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컵] 일본 축구계 침통…설마했던 '1993년 도하 비극' 재현됐다
[아시안컵] "1993년 도하 비극 있었는데"…일본 기자 우려 현실됐다
[스포티비뉴스=김건일 기자] "1993년 모리야스 감독님이 여기에서 경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카타르 경기장엔 남은 시간을 알기 좀 어렵게 됐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은 무엇입니까."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조별리그 D조 2차전 이라크와 경기를 하루 앞둔 18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일본 기자가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의 배경은 이렇다. 일본은 1993년 10월 28일 카타르 도하에서 치른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이라크와 만났는데, 후반 추가 시간 동점골을 허용하는 바람에 2-2로 비기고 월드컵 출전을 놓쳤다. 일본이 놓친 이 출전권은 한국에 향했다. 공교롭게도 모리야스 감독은 당시 일본 대표팀 미드필더로 출전했으며 모리야스 감독이 막지 못한 크로스가 동점골로 연결됐다. 이 경기는 '도하의 비극'이라며 일본 축구사에서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기자는 추가 시간에 동점골을 허용했던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 대회엔 그때보다 추가 시간도 많다"며 대응 방안과 함께 모리야스 감독에게 간접적으로 당시 기억을 소환시킨 것이다.
모리야스 감독은 "지금 선수들은 시대도 바뀌었고 이번 대회도 추가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경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그런 점을 표함해서 경기 운영을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어 "내가 경험했던 30년 전 경험과 완전히 다른 멋진 플레이를 옆에 있는 이타쿠라 같은 선수들이 해줬다"고 자신했다.
'도하의 비극'을 묻는 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중동 지역 기자도 31년 전 기억을 모리야스 감독에게 떠올리게 했다.
이에 모리야스 감독은 "1993년 경험은 나 자신에게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지금은 선수로서가 아니라 감독 입장으로 왔다"며 "지금 대표팀은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 일본 축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극복해서 세계와 싸울 수 있는 팀이 됐다는 자신감을 갖고 싸워주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치켜세웠다.
도하는 일본에게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지난 2022년 열린 카타르 월드컵에서 독일, 스페인 등이 포함됐던 죽음의 조를 뚫고 16강에 오르는 기적을 만들었다. 당시 감독 역시 모리야스였다. 모리야스 감독에게 도하는 더이상 비극의 땅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모리야스 감독이 생각한 것과 달리 '도하의 비극'이 31년 만에 재현됐다. 19일 열린 대회 2차전에서 일본은 이라크에 1-2로 무릎을 꿇었다. 31년 전 그곳에서 같은 상대에게 패배를 당한 것이다.
이날 일본은 공격 핵심인 쿠보 다케후사(레알 소시에다드)를 선발로 내세웠다.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은 채 대표팀에 합류했던 일본은 지난 베트남과 1차전엔 교체로 나섰다.
쿠보가 복귀하면서 일본의 칼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다쿠마 아사노가 최전방에 섰고, 지난 경기에서 멀티골을 터뜨린 다쿠미 미나미노가 이토 준야, 쿠보와 함께 2선을 꾸렸다.
중원은 리버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엔도 와타루와 스포르팅 리스본 소속 모리타 히데마사가 지켰다. 수비 진영은 베트남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토 히로키, 이타쿠라 고, 다니구치 쇼고, 스기와라 유키나리가 포백을 구성했다. 골키퍼는 스즈키 시온.
최근 팀 훈련에 복귀한 미토마 카오루는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않아 명단에서 빠졌다. 미토마를 제외한 정예 멤버가 나섰기에 일본으로선 승리를 확신하는 경기였다.
그러나 일본은 전반 4분 만에 선제골을 빼앗겼다. 이라크가 중원을 넘거 거침없이 전진했다. 우물쭈물하는 일본 수비진을 상대로 순식간에 페널티박스 안으로 침투에 성공했다. 페널티박스에서 올린 크로스를 스즈키 골키퍼가 손으로 막아 냈으나, 달려들던 후세인이 머리에 맞혀 공을 골문 안으로 보냈다. 3분여에 걸친 VAR 판독 끝에 득점이 인정됐다.
전력 우위에 있은 일본의 점유율은 70%를 오갔다. 그러나 이라크가 거친 수비로 일본의 공세를 계속해서 멈춰세웠다. 여러 차례 얻은 프리킥도 골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라크의 역습이 위협적이었다. 역습으로 만들어진 코너킥이 일본을 다시 위협했다. 이번에도 일본 골키퍼 스즈키가 공중볼을 한 차례 놓치는 바람에 실점 위기로 이어질 뻔했다.
내내 일본을 위협하던 이라크는 끝내 전반전이 끝나기 전 추가골을 성공시켰다. 이번에도 왼쪽이 뚫렸다. 왼쪽 측면에서 올리온 크로스가 다시 후세인의 머리에 맞고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두 골을 허용한 일본은 마음이 급해졌고 그러면서 다시 이라크가 기회를 잡았다. 후반 8분 만에 이라크가 득점 기회를 만들었다. 일본의 압박을 뚫어내고 순식간에 중원을 장악했다. 중원에서 뿌린 스루패스가 단번에 일본 페널티박스 안으로 연결됐다. 일본 골키퍼 스즈키가 이번엔 빠른 판단력으로 공을 먼저 걷어 내며 실점 위기를 넘겼다.
일본이 반격했고 2분 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왼쪽 측면을 뚫어낸 뒤 문전 앞으로 낮고 빠른 크로스를 뿌렸다. 아사노가 공을 향해 달려드는 과정에서 수비와 함께 넘어졌고 주심이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하지만 일본의 페널티킥은 이내 사라졌다. VAR에서 수비와 접촉이 없었다는 판단이 내려지면서 페널티킥 판정이 취소됐다.
일본은 추격을 위해 공세를 올렸지만 이라크가 수비를 단단히 굳혀 일본의 공격을 묶었다.
기다리던 일본의 득점은 8분이 주어진 후반 추가시간에 나왔다. 주장 엔도가 해결사였다. 코너킥에서 띄운 공을 엔도가 헤딩슛으로 연결해 이라크 골망을 갈랐다.
1골 차로 따라붙은 일본은 남은 시간 맹공을 펼쳤다. 하지만 끝내 동점엔 실패한 채 경기가 마무리됐다.
일본은 2022 카타르 월드컵 이후 국제 무대에서 가장 승승장구했던 팀이다. 대회 이후 첫 A매치 두 경기에선 우루과이와 1-1로 비기고 콜롬비아에 1-2로 졌는데, 이후 11경기를 내리 승리로 장식했다. 11연승엔 독일전 4-1 승리, 튀르키예전 4-2 승리, 캐나다전 4-1 승리 등 강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14일 베트남을 4-2로 꺾고 11연승을 완성했다. 튀르키예전이 끝나고 튀르키예 감독 스테판 쿤츠는 "우린 일본과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며 "일본을 우리보다 축구를 잘했다. 그리고 일본의 체력 수준은 놀랍다"고 치켜세웠다. 경기력도 압도적이었다. 11연승하는 동안 46골을 넣으면서 단 8점만 내줬다. FIFA 랭킹은 17위까지 올라갔다. 일본이 이번 대회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 이유다.
대회 전 축구 통계업체 옵타가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산출한 2023 카타르 아시안컵 우승 확률에서 일본은 24.6%로 가장 높은 확률을 받았다. 한국은 14.3%로 2위. 일본보다 10% 넘게 확률이 떨어진다. 이란이 11.2%로 3위, 호주가 10.7%로 4위,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가 10.6%로 뒤를 잇는다. 옵타는 "우리 예측 모델에 따르면 일본이 토너먼트 우승 후보로 평가받는다"며 "엔도 와타루가 주장을 맡은 일본은 월드컵에서 독일과 스페인이 포함된 조에서 1위에 오르는 인상적인 경기를 펼친 뒤 이번 대회에 나섰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아시안컵에서 9차례 출전 중 5회 결승 진출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갖고 있다"며 "FIFA 랭킹 17위로 AFC에서 가장 높은 국가이기도 하다"고 조명했다.
계속해서 "일본은 D조에서 (토너먼트에) 진출할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16강 진출 확률이 92.7%에 이른다. 또 준결승 진출 확률은 52.8%다. 일본 다음으로 준결승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은 팀은 한국인데 39.9%로 일본보다 훨씬 낫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날 경기 패배로 우승 후보라는 체면이 완전히 구겨졌다. 또 이날 경기 패배로 D조 1위에서 2위로 내려앉았다. 이라크가 일본을 상대로 승점 3점을 쌓아 D조 1위로 올라섰다.
아스날 소속 수비수 토미야스 다케히로는 "2점 차로 쫓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높은 위치에서 볼을 가지려 했다"며 "최소 무승부까지 가고 싶었다. 그런 기회도 있었다. 그래서 상당히 분한 결과가 됐다"고 아쉬워했다.
조별리그 두 경기에서 1승 1패를 거둔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 나선다.
토미야스는 "우선 이겨야 한다. 조별리그 통과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엉망을 만들지 않고 각각 의견을 내서 토론하고, 마지막으로는 이 패배가 있어서 좋았다고 말하는 결과를 내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리야스 하지메 일본 대표팀 감독은 "여러가지 반성을 해야 한다. 선수들은 이라크전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결과에만 좌우되지 않고 성과와 과제를 제대로 해 다음 경기에 가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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