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푸른 눈의 사무라이, 넷플릭스 접수했소”…자포니즘의 부활
넷플릭스는 최근 8부작 애니메이션 ‘푸른 눈의 사무라이’ 시즌2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공개된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17세기 일본 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일본인 어머니,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미즈가 악당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미즈는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한 혼혈 차별을 피하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푸른 눈’을 가리기 위해 삿갓과 노란 안경을 쓰고 다닌다. ‘아니메(애니메이션)’라 불리는 순수 일본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미국인이 각본을 쓰고 넷플릭스가 제작한 100% 서양산(産)이다.
작품 속 일본인들의 얼굴이 눈은 찢어지고, 코는 낮게 그려져 있어, 동그랗고 큰 눈에 흰 피부를 한 일본 아니메 캐릭터들과 구별된다. 이 때문에 오리엔탈리즘(서양이 편견을 갖고 동양을 폄하하는 것)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논란에도 “피 묻은 걸
작”(미국 디애틀랜틱) “2023년 최고의 넷플릭스 쇼”(포브스) 등의 극찬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하더니 시즌2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작품처럼 서양 콘텐츠 업체가 일본을 배경으로 만든, ‘일본풍(風) 서양산’ 작품이 유행하고 있다. 스토리까지 새로 창작한 ‘푸른 눈의 사무라이’와 달리, 과거 일본에서 한 차례 유행했던 만화나 게임을 원작으로 삼아 미국 자본으로 ‘2차 창작’하는 사례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19세기 중반 서양 미술계를 강타한 ‘자포니즘(Japonism)’이 부활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자포니즘은 19세기 유럽 등 서양 전반에 유행했던 일본 미술 양식을 일컫는다. 현대에 들어서도 꾸준히 영향을 미쳐왔다. 미국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의 대표작 ‘낙수장(Fallingwater)’은 집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바로 폭포에 닿는 독특한 설계로 유명한데, 일본 문화에 심취했던 그가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한 일본 건축 철학을 적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자포니즘이 21세기에 이르러 애니메이션·영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런 흐름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이 줄줄이 출격을 준비하고 있다. 할리우드에선 1982~1990년 연재된 오토모 가쓰히로의 SF 만화 ‘아키라’ 실사판 영화 제작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미래의 도쿄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1988년 만화를 기반으로 한 아니메로 만들어졌지만, 할리우드 실사판 영화화는 처음이다.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하고, ‘토르: 라그나로크’와 ‘조조 래빗’ 등을 연출한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13세기 원나라(몽골)가 일본 쓰시마(대마도) 정벌에 나선 때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게임 ‘고스트 오브 쓰시마(2020년 출시)’도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영화 ‘존 윅’ 시리즈로 유명한 채드 스타헬스키가 감독을 맡았다. 미 영화 매체 스크린랜트는 “게임을 즐겼던 수많은 서양 팬이 개봉일 확정을 고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자포니즘이 100여 년 만에 부활하는 모습에 대해 일본에서는 “19세기 우키요에의 역할을 21세기에는 아니메가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유럽 화가들이 일본의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에 매료돼 자포니즘을 전파한 것처럼, 서양에서 꾸준한 인기 몰이를 해온 아니메가 자포니즘 재유행의 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아스트로 보이(우주소년 아톰·1965년)’부터 ‘건담 시리즈(1979~)’, ‘죠죠의 기묘한 모험(1987~)’, 최근 ‘귀멸의 칼날(2019~)’ 등 독창성과 재미로 해외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작품들이 게임·OTT·모바일 등 플랫폼의 다양화와 맞물려 자포니즘의 부활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국내 전문가들도 이런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이현석 부산대 디자인학과 교수는 “일본 문화를 자신들의 스타일로 재창조한다는 점에서 자포니즘과 닮았다”며 “작품 배경과 캐릭터 디자인은 일본에 기반하되, 사운드와 장면 연출은 서양 방식을 따른단 점에서 새로운 장르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김도훈 영화 평론가는 “일본 콘텐츠를 좋아했던 과거 서양의 ‘덕후(마니아)’들이 기성세대로 자라 ‘서브컬처(하위 문화)’에 그쳤던 일본 콘텐츠도 주류 문화로 성장했다”며 “서양 콘텐츠 업체들도 이를 인지, 전략적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흐름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앞서 넷플릭스는 지난해 8월 회당 1800만달러(약 240억원)를 들여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 실사판 드라마를 제작해 흥행에 성공했다. 시즌2 제작도 확정됐다.
일본 내에서는 이런 현상을 반기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한류 열풍과 맞물려 일각에선 위기론도 일었던 ‘문화 강국 일본’의 지위를 확고히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감지된다. 일본 대중문화 매체 휴스타는 “해외에서 일본풍 콘텐츠가 유행할수록 일본 문화 업계도 성장한다”며 “새로운 서양 팬들이 일본산 작품으로도 옮겨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지난해 10월 개봉)’와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시리즈(2013~2023)’는 지난 8일 미국에서 열린 두 시상식(골든글로브·아스트라 티비 어워즈)에서 각각 장편 애니메이션, 최고 애니메이션 시리즈 부문을 수상했다.
한편 미 뉴욕과 함께 세계 공연 문화의 중심지로 꼽히는 영국 런던에선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이 현지 극단과의 합작 형태로 잇따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2022년 ‘이웃집 토토로’가 성공적으로 데뷔한 데 이어 4월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초연된다. 토니상을 받은 존 케어드가 연출을 맡았지만 공연은 일본어와 영어 자막 형태로 상연된다.
☞자포니즘(Japonism)
19세기 중반 서양 미술계에 유행했던 일본 양식을 말한다. 당시 서양 인상주의 화가들이 세계박람회 등을 통해 소개된 일본의 ‘우키요에(목판화)’를 보고 명쾌한 색감과 과감한 생략 등 독특한 화풍에 매료돼 따라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졌다.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등 거장들은 자포니즘에 심취해 작품에 기모노를 그려넣는 등 일본풍 요소를 가미하거나 자택에 일본식 정원을 짓기까지 했다. 20세기 들어 모더니즘이 유행하면서 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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