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람들
[아무튼, 레터]
운전은 머지않아 심리학의 한 분야가 될지도 모른다. 이름 붙이자면 운전심리학이다. 법 없이도 산다는 착한 사람, 과묵하고 독실한 신자, 순한 양 같은 사람이 운전석에만 앉으면 달라진다. “어지간한 일은 다 참는데, 운전할 때 누가 위험하게 끼어들면 욕이 나온다”고 배우 안성기도 고백했다. 아이슬란드 화산처럼 갑자기 폭발하는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이 미국 에미상에서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 등 8관왕에 올랐다. 이 복수극은 ‘로드레이지(road rage)’, 즉 난폭 운전으로 시작된다. 대형 마트 주차장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차가 경적을 울리며 화를 돋울 때, 분노를 누르지 않고 응징에 나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남녀 주인공 대니(스티븐 연)와 에이미(엘리 웡)는 끝까지 간다.
도급업자 대니는 성실하지만 어리숙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하다. 에이미는 악착같이 일해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것을 누릴 시간이 부족하다. 두 사람은 운전대를 잡고 익명의 존재로 부딪치는 순간, 저마다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버린다. 난폭 운전과 보복 운전을 주고받으며 그들은 쾌감과 고통을 맛본다. 뭔가를 잃으면서 내면을 탐구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어제까지의 세계’를 쓴 문화인류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자동차 선팅과도 같은 현대의 익명성은 경이로우면서도 끔찍한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미국 촌구석에서 두 농부가 주먹다짐을 했다고 치자. 그들은 경찰을 부르지 않고 소송을 제기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합의한다. 앞으로 수십 년 얼굴 보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도시에서는 접촉 사고만 나도 경찰을 부른다.
인류가 익명의 세계에 살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고립감이 커지고 보복 운전이 늘어났다. ‘성난 사람들’을 쓰고 연출한 이성진 감독은 로드레이지의 불쾌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양계 이민자들의 삶과 정서, 가족과 감정에 대한 통찰을 담아냈다. 흥미롭고 보편적인 이야기라서 인기를 얻었고 골든글로브에 이어 에미상까지 석권했다.
분노는 사회문제다. 온라인에 달리는 댓글들에서도 끝을 알 수 없는 증오가 느껴진다. 운전석에서 보는 세상은 더 흉흉하다. 저마다 분노의 화약고를 가슴에 쟁여두었다가 도로 위에서 탕탕 쏘아대는 것 같다. 선팅이 진해서 운전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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