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폴라라는 이름에는 마력이 있다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코폴라 와인
1972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호텔방에 틀어박혀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각본을 쓰고 있었다. ‘대부’의 개봉 즈음이라고 하니 아마 2월이거나 3월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호텔방에 틀어박혀 ‘위대한 개츠비’의 각본을 쓰는 코폴라를 종종 생각한다.
엄청난 자본이 투여된 영화가 곧 개봉하니 꽤나 싱숭생숭했을 텐데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그를 말이다. 책상이 아닌 침대에 등을 기대고 썼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영화가 개봉하기 직전의 요동치는 마음을 새로운 작품을 쓰며 다스렸던 것이다. ‘대부’는 엄청나게 성공하지만, 그도 아마 그럴 거라고 확신했겠지만, 아직은 그 확신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아 불안 수치가 가파르게 치솟았을 그때 말이다. 속사정은 모르겠다. 밀린 일이 많았을 수도 있고, 꼭 하고 싶었던 일일 수도 있다.
코폴라는 술을 마시며 각본을 썼을 거라고 생각한다. 호텔방은 술 마시기에 좋고 일하기에도 좋은 곳이니 일을 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겠다고. 일이 안 되면 답답해서 한잔, 일이 잘 되면 기뻐서 또 한잔.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다. 술을 좋아하지 않거나 아예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지만 코폴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뒤에 자세하게 쓰겠지만 코폴라는 술을 좋아하는 것 이상인 사람이고, ‘위대한 개츠비’든 ‘대부’든 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화라 그렇다.
일단 ‘위대한 개츠비’에는 민트줄렙을 만들어 마시려고 호텔로 몰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문제는 이 장면에서 정작 민트줄렙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 장면을 쓰는데, 호텔 신을 호텔에서 쓰고 있는데, 술을 마시지는 않을 수 없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부’는 더하다. 와인이 거의 공기처럼 흐른다고 해야 할까. ‘위대한 개츠비’에서처럼 특정한 술이 플롯에 이바지하지는 않지만 ‘대부’에서 와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코를레오네 일가와 함께 있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나란히, 또 포개어져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대부’를 보는 나는 와인을 마시지 않을 도리가 없고, 와인을 마시면서 코폴라가 와인을 홀짝이며 ‘대부’의 각본을 썼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와인을 마시고 싶게 만들 수는 없다고. 원작자인 마리오 푸조와 어떤 식으로 공동 작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죽이는 장면만큼은 아니지만 ‘대부’에는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특정한 향기와 맛에 대해 묘사하며 음미하거나 특정한 빈티지를 마시거나 하지는 않는다. 와인은 그저 거기에 있다.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영화를 보는 내내 와인 냄새가 떠도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화면 밖의 사람(그러니까 나)도 마시고 있다. 그렇게 이 영화를 보면서 마신 와인이 몇 병인지 모르겠다. ‘대부’는 3편까지 있는 데다가 다시 봐도 지겹지가 않아 여러 번 봤는데, ‘이번에는 마시지 말아야지’라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영화를 플레이하지만 어김없이 와인을 따게 된다. 그들이 마시는 와인과 비슷한 걸 따고 싶지만 그냥 집에 있는 걸 딴다.
그들은 어떤 와인을 마시는가. 시칠리아 와인이다. 좋은 일이나 기쁜 일이 있을 때 코를레오네 패밀리는 시칠리아 와인을 마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시칠리아 와인이란 단지 술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이고, 뿌리를 되새기는 일이라 그렇다. 코를레오네라는 그들의 성(姓)만 해도 시칠리아의 동네 이름이다. 떠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기에 시칠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오면서 원래의 성 대신 코를레오네를 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대부’를 보면서 시칠리아 와인을 마신 적은 없다. 프랑스의 론 와인이나 스페인의 리오하 와인, 이탈리아 와인이어도 토스카나나 움브리아의 와인을 마셨다. 코폴라 와인을 마신 적도 없다. 코폴라 와인이란 바로 코폴라가 만드는 와인이다. 2006년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에 있는 와이너리를 사서 코폴라는 코폴라 와인을 만들고 있다. 앞에서 ‘술을 좋아하는 것 이상인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다. 십 년 전쯤에 코폴라 와인을 보고 ‘어, 그 코폴라?’인가 했는데 그 코폴라가 맞았다. ‘대부’를 좋아하긴 하지만 ‘코폴라 감독을 좋아해요’ 정도는 아니었는데 코폴라라는 이름에 마력이 있는지 한동안 자주 마셨다.
아는 아저씨가 하는 경양식집에 코폴라 와인만 취급했었다는 게 떠올라 전화를 했다. 코폴라에 대한 팬심으로 코폴라 와인만 파는지 물었더니 아저씨는 말했다. “적당하잖아. 라벨도 이쁘고.” 적당하다! 아저씨한테 그 말을 들은 후 ‘적당하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적당이라는 건 정말 어려운 경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밋밋하고 단조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평범’보다는 한 수 위인 느낌을 주면서 중용과 양보를 품은 게 ‘적당’이 아닌가 싶어서. 더 할 수 있는데 더 하지 않는 게 내가 생각하기에 적당인데, 이런 자제력은 흔치 않다. 남들보다 어떻게든 돋보이고 싶은 사람들 사이에서 적당한 사람이 더 돋보일 때가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적당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낀다.
정말이지 코폴라 와인은 적당하다. 그래서 나는 코폴라가 만든 ‘대부’를 보면서 코폴라 와인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대부’는 전혀 적당한 영화가 아니고, 어둡고 뾰족하고 슬퍼서, 그게 뭔지는 몰라도 개성 강한 와인을 마셔야 할 것 같았으니까. 코폴라 와인은 지극히 미국적인 와인이고 어둡지도 예리하지도 않다. 사람으로 치면 웃음이 많고 아는 것도 좀 있고 서글서글한 느낌이다.
그러면 코폴라 와인은 언제 마시면 좋나. 아저씨의 식당처럼 경양식이나 햄버거, 그리고 불고기나 갈비에 어울리는 것 같다. 코폴라 다이아몬드 컬렉션 중 클라렛을 마시고서 나는 이건 구운 갈비와 함께 먹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비를 먹을 때는 코폴라 클라렛이 없었고, 코폴라 클라렛을 마실 때는 갈비가 없었기에 정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여러 종류의 코폴라 와인을 마셔보았는데, 가장 상위 라인인 아르키메데스와 엘레노어는 마시지 못했다.
매우 간명하게 와인 이름을 짓는 코폴라 와인에서 튀는 하나가 엘레노어다. 몇 년 전에 코폴라의 부인이 영화를 찍었다는 걸 듣고 찾아본 적이 있다. 와인 영화였고, 감독의 이름은 엘레노어 코폴라였다. 그러니까 코폴라는 최상위 라인에 부인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참고로 내가 본 엘레노어의 영화는 세계적인 유명 영화감독의 부인이 남편 친구와 론과 부르고뉴를 자동차로 돌며 진귀한 와인을 맛보고 잠깐의 로맨스를 벌이는, 상당히 밋밋한 영화였다. ‘이건 픽션이랍니다’라고 아무리 해봤자 영화에 남편으로 등장하는 유명 감독을 그녀의 실제 남편인 코폴라와 떼놓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을 알 텐데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남았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이런 이야기를 재미로 하면서 와인 모임에서 함께 마실 만한 와인이 코폴라 와인이기도 하다. ‘호텔방의 코폴라’를 떠올린 이유는 1월이라 그런 것 같다. 곧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월이 올 것이므로 1월의 나는 긴장하고 있다. 사계 중에서 압도적으로 겨울을 좋아하지만 2월은 이상하게도 견디기가 힘들다. 어떻게 하면 2월을 잘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저렇게 용맹정진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Interview] “S. Korea’s leap to middle power hinges on fair distribution and growth” says the former PM
- [에스프레소] 그때 제대로 사과했다면
- [특파원 리포트] 디샌티스가 내친 功臣 품은 트럼프
- [백영옥의 말과 글] [380] ‘비교지옥’을 끝내는 적당한 삶
- [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262] 스위스 아미 나이프
- A new dawn for Yeoseong Gukgeuk and its unwavering devotees
- “인간은 사회의 짐, 사라져”... ‘고령화’ 질문에 폭언 쏟아낸 AI챗봇
- 트럼프 2기 앞두고…美, TSMC에 9조2000억원 보조금 확정
- 러 반정부 세력 견제하려...강제수용소 박물관 폐쇄
- 한국야구, 일본에 3대6 역전패… 프리미어12 예선 탈락 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