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 센 최씨가 엄마 김치는 거절 못 하는 이유

최여정 작가 2024. 1. 2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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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최여정의 다정한 안부]
원칙과 지조라면 지켜야 ‘최씨 고집’의 기원
일러스트=김영석

“어휴, 저 최씨 고집을 누가 말려.” 손에 들려주는 김장 김치통을 기어이 현관에 내려놓고 나가는 내 뒤통수를 향해 엄마의 익숙한 한마디가 날아와 꽂힌다. 식구라고는 단출하게 둘이 사는 집에서 밥상을 차려 식탁에 앉는 일은 일주일에 네댓번이 될까 말까 하고, 이미 갖가지 김치가 냉장고에 비좁게 앉아 웅크리고 있는 걸 생각하고는 합리적 이유의 거절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김치가 있으면 밥을 먹게 된다’라는 원인과 결과를 전복하는 획기적 주장을 하며 김치통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었다. 김치통을 내려놓고 잽싸게 문을 닫는 나에게 돌아온 건, 결국 ‘최씨 고집의 못돼먹은 딸년’이라는 불명예.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것은 진정 최씨 고집이 일으킨 비극적 결말인가를 생각했다. 이러저러한 나의 이유를 듣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다가, 정녕 김치를 먹지 않더라도 군소리 없이 받아 들고 와서는 어느 집에서 얻어왔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김치통 옆에 빈티지 와인처럼 숙성시켜야 했나 또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의 단말마 같은 외침인 ‘저 최씨 고집’이 이상하게도 맴맴 귀에 맴돈다. 고집부리는 성씨대로 꼽자면 ‘안씨, 강씨, 최씨’로 선두에 서지도 못하는데, 유독 최씨 고집을 저격하는 이 속담들은 무엇인가. “최씨 앉은 자리엔 풀도 안 난다”는 흔히 듣던 말이고, 최근에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최씨는 코로 고춧가루 물 한 주전자 마시고 물 밑으로 십 리를 헤엄친다”. 이건 그 매운 고춧가루를 코에 잔뜩 품고도 숨 한 번 안 쉬고 잠영으로 4㎞를 한 번에 가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나는 이 놀라운 ‘최씨 고집’의 근원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족보. 종갓집 종손이었던 아버지는, 엄마가 일년 열두 달 제사상을 차렸다 접었다 하는 동안 일년 열두 번 자개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족보를 꺼내 쓸고 닦았다. 조선 왕실에서는 3년마다 날을 정해 전국 각지에 나누어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을 일일이 꺼내 말려 습기와 곰팡이의 피해를 막았는데 이를 ‘포쇄(曝曬)’라고 불렀다 한다. 아버지가 족보를 다루는 손길이 어찌나 엄숙하던지 마치 실록을 다루던 포쇄 별감이 환생한 것 같았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버지는 갑자기 ‘당분간 동생과 함께 자야 한다’는 일방적인 통보 후에 동생 방을 비우더니 족보를 모두 꺼내 방 한가득 펼쳐 놓기 시작했다. 며칠 후 친척 어르신들이 그 방에 모두 모였다. 진주 사당에서 시제 지낼 때 한복 도포 자락 휘날리던 할아버지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렇고 바스락거리던 족보들은 모두 사라지고 대신 거실에 꽂혀 있던 반짝반짝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같은 책들로 감쪽같이 바뀌어 있었다. 이렇게 후대에게 길이길이 전해질 튼튼하고 묵직한 삭녕 최씨(朔寧崔氏)의 새로운 족보가 탄생했다.

여러 최씨 가문 중에 흔치 않은 본관인 ‘삭녕’은 지금 연천군 인근의 지명으로 고려 명종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천로를 시조로 한다. 이후 광주 남구, 강원도 원주, 전라도 남원, 경남 진주 등으로 흩어져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우리 가문의 사당이 있는 곳이 진주다. 삭녕 최씨 가문은 과거 급제를 한 사람만 서른 명이 넘고, 영의정이 두 명 나올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는데, 그중 유명한 인물이 바로 최항이다. 세종대왕이 꿈을 꾸는데 용이 똬리를 틀고 앉은 나무에 다가가 보니 그 아래에 태연하게 낮잠을 자는 선비가 바로 최항이었다. 실제로 최항은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한 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와 용비어천가 짓는 일에 참여했고, 문종 때는 세종실록 편찬을 맡았다. 하지만 최항의 고집스러운 일화는커녕 오히려 성품 사납고 고집스러운 부인 때문에 수염이 통째로 뽑혀서 출근했다가 왕과 동료들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말만 전해진다.

다시 자료를 더듬어 보다가 드디어 찾았다. 최씨 고집의 주인공 최유지(1603~1673)다. 실학자 장영실이 1433년에 만들었다고 알려진 하늘을 관측하는 기구 ‘혼천의’를 17세기에 다시 살려낸 인물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의 이름은 사라졌을까. 전북 김제 군수였던 최유지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져, 책으로만 남아 전해지던 혼천의를 대나무로 복원해 낸 ‘죽원자’를 1657년에 만들었다. 죽원자는 대나무 고리 6개를 천체 운행 원리에 맞게 배치한 기구였는데 이후 이를 개조한 새로운 혼천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최유지의 공로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로 묻히게 된다.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잡혀갈 때 최유지가 발탁되었으나 ‘병든 노모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끝내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런 최씨 고집이라면 지켜야 하지 않나.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왕의 눈 밖에 나서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해도, 역사책 속에 이름을 남기지 못해도 말이다. 그런데 나는 고작 김치 따위로 엄마를 속상하게 했으니 고집을 애먼 데 부렸다. “엄마, 김치 가지러 주말에 들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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