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 횡단만 6번째...그가 이 길에 인생을 건 이유

김아진 기자 2024. 1. 2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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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1996년 첫 유라시아 횡단
김현국의 여섯 번째 도전
여행가 김현국이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함께한 경차 캐스퍼에 올라 포즈를 잡았다. 차에는 그가 다녀온 길의 지도가 그려져있다. 1996년 국내 최초로 시작한 유라시아 대륙 횡단은 이번으로 여섯 번째다. 김현국은 "우리 국민이 마음만 먹으면 시베리아를 구경할 수 있을 때까지 가고 또 가서 길을 닦아 놓겠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유라시아 대륙 횡단만 여섯 번째다. 쉰일곱의 여행가 김현국은 20대부터 이 길에 인생을 걸었다. 결혼도 안 했고 집도 없다. 그래도 행복하다. 시베리아 벌판에 서면 한없이 겸손해지고 세상에서 얻은 마음의 병도 치유된다.

작년 5월 고향인 광주(光州)에서 시작한 대장정은 최근 서울에서 막을 내렸다. 여행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던 김현국을 충남 천안의 길 위에서 만났다. 그는 이번에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 베를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다녀왔다. 6개월, 왕복 3만2000㎞. 그간 오토바이를 이용했지만, 이번엔 경차인 캐스퍼와 함께했다. 갔던 길을 또 가는 이유를 물었다. “누구든지 차 타고 바이칼 호수 가서 낚시하고, 발트해 가서 서핑도 할 수 있는 시대거든요. 북극곰도 보고 오로라도 보고요. 2주 휴가만 있다면요. 어떤 여행자는 ‘버킷 리스트’라고 하는데요. 저는 그 길을 쉽게 갈 수 있게, 시선을 확장해 주고 싶다는 소명 의식을 갖고 가고 또 가고 있습니다.”

◇두려웠던 국내 최초의 횡단

김현국은 남들이 관심 갖지 않았던 유라시아가 새로운 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해외여행을 누구나 하지만, 1996년엔 미국, 유럽도 쉽게 가지 못했던 때다. 그런데 시베리아라고? “주변에서 대놓고 미쳤다고 할 정도의 모험이었죠. 배짱이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가는 건 가는 건데 너 어떻게 돌아올래?’라고 물을 정도로 여행에 무지했던 때거든요. ‘수영이라도 해서 돌아올 테니 걱정 말라’고 하고 멋지게 떠났었죠.”

-여행은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저는 전남대 87학번입니다. 격변의 시대에 살았죠. 군대 제대하고 되도록 집에서 멀리 떠나보자 했습니다. 해외여행 자율화가 됐던 1989년 직후인 1990년 스물두 살에 일본을 처음으로 여행했죠. 그 직후엔 3년간 인도에서 살기도 했고요. 무일푼으로 가서 노숙도 하고 현지인처럼 살았죠.”

-이유가 있었을까요?

“열심히 민주화 운동을 했죠. 제가 지지했던 양김이 단일화를 안 하는 바람에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어요. 허탈했죠. 벗어나고 싶었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여행 자유화도 해주고 북방정책도 추진하더라고요. 제 길을 열어준 셈이죠. 좋아하는 사람한테 상처받고, 싫어하는 사람이 기회를 준거죠(웃음).”

-1996년 유라시아는 어떻게 가게 된 거죠?

“오토바이로 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패기 하나만 있었어요. 낭만의 시대였죠. 남북이 갈라져 있으니 도대체 갈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비행기로 오토바이를 실어 날라서 갔죠. 주변에서도 십시일반 많이 도와줬고요.”

-시행착오도 많았죠?

“처음엔 중국을 통해 튀르키예로 가려고 했어요. 웃기는 얘기죠. 당연히 못 가는건데 그 정도 정보도 없었어요. 가보니 현실은 오로지 시베리아 횡단뿐이었어요. 그렇게 혼자서 길을 만들었죠.”

-당시엔 최초였죠?

“네. 그때는 지금처럼 길이 있을 때가 아니라서요. 8개월이나 걸렸죠. 고생을 많이 했어요.”

-많은 관심을 받았겠어요.

“그렇죠. 한번은 책을 좀 내고 싶어서 출판사에 전화해서 얘기를 했더니 말미에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시베리아가 뭐예요?’라고요. 하하. 그 정도로 생소한 땅이었어요.”

-그 뒤엔 러시아에서 살았다고요?

“냉전이 끝나고 러시아가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했어요. 1997년에 모스크바로 갔지요. 먹고살아야 하니까 쌀장사를 했고요.”

-독특하네요.

“미국 쌀을 수입해다가 러시아 일식집에 스시 만드는 밥으로 팔았어요. 꽤 장사가 됐고요.”

-그런데 또 여행 계획을 세웠어요.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제가 경험한 건 ‘길은 모스크바로 통한다’는 거였어요. 실크로드를 알게 됐고, 2001년을 목표로 300명과 함께 대장정을 기획했죠.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일본 교토까지요. 1년 2개월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못 갔죠?

“지구 환경, 빈곤, 질병 등을 이슈화하는 게 목표였는데 실패했어요. 두 달에 걸쳐 사전 답사까지 끝내고 돌아왔는데 며칠 있다가 미국에서 9·11 사태가 터졌어요. 시작도 못하고 접었죠.”

-충격이 컸겠어요.

“열심히 번 돈 3억원도 올인했는데, 모든 게 무너졌죠. 후유증이 10년 가까이 갔어요.”

김현국씨가 유라시아를 횡단하며 매일 쓴 일기장. 1996년부터 쓴 일기장은 100권에 이른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굶어도 좋았다

김현국은 여행가가 직업이다. 오직 유라시아 탐험을 위해 책을 읽고 자료도 찾고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보니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죽더라도 날 실패한 인생으로 끌어들인 시베리아에서 죽자는 생각으로 다시 떠났습니다.” 그렇게 2014년, 2017년, 2019년, 2023년 여러 번 유라시아로 갔다. 경비는 늘 빠듯했다. 1996년 오토바이 여행 때는 당시 돈으로 400만원, 그 뒤로는 각각 3000만원, 차를 가져간 이번 여행엔 6000만원이 들었다. 배, 비행기를 통한 오토바이, 차 운반 비용이 수백만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5~6개월 여행 비용으로는 큰 액수는 아니다. “굶어도 좋다란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그래도 많은 친구를 만나 굶지도, 길바닥에서 자지도 않았네요.”

-2014년 세 번째로 유라시아 대륙을 찾았어요.

“죽어도 시베리아에서 죽겠다는 심정이었어요.”

-좀 이해는 안 돼요. 평범하게 살 수도 있는데요.

“길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남과 북이 갈라졌고 우리는 제한된 선택 범위 안에서 치열하게 경쟁만 하고 살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대안이 뭘까. 공간을 열어주자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통일을 이룰 수는 없지만, 그걸 뛰어넘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가장 힘든 여행은 언제였나요?

“2014년이죠. 대장정 프로젝트가 미끄러진 뒤라 심리적으로 위축도 됐고요. 디지털 시대로 바뀌면서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는데 저는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했더니 갑갑했죠.”

-그 뒤로도 또 갔어요. 계속 가는 이유가 뭔가요?

“비행기 타고 미국도 유럽도 가는 세상이 됐잖아요. 그런데 일상의 이동 수단으로는 엄두를 못 내요. 저는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휴가 1~2주 내고 평소에 타던 차 가지고 바이칼 호수를 볼 수 있다는 걸요.”

-무섭지 않았나요?

“두렵죠. 누구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하는데 여행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저 사람이 날 죽일 사람인가 아닌가’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아요.”

-숙소도 없었다고요?

“러시아 사람들은 오토바이만 봐도 달려와요. 러시아 말 못해도 따뜻하게 반겨주죠. 말도 하기 전에 자기들 집에 와서 하루 보내고 가라고 해요. 그렇게 한 끼를 때우고, 하루를 보내면서 5~6개월을 지냈어요. 이번 여행에선 차를 가져가서 90%는 차박을 했고요.”

-사고는 없었나요?

“운이 좋게도 저는 없었어요. 흔하다는 오토바이 사고도 없었어요. 다만 쇠파리떼를 만나서 물리면 몸에서 애벌레가 나올 정도의 고통이 있었죠. 벌레는 너무 많아서 이제 친구처럼 느껴질 정도니까요.”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딘가요?

“바이칼 호수와 몽골 흡수골 사이요. 해발 1000m의 고원지대인데 거기에 도착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와요.”

-이번 여행에선 전쟁이 또 변수였겠어요.

“걱정은 있었지만 주변의 우려처럼 살에 와 닿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거의 30년을 다녔는데 친구도 많겠어요.

“네. 길 위에서 만나는 모두가 친구죠. 카잔이란 도시에 사는 가족은 갈 때마다 만나요. 그런데 이번에 갔더니 10대 때 만난 친구였는데 전쟁에 나갔다가 손가락이 끊어져서 돌아왔더라고요. 위로해주고 싶었는데 만남을 거부하더라고요.”

-또 갈 건가요?

“당연하죠. 가까운 시일 내 다시 유라시아로 갈 겁니다.”

◇전 세계인이 모이는 유라시아를 꿈꾼다

최근엔 김현국처럼 유라시아를 찾는 여행가가 적지 않다. 오토바이, 차를 이용한 여행자는 많지 않지만 비행기, 기차, 버스 등을 이용해서도 연간 100명 정도가 오간다. “제가 닦은 길을 여행자들이 찾고 있다는 게 뿌듯하죠. 우리 국민 모두가 쉽게 시베리아에 갈 수 있을 때까지 저는 계속 달릴 겁니다.”

-김현국에게 여행은 뭔가요?

“자기 수양이에요. 겉은 멀쩡한데 속은 다 썩어 문드러진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 상처를 치유받는 게 여행이에요.”

-치유를 많이 받았나요?

“저도 한때는 ‘내가 최고야’란 생각으로 살았어요. 제 탐험기에 대해 외국에서는 대서특필해 주기도 하고 관심을 많이 가져줬거든요. 그런데 정작 한국에선 부정적이었어요. 그래서 분노, 상처가 많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시베리아에 서면 겸손해집니다.”

-결혼은 했나요?

“장가는 당연히 못 갔죠. 제가 이렇게 떠돌아다니는데 누가 저한테 오겠어요? 하하.”

-평범한 삶을 거부하는 것 같은데요.

“평범하게 살았다면 재미없었을 겁니다. 저는 지금에 만족해요.”

김현국의 시선은 또 유라시아로 향한다. 작년 여행을 마쳤지만 또 나갈 채비 중이다. “유라시아 콤플렉스란 장을 온라인으로 만드는 게 제 목표입니다. 전 세계 누구라도 유라시아 대륙을 경험하거나 횡단할 수 있도록 메타버스(가상세계)를 활용한 공간을 만드는 거죠. 그래서 필요하다면 또 유라시아로 떠나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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