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긴, 열불 나는데…” ‘얼죽아’는 왜 대세 커피가 됐나

정시행 기자 2024. 1.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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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얼어 죽어도 마시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파와 폭설을 보도하는 TV 뉴스에 잡힌 서울 도심의 한 남녀. 패딩을 입고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걷는 모습으로 '얼죽아 협회 회장과 부회장'이란 소리를 들으며 얼죽아족의 인터넷 밈(meme)이 됐다. /유튜브

지난 17일 아침 서울 홍대 앞 한 커피 전문점 앞. 영하의 날씨에 직장인과 학생들이 줄지어 사 들고 나오는 건, 십중팔구 투명 플라스틱 컵에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아아)였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아아’를 테이크아웃한 32세 회사원 김해인씨는 “먹고 싶어 먹는다기보다는, 출근을 위한 도핑(doping·약물 주입)이죠”라며 웃었다.

엄동설한에도 ‘아아’의 인기가 뜨겁다. 10년 전쯤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먹는다”는 ‘얼죽아’족(族)이 처음 등장할 당시, 찬 것 먹고 배탈 나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은 젊은이들의 반짝 유행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각 커피 전문점 제조 음료 매출로 보면 되레 따뜻한 커피가 소수자가 됐다. 최근 스타벅스코리아는 국내 냉음료 판매 비율은 2014년까지 절반에 못 미쳤으나, 2015년 처음 과반을 달성해 현재 77%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겨울에도 아메리카노 10잔이 팔릴 때 7~8잔은 ‘아아’로 집계된다.

한국은 커피 공화국이다. 국민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이 405잔으로, 세계 평균(152잔)의 2.7배에 달한다. 특히 얼죽아는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아메리카노 종주국 미국에서도 대도시나 대학가에선 냉음료가 많이 팔리지만, 따뜻한 커피가 여전히 총매출의 72%를 차지한다. 에스프레소에 얼음은커녕 물 타는 것도 꺼리는 유럽에선 말할 것도 없다.

프랑스 통신사 AFP가 한국의 '얼죽아' 현상을 보도한 동영상 보도 화면. 얼죽아를 'Eoljuka'로 한국어 발음 그대로 소개하며 "겨울에도 뜨거운 커피보다 많이 팔리는, 대한민국의 비공식 국가음료"라고 했다. /AFP

프랑스 언론 AFP통신은 ‘얼죽아’를 “대한민국의 비공식 국가 음료”라고 표현하면서 우리 발음을 그대로 따 “Eoljuka”로 소개했다. 김치(kimchi)나 갑질(gapjil), 내로남불(naeronambul)처럼 번역조차 힘든 ‘K무엇’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얘기다. Eoljuka는 권위 있는 영어 사전 옥스퍼드와 메리엄웹스터, 콜린스에도 등재될 조짐이다.

왜 얼죽아일까. 소비자들은 “입 데지 않고 커피를 빨리 마실 수 있어서”라고 입을 모은다. 한국에선 커피가 사교를 위한 사회적 음료라기보단, 일하거나 공부할 때 정신을 차리기 위한 기능성 음료에 가깝다. 이중 ‘아아’는 빨리 카페인을 주입해 몸을 깨울 수 있고, 길 걸으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업무를 하면서도 쭉쭉 들이켤 수 있어 멀티태스킹(한 번에 여러 일을 하는 것)에 최적화된 음료다. AFP도 “얼죽아는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ppalli ppalli) 문화에 기인한다”고 했다.

뜨거운 커피는 집중이 필요하다. 적당한 온도까지 식기를 기다려야 하고, 타이밍을 놓쳐 식으면 쓴맛이 강해진다. 반면 ‘아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내내 균질한 맛을 즐길 수 있고 얼음이 녹으면 연해진다. 커피점 측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팔기 편하다”고들 한다. 향과 맛이 천차만별로 느껴지는 뜨거운 커피와 달리, ‘아아’는 원두의 질이 나쁘거나 내리는 방식이 서툴러도 만족도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죽아를 외치는 10~30대는 “‘아아’는 청량하고 개운해서 콜라나 물처럼 마시게 된다”고 말한다. 뜨겁고 자극적인 음식을 주로 먹는 우리 식문화에서 후식으로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술집에서 젊은이들이 맵고 짠 안주에 ‘아아’를 곁들이는 것도 흔한 풍경이 됐다.

'얼죽아'가 10~30대 젊은이들을 묶어주는 문화 현상이 되면서, 이를 실천하는 연예인들의 인증샷이 겨울마다 올라온다. 개그맨 이승윤이 산속 얼음 호수를 깨고 들어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모습. /인터넷 커뮤니티

또 한국에선 탁 트인 야외보단 사무실·학원·카페 등 좁은 실내에서 부대끼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겨울에도 굳이 따뜻한 음료에 손이 가지 않고 오히려 ‘열받는 일’을 식혀주는 음료가 필요하다는 말도 나온다. 일각에선 “계절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내 취향을 고수하겠다는 MZ세대 특유의 문화가 얼죽아라는 동조 소비 심리를 확산시킨다”는 분석도 있다.

의사들은 “얼음을 씹어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면 철분 결핍성 빈혈을 의심해 보라”고 한다. 빈혈 환자들은 섭식 장애의 일종인 얼음과식증(pagophagia)을 보일 수 있다. 뇌에 산소를 공급하는 혈류를 늘리려 얼음을 물어 감각기관을 마비시키는 행동이다. 영양 결핍과 스트레스, 불안, 강박 장애도 얼음과식증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미 심리학자 제프 로트먼은 “차가운 음료는 당혹감과 수치심, 후회, 죄책감 같은 ‘뜨거운 느낌’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커피 프랜차이즈와 편의점마다 ‘아아’ 대용량 출시 경쟁이다. 스타벅스, 메가커피, 빽다방 등에 이어 컴포즈커피가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 연말 1리터에 육박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전용 상품을 내놨다. 병원에서 맞는 링거에 준하는 용량의 ‘아아’를 빨대로 흡입하는 얼죽아족이 거리를 활보한다. 어쩐지 짠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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