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 “천국보다 아름다운 해숙이... 희망 줄 수 있기를”
[‘아무튼, 봄’ 희망 편지] (3)
새해 소망요?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 될 수 있겠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새해에 새 드라마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실수하면 만회할 기회가 별로 없는 나이예요. 아주 단순하게 ‘열심히 하자’ 그 생각밖에 없습니다. 점점 소망이 간단해지는 것 같아요.
나는요, 다른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연기자로만 일생을 살았어요. 그걸 빼면 김혜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마지막 커튼콜만 남았다’는 사실 20년쯤 된 생각이에요. 전에는 ‘사람 일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잘해야지’라는 막연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간절해요. 내 나이가 이제 여든둘입니다. 이렇게 오래 살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새 드라마는 5월에 야외 녹화부터 시작합니다. 방송은 언제 될지 몰라요. 얼마 전에도 연출가와 주연 남자 배우를 만나고 왔습니다. 제목은 ‘천국보다 아름다운’이에요.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작가분들이 극본을 썼습니다. 아직 전체를 다 보지는 못했지만 이번 이야기도 참 좋아요. 그러니까 정말 잘하고 싶어요.
나는 평범하고 거기서 거기인 엄마 역에는 끌리지 않습니다. 지루한 삶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잖아요. 가슴 뛰는 연기를 할 수 있는 인물을 늘 기다려 왔어요.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내 이름은 해숙이에요. 나이는 나처럼 80쯤 됐어요. 그런데 지금도 활동을 하는 여자예요. 시장에서 일을 합니다. 해숙이는 좌우간 처음부터 끝까지 나랑 비슷해요.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천국도 나오고 지옥도 나옵니다. 재밌는 게, 죽을 때 ‘몇 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소원을 말하면 이 작품에선 그렇게 되나 봐요. 해숙이는 남편과 정답게 살다가 죽게 됐는데, 남편은 평소에 이렇게 말했대요. “당신은 20대 때도 이뻤고, 30대 때도 이뻤고, 80살이 됐는데 지금이 제일 이뻐!”
대본에서 그 대목이 참 좋았어요. 해숙이는 죽을 때 그 말이 떠올라서 “그냥 80으로, 실제 나이 그대로 천국 가고 싶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천국에 가 보니 글쎄, 남편은 30대인 거예요. 하하.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렇게 흘러가는 이 이야기가 어찌나 재밌던지…. 아차, 줄거리를 너무 많이 공개하면 안 됩니다. 연출한테 혼나요.
새해 소망을 이렇게 엄벙덤벙 말해도 되나 모르겠네요. 옛날부터 ‘실생활도 팍팍하고 어려운데 드라마 속 나까지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공이 아무리 삶의 밑바닥을 헤매어도 그곳에 희망이 있는지,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있는지, 나는 그런 불씨가 있는 배역을 맡아왔습니다. 내가 연기하는 인물을 보면서 ‘아이고 답답해!’ 하고 절망을 더하면 안 되니까요. 해숙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소망을 하나 더 꼽자면 우리 강아지들, 네 마리가 있어요, 아프지 말고 잘 돌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 강아지들은 내가 얼마나 조용히 사는지 알아요. 언젠가 한번은 소리 지르며 연습을 했더니 강아지들이 놀라서 마구 짖었어요. 볼 때마다 ‘제발 나보다 오래 살고, 너네 수명 다해라’ 말하곤 합니다. 걔들은 나를 진짜 엄마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간식으로 12시에 북어, 5시에 당근을 줍니다. 자기 전에도 우리 강아지들 잘 자리 잡고 자나 내려와서 보고 그래요.
소박하지만 이것이 내 새해 소망입니다. 마지막 커튼콜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에서 해숙이가 되어 살 수 있기를, 그래서 그 드라마가 빛났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에게, 또 세상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주고 마음을 순하게 만드는 작품이기를. 그러려면 열심히 해야죠. 막차를 타는 심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겠습니다.
※이 편지는 배우 김혜자씨의 구술을 받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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