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시작하는 이에게 바치는 전주곡’… 1865 프렐루전

유진우 기자 2024. 1. 20.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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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공연은 항상 전주곡(前奏曲·prelude)으로 시작한다.

관중으로 가득 찬 오페라하우스. 조명이 꺼지고 무대와 객석 사이 오케스트라 앞으로 지휘자가 입장한다. 이때 지휘봉을 들고 처음 연주하는 관현악곡이 전주곡이다.

19세기 중반까지 공연장 분위기는 지금보다 훨씬 소란스러웠다. 공연을 앞두고 객석에 앉아 음식물을 먹거나, 큰 소리로 잡담을 나누는 일이 잦았다. 전주곡은 ‘이제 공연을 시작하니 집중해 주세요’라는 신호였다. 음악사학계는 ‘19세기 이전까지 전주곡은 전체 공연에서 큰 음악적 의미가 없었다’고 평가한다.

클래식 문화는 와인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두 문화 모두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 덕분에 전주곡이라는 이름은 와인업계에도 곧잘 등장한다. 역할도 비슷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가 이름에 들어가면 식사 자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분위기를 돋우는 자리에서 마실 만한 와인을 일컫는다.

호주 남부 마가렛 리버를 세계적인 와인산지로 끌어올린 르윈 에스테이트는 입맛을 자극하는 가벼운 화이트 와인에 이 이름을 붙였다. 300년을 이어온 샴페인 명가 떼땅져는 축제와 행사 시작을 알리는 자리에 쓰기 좋은 샴페인 ‘프렐루드’를 만든다.

프랑스 보르도 유명 와이너리 샤토 그랑 퓌 뒤카스는 세컨드 와인이 ‘프렐루드 아 그랑 퓌 뒤카스’다. 세컨드 와인이란 특급 와인 생산자들이 대표 와인과 다른 상표로 다소 저렴하게 내놓는 와인을 말한다. 샤토 그랑 퓌 뒤카스는 대표 와인을 프리마돈나가 부르는 아리아로, 가볍고 편하게 마시기 좋은 세컨드 와인은 전주곡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일부 와인 생산자들은 전주곡을 이들과 다르게 표현했다.

칠레 와이너리 산 페드로사(社)는 전주곡을 단순히 시작을 알리는 음악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보다 범위를 넓혀 기원(起源)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이 회사는 우리나라에서 와인 브랜드 1865로 유명하다. 2003년 1865를 국내에 처음 선보였다. 이후 널리 알려졌다시피 1865는 20년 넘게 ‘국민와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 페드로는 지난해 11월 새 와인 1865 프렐루전(prelusion)을 처음 발표했다. 프렐루전은 전주곡을 뜻하는 영어 프렐루드와 동의어다.

‘최고의 걸작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상징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결국 ‘모든 것이 시작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곳이 1865 와인을 처음 만들었던 마이포 밸리였다.
로드리고 로메로 크루즈 VSPT그룹 CSO
그래픽=손민균

1865는 산 페드로 와이너리 창립연도다. 기억하기 쉬운 네 자리 숫자는 ‘와인은 몰라도 1865는 안다’는 마케팅 성공 신화를 썼다. 산 페드로가 속한 VSPT 그룹에 따르면 전 세계 1865 브랜드 판매량 가운데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60%를 웃돈다. 2022년 한 해 동안 국내에서 팔린 1865만 102만병이다.

그러나 정작 1865 숫자가 가진 의미를 제대로 알고 마시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18홀을 65타에 칠 수 있게 해주는 와인’, ‘18세부터 65세까지 누구나 마시는 와인’ 같은 부수적인 해석으로 기억하는 소비자가 대다수다.

탁월한 인지도는 양날의 칼이다. 대중성과 고급화는 양립하기 어렵다. 이대로면 국내 시장에서 1865는 자칫 한 병에 비싸도 3만원을 넘기지 않는 저렴한 칠레 와인 브랜드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보통 다른 제조기업들은 이런 경우 가치를 차별화한 브랜드를 따로 만든다. 현대자동차는 제네시스를 독립 브랜드화했다. CJ제일제당은 고급화에 대한 갈증을 비비고와 고메 같은 새 브랜드로 해소했다.

산 페드로는 1865 브랜드를 살리는 쪽을 택했다. 1865 프렐루전은 ‘1865 브랜드로 프랑스나 미국 혹은 다른 칠레 경쟁 와이너리처럼 100달러(약 14만원)가 넘는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에 산 페드로가 내놓은 대답이다.

이 와인은 현재 해외 시장에서 국가에 따라 최저 70달러, 최고 150달러에 팔린다. 출시 초기라 국가별로 물량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다. 국제 와인 시장에서는 보통 50달러를 넘는 와인을 프리미엄 와인으로 구분한다. 국내 판매 가격 역시 10만원대 중후반 수준이다. 기존 1865 판매가에 비하면 5배 이상 비싸다.

안드레아 칼데론 1865 수석 와인메이커는 “1865 이름을 그대로 쓴다고 해서 이전과 유사한 포도, 비슷한 양조 기법을 사용하면 분명한 차이가 드러나는 와인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포도밭 위치와 블렌딩(여러 포도품종을 섞는 기법) 비율, 숙성하는 방식까지 모두 바꿔야 했다”고 말했다.

칼데론은 2021년 서른 한살 나이로 칠레 와인업계가 뽑은 ‘재능 있는 와인메이커 10인’에 들어간 천재 와인 메이커다. 국내에서 파는 모든 1865가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1865가 지닌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20년 전 1865 브랜드를 처음 시작했던 칠레 중부 와인 산지 마이포 밸리로 돌아갔다.

산 페드로처럼 큰 와이너리들은 보유한 포도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설령 같은 포도밭이라도 그 포도밭이 몹시 크다면, 묘목 위치에 따라 포도가 더 익거나 덜 익기도 한다. 특히 이 마이포 밸리 지역은 지진과 화산 활동 영향으로 크고 작은 구릉이 발달해 사소한 높낮이가 큰 차이를 부른다.

칼데론은 이전보다 포도밭을 엄격하게 선별했다. 수확한 포도는 품종과 밭에 따라 따로 발효해 숙성했다. 이 과정은 매우 섬세한 작업과 추가적인 비용이 들어 대중적인 와인보다 주로 고급 와인으로 만들 때 사용한다. 그리고는 1865를 처음 만들었던 땅이 품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명료하게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전주곡이라 이름 붙였다.

이 와인은 지난해 처음 발표한 2019년 빈티지가 와인 전문지 디켄터로부터 97점을 받았다. 단번에 칠레를 대표하는 프리미엄 와인 돈 멜초, 알마비바와 어깨를 견주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수입사는 금양인터내셔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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