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돈을 넘보지 마오

김동식 소설가 2024. 1.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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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이승에서 못 끊은 돈의 맛
저승서 맛보던 남자의 최후
일러스트=한상엽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삼도천(三途川)을 건너는 배가 올 것이다.”

저승사자가 떠난 자리에 네 명의 망자(亡者)가 남겨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듯하자, 심심해하던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주머니에 노잣돈이 있더랍니까?” 다른 남자가 손바닥을 펼쳐 엽전을 보여줬다. “말도 마십쇼. 나는 주머니가 아니라 입안에 있더군요. 아니 시대가 어떤 시댄데 입안에 돈을 넣어, 퉤퉤.” “아! 노잣돈이 죽으면 자동으로 엽전으로 바뀌는군요?” 사람들이 저마다 손에 든 노잣돈을 꺼내 보였다. 짤랑이는 엽전의 개수가 모두 똑같지는 않았지만, 크게 차이 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살아생전 얼마나 부자였든 죽은 뒤에는 별 차이가 없는 듯했다. 사람들은 노잣돈을 짤랑거리며 어디에 쓸모가 있을지 따위를 얘기했는데, 그때 장발의 한 남자가 말했다.

“우리 심심한데 노름이나 한판 합시다.” “뭐요? 노잣돈으로 노름을?” 모두 어이가 없었지만, 장발은 태연했다. “노잣돈으로 노름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배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심심풀이나 하자 이 말이지요.” “그러다 누가 노잣돈을 다 잃으면 그 사람은 삼도천을 어떻게 건넌답니까?” “허허, 사람이 죽어도 양심이 있지! 당연히 뱃삯은 딴 사람이 대신 내줘야지요. 개평 모르십니까?”

그러자 수염 덥수룩한 남자가 시원하게 웃었다. “난 좋습니다. 노잣돈 많으면 나중에 좋을지도 모르고.” 장발과 수염이 나서자 내심 마음이 동해 있던 다른 한 남자도 나섰고, 구경하려던 마지막 남자도 결국 끼어들었다. “종목은 삼치기 어떻습니까? 동전으로 할 수 있는 게 그거니까.” 네 명의 망자는 엽전을 주먹에 쥔 채 삼치기를 시작했다. 장발이 먼저 엽전을 숨긴 주먹을 쥐어 내밀었다.

“자, 맞혀보시죠.” 일단 도박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몰입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될 만큼 활기가 돌았다. “난 둘에 엽전 하나 걸겠소.” “난 하나에 엽전 하나.” “잠깐! 다시 세 봐요! 정확히 센 거 맞습니까?” “거 맞다니까요 참 나.” “아까 분명 둘에 걸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분명 둘이라고 한 것 같았는데?” “이 양반이 왜 이러시나?” 전형적인 노름판 분위기를 띠더니, 기어이 멱살잡이까지 일어났다. 모든 돈을 따낸 장발을 향해 돈을 잃은 사내가 달려들었다. “이 새끼! 너 솔직히 말해! 속임수 쓰는 거지? 노름하자고 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흥분한 그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까부터 보고 있던 저승사자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재밌는 일을 하고 있구나.” 깜짝 놀란 사람들이 헛숨을 삼키며 굳어버리자, 저승사자가 혀를 찼다. “그동안 내가 많은 망자를 인도했지만, 설마 노잣돈으로 노름하는 놈들은 처음이다.” 저승사자는 정확히 장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박꾼으로 살다 칼 맞아 죽은 놈이 그 버릇 못 고치고 죽어서도 노름질이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남자들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장발의 멱살을 잡았다. “뭐 도박꾼? 어쩐지!”

그러자 장발 남자는 그들을 강하게 뿌리쳤다. “어허! 정당히 승부해서 딴 돈을 인제 와서 뭘 내놓습니까? 하기 싫으면 하지 말았어야지, 자기들이 해 놓고 말이야.” “뭐야?” “내가 강제로 시켰습니까? 억지로 노름하라고 등 떠밀었습니까?” “뭐 인마?” 장발은 저승사자 곁으로 도망가며 말했다. “안 그렇습니까 선생님? 정당하게 딴 이 노잣돈의 소유권은 제 것이지 않습니까? 저승에도 법이 있지요?”

다들 어이가 없었지만, 저승사자의 눈치를 살폈다. 저승사자는 가만히 장발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승에도 법도가 있지. 그 노잣돈은 모두 네 것이다.” “그것 보십쇼!” 장발의 의기양양한 태도에 나머지 모든 사람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승사자는 한심하다는 듯 그 꼴을 보다가 뒤로 손을 뻗었다. “배가 왔으니 이제 건너야겠다. 뱃삯을 준비하거라.” “뱃삯이 얼마지요?” “가진 노잣돈 전부.”

장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람들에게 엽전 하나씩은 돌려줬다. “나는 한 번 뱉은 말은 지킵니다. 개평은 줬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은 불편했지만, 엽전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저승사자가 먼저 나룻배에 오르고, 망자들도 뒤따라 올랐다. 갓을 쓴 뱃사공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듯 목각 인형처럼 노를 저었고, 배는 빠르게 삼도천을 흘러갔다. 강에 오르기 전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게 삼도천이었는데, 막상 배가 나아가니 의외로 빠르게 건너편 나루터에 도착했다. 상념에 젖을 새도 없던 사람들이 어정쩡하게 일어서자, 저승사자는 배 밖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내리기 전 뱃사공에게 노잣돈을 내고 내렸는데, 장발의 차례에서 저승사자가 가로막았다.

“너는 남거라.” “예?” “저들은 뱃삯이 한 냥뿐이라 여기서 내려야 하지만, 뱃삯이 많은 너는 멀리까지 갈 수 있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멀리 간다는 게…?” “노잣돈의 의미를 모르느냐? 돈 때문에 악착같이 아등바등 살아봤자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게 노잣돈이다. 설마 죽어서도 돈이 쓸모 있을 줄 알았더냐? 돈이 많아 봐야 그저 멀리 갈 수 있을 뿐이다.” “멀리…?”

장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저승사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처럼 많은 노잣돈을 가진 인간은 처음이니, 오랜만에 저승 깊숙이 가보겠구나. 나조차도 뭐가 있는지 모르는 곳까지 말이다.” 배가 출발했다. 장발은 노잣돈을 삼도천에 모조리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손에 달라붙은 돈은 악착같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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