에는 매년 거주민의 두배에 가까운 6만9000명이 방문하고 있다. 황량하게 버려졌던 스페인 소도시 빌바오가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만든 구겐하임미술관이 들어서면서 손에 꼽는 여행지가 된 것처럼 말이다. 부부는 한국의 프랭크 게리를 꿈꾼다. 그리고 사람들은 공간 여행을 떠난다.
강릉/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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