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이국의 험한 산, 정글도 휘두르며 전진 [ESC]
화강암 절벽 1038m 카장산
뱀 쫓아내는 사역견 앞세워
현지인 오르지 않는 곳 도전
정오의 섬은 평화로웠다. 태양은 중천에서 이글거리며 바다를 달궜고 그 위로 윤슬이 수증기처럼 들끓었다. 1㎞, 5㎞, 10㎞…. 뛰고 걷고 다시 뛰기를 반복하는 동안 지피에스(GPS) 시계의 거리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출발한 에어 바탕 마을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유진과 아즈리가 선두에 섰고 50m쯤 뒤로 제시와 내가 따라갔다. 힘들면 중간에 수상택시(배)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겠다며 어깃장을 놓던 제시도 이따금 툴툴거리기는 했으나 멈추지 않고 따라왔다.
모험가 도전하는 ’용의 뿔’
해변을 따라 달리는 길 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고통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로밍 상태의 휴대전화 속 세상은 끊임없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을 터였지만 접속하지 않으니 천하태평이었다. 시차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 이륙한 비행기가 경도를 중심으로 15도씩 기울어질 때마다 한 시간의 시차가 생긴다. 한 시간은 현재 말레이시아와 한국의 시차. 딱 한 시간 정도만 이른 것뿐인데 무척 많은 시간이 주어진 듯 여유로웠다.
바다와 숲을 번갈아 걷고 달리는 내내 이 섬의 때 묻지 않은 자연 광경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섬에 사는 원주민들과 만나는 일이었다. 달리다가 목이 마르면 구멍가게에 들어가 시원한 콜라 한 캔을 사서 마시고, 또 배가 고파 식당에 들어가 나시르막(말레이시아식 볶음밥) 한 접시를 바닥까지 비우니 어느덧 섬의 남쪽 카두르만에 도착했다. 앞으로 한 시간 후면 해가 질 거라 지금쯤 왔던 길로 돌아가야 했다. 바로 그때 머리 위로 거대한 산 하나가 보였다. 곧장 유진에게 물었다. “저 산은 뭐야?”
카장산은 해발 1038m의 티오만 최고봉이다. 티오만은 말레이시아 반도의 남동부 해안에 흩어져 있는 64개 화산섬 중 유일하게 산이 많은 섬인데 그중 가장 높은 산이 바로 카장산이다. 우리가 티오만에 들어오던 날 배의 갑판 위에서 바라본 산이었다. 푸른 바다 위로 하늘을 찌를 듯 장쾌하게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 봉우리에 단번에 사로잡혔다. “트윈 픽스라는 암벽인데 정말 멋지지? 별명이 무려 ‘용의 뿔’이야.” 유진이 말했다. 수직에 가까운 화강암 절벽이라 모험심 강한 등반가들의 도전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면서.
“그럼 등산도 할 수 있어?”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해변 어디에서나 뒤를 돌아보면 산이 보이는 이 섬은 그야말로 물 반, 산 반이었다. 그리고 카장산은 오랜 세월 한자리에서 티오만 주민들의 삶을 보듬어왔을 터였다. 카장산에 오르고 싶었다. 한데 돌아온 유진의 대답이 당황스러웠다.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 산은 원시림이야. 아마 오래전 누군가가 오르기는 했을 테고 트레킹 루트도 있는데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지금은 걸을 만한 길이 없어.” 유진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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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 마친 ‘근사한 호텔’의 정체
그 웃음의 이유를 나는 이튿날 아침에야 알 수 있었다. 길 없는 산을 오르겠다고 유진이 나선 것이었다. “다들 산에 갈 준비해. 오늘 아마 마을로 돌아오지 못할 거야. 아주 근사한 호텔을 예약했으니 걱정하지 마. 먹을 것도 넉넉히 챙겼으니 걱정하지 말고. 따뜻하게 입을 수 있는 옷가지 정도면 충분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떠들던 유진이 내 손에 들려준 것은 다름 아닌 목공용 장갑과 팔뚝만 한 정글도였다. 이 칼을 도대체 왜? 정말 산에 길이라도 내겠다는 거야?
마을을 벗어나 차가 다니는 곳까지 한참을 걸어 나오니 작은 지프 한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 제시, 아즈리를 비롯해 티오만의 지리를 잘 아는 유진의 또 다른 현지 친구 후아와 그의 사역견 람보와 함께 트렁크 위에 올라탔다. 차는 덜컹거리며 구불구불한 아스팔트 도로를 한참 동안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길이 막히는 지점에 이르자 유진은 여기서부터 걸어가자고 말했다. 눈앞이 막막했다. 나무와 수풀이 한껏 우거진 ‘리얼 정글’이었기 때문이다.
유진과 후아가 앞서 걷고 그 뒤를 아즈리, 나, 제시가 이었다. 람보는 살판이 났다. 코를 땅에 대고 연신 킁킁거리며 산속 구석구석을 잽싸게 돌아다녔다. 인간에게 접근할 수 있는 뱀을 미리 쫓는 것이라고 했다. 든든한 ‘마운틴 도그’였다. 정글도를 휘두르며 울창한 밀림을 뚫었다. 키가 큰 유진과 후아가 먼저 길을 터놓아 수월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은 혼돈 그 자체였다. 태초의 산을 볼 수 있다면 아마 이러한 모습이지 않을까? 문득 궁금했다. 왜 이곳 원주민들은 산을 오르지 않을까?
“굳이 오를 이유가 없어서? 딱히 목적이 없잖아.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는 전반적으로 등산 문화가 한국처럼 보편화되어 있지 않아. 키나발루산, 바투르산, 린자니산처럼 관광 상품으로 특화된 화산 등을 제외하면 말이야. 그조차도 가이드를 반드시 동반해야 하고 호기심을 보이는 쪽은 대체로 외국인들이지.” 먹고 사는 일이 바빠서? 기후가 습하고 더워서? 타고난 천성이 느려서? 문득 궁금해졌다. 이 일대 사람들은 왜 산을 오르는 일에 별 관심이 없는지,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그리 열심히 산을 오르는지.
목적으로서의 산. 서구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파된 알피니즘을 빠뜨릴 수 없겠지만 그와 별개로 알고 싶었다. 왜 사람은 산을 오르는지. 그리고 왜 나는 산을 오르는지. 하다못해 이제는 정글도까지 손에 들고 이국의 험한 산속을 헤매고 있다. 그러는 사이 땅거미가 내리깔렸다. 무성한 나무 사이로 어둠이 스몄다. 한데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누구도 하산할 생각이 없다. “이봐, 유진! 안 내려가? 호텔 예약했다며!” 내 말에 모두가 깔깔대며 웃었고 유진은 넉살 좋게 말했다. “응? 우리 여기서 잘 건데? 이 산이 호텔이야!”
글·사진 장보영 등산여행가
스물다섯 살에 우연히 오른 지리산에 매료된 이후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시아의 여러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을 달리기 시작했고 산악 잡지도 만들었다. 지은 책 ‘아무튼, 산’은 산과 함께한 청춘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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