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현물 ETF’의 등장…제도권으로 들어온 가상자산
11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거래량 100억달러 육박
이더리움 현물 ETF, 5월 중으로 승인 여부 결정
암호화폐의 대표적인 특징은 중앙 기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트코인의 창시자로 알려진 신원 미상의 인물 사토시 나카모토가 내세운 암호화폐의 핵심 개념도 ‘탈중앙화’다. 이로 인해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한마디에도 쉽게 오르지만 자유로운 거래와 익명성을 보장한다는 것은 기존 화폐가 가지지 못한 암호화폐만의 매력으로 꼽힌다.
비트코인이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경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투자자 보호도 불가능하다. 특히 미국 증권법에서는 증권 여부를 판단할 때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따진다. 미국 금융당국이 ‘비트코인은 이 항목에 부합하지 못해 증권성을 띠지 않는다’고 판단한 배경이다.
그러나 암호화폐에 대한 시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지난해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에서는 가상자산이 증권이라고 판결했다. 최근에는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가 미국 시장에서 상장했다. 암호화폐의 제도권 편입을 본격화한 것으로, 향후 다른 암호화폐의 현물 ETF도 거래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
제도권으로 들어온 암호화폐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1월 10일(현지 시간) 총 11개의 비트코인(BTC)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승인했다. 그레이스케일, 블랙록, 피델리티, 발키리, 아크21 셰어스, 인베스코 갤럭시, 반에크, 위즈덤 트리, 비트와이즈, 해시덱스, 프랭클린 템플턴 등이 대상이며 거래는 11일부터 시작됐다. SEC는 “최초의 비트코인 현물 ETF 신청서가 제출된 지 10여 년이 지났다”며 “위원회는 현물 비트코인 ETF의 상장 및 거래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으로 개인 또는 기관투자가들은 비트코인을 직접 보유하지 않고도 주식 시장에 상장된 비트코인을 소유할 수 있게 됐다. 또 코인 거래소를 이용하지 않고 일반 주식 계좌로 거래가 가능하다.
2021년 비트코인 선물 ETF를 승인한 지 2년 만이다. 현물과 선물에는 차이가 있다. 선물은 비트코인의 시세를 반영하도록 설계된 매매 계약이다. 비트코인을 보유하지 않는다. 반면 현물 비트코인 ETF는 증권사가 비트코인을 매수하고 디지털 지갑에 넣어둔 다음 주식을 발행하는 방식이다. 비트코인을 반드시 보유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선물과 차이가 있다.
현물 ETF 승인은 예견된 일이다. 앞서 가상자산 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은 2022년 6월 SEC에 자사 400억 달러(약 53조원) 규모의 비트코인 선물 ETF ‘그레이스케일 비트코인 트러스트(GBTC)’를 현물 ETF로 전환하는 신청서를 냈지만 반려당했다. 그레이스케일은 인정하지 않고 SEC를 제소했고, 2023년 8월 미국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은 그레이스케일의 손을 들어줬다. 비트코인 선물 ETF와 현물 ETF에 차별을 두지 말라는 판결이었다.
당시 시장에서는 SEC가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지만 SEC는 별도의 입장을 내지 않았다. 이후 현물 ETF 승인에 대한 가능성이 커졌다. SEC는 특정 증권의 상장 심사를 240일 안에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초 신청일 기준으로 따지면 1월 10일이 마감기한인 셈이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여전히 비트코인 현물 ETF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1월 11일(현지 시간) 겐슬러 위원장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비트코인은 주로 랜섬웨어, 돈세탁, 제재 등 불법 활동에도 사용되는 투기적이고 변동성이 큰 자산”이라며 “오늘 우리는 현물 비트코인 ETF 거래를 승인했지만 비트코인을 승인하거나 지지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현물 ETF의 승인은 비트코인이 제도권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증권성이 부여된다. 다만 이를 두고 찬반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법적으로 비트코인 거래 소비자들을 보호할 수 있게 돼 암호화폐 시장의 저변이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 있는 반면 암호화폐의 핵심인 탈중앙화를 가로막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자산운용사 코인셰어스의 장마리 모그네티 최고경영자(CEO)는 “매우 긴 여정의 끝”이라며 “이제 비트코인도 투자 가능한 자산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의 암호화폐 스타트업 창업자인 자비에 누카잠은 ‘주류 금융의 대체 시스템’이라는 암호화폐의 본질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누카잠은 “비트코인의 창립 원칙은 탈중앙화”라며 “거대 기관에 맞서는 사이버펑크(가상세계의 불량배)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원칙들이 모두 부인당했다”고 말했다. SEC는 귀금속과 달리 투기성이 강한 자산이라는 이유로 비트코인의 현물 ETF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거두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도 비트코인 현물 ETF 중개에 대해 부정적이다. 자본시장법에서 정의하는 ‘기초자산’에 가상자산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다. 1월 15일 금융위원회는 “비트코인 현물 ETF의 발행이나 해외 비트코인 현물 ETF를 국내 증권사가 중개하는 것은 자본시장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며 “미국은 우리나라와 법 체계 등이 달라 미국 사례를 우리가 바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고 밝혔다.
투자자는 ‘긍정적’…3일간 거래량 100억 달러 육박
투자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가상자산 전문지 코인게이프와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뉴욕증권거래소,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등에서 거래된 3일간(1월 11~16일) 거래량은 97억7100만 달러(약 13조원)에 달한다. 11일 46억 달러, 12일 31억 달러, 16일 19억 달러 등을 기록했다. 15일은 미국의 공휴일인 마틴 루서 킹 데이로 휴장했다.
상품별로는 그레이스케일의 비트코인펀드(GBTC)가 51억7400만 달러, 블랙록의 IBIT가 19억9700만 달러, 피델리티의 FBTC는 14억7900만 달러의 거래량을 기록했다.
영국 투자은행(IB) 스탠다드차타드(SC)는 보고서를 통해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이후 올해 최대 1000억 달러(약 131조원)가 유입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막대한 자금이 암호화폐 시장에 들어오면서 비트코인 가격도 오를 것이라는 기대를 내놓고 있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이후 비트코인 가격이 15만 달러(약 2억원)에 도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의 억만장자이자 벤처캐피털리스트 팀 드래퍼는 비트코인의 가치가 25만 달러(약 3억3000만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과 별개로 비트코인의 반감기가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비트코인 창시자인 사토시는 비트코인의 총발행량을 2100만 개로 제한했으며, 현재 90% 이상 채굴된 상태다. 중앙은행의 무분별한 통화 발행이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을 초래하는 만큼 비트코인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발행을 제한했다.
약 4년 주기로 오는 반감기는 비트코인의 공급량과 채굴 보상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는 일정한 상황에서 공급이 줄어들면 비트코인의 가치는 상승하게 된다. 업계에서는 올해 4월 말에 비트코인의 반감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 시기를 전후로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분석이다.
아울러 비트코인 현물 ETF의 승인으로 다른 암호화폐도 제도권에 포함될 수 있다. 이미 선물 ETF가 거래되고 있는 이더리움(ETH)이 대표적이다. SEC는 5월 23일까지 ETH 현물 ETF 승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자산운용사 반에크가 신청한 이더리움 현물 ETF에 대한 답변 기한이다. 블룸버그 애널리스트인 에릭 발추나스는 이더리움 현물 ETF가 승인될 확률이 70%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현물 ETF에 대한 가능성이 높아지자 최근 이더리움 가격은 2022년 5월 이후 처음으로 2500달러대를 회복했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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