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경제협력, 미국과 안보협력…라이칭더 ‘두 토끼 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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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 선거 이후의 대만 행보
대만 총통선거가 라이칭더(賴淸德) 민진당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민진당이 차이잉원의 8년 집권에 이어 정권연장의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이번 선거는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으로 불리며 민진당과 국민당의 경쟁이 치열했고 제3당 민중당 커원저(柯文哲) 후보가 양당에 식상한 중도층을 파고들었다. 지난 2020년 선거에 비해 압도적 승리는 아니지만, 라이 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당 허우유이(侯友宜) 후보에게 한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았다. 민진당이 막강한 조직력과 중국의 후원을 받은 국민당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5월 20일 출범할 라이칭더 정부는 과연 어떠한 대내외 정책노선을 취할 것인가. 특히 초미의 관심사인 양안관계와 대미전략은 무엇이며 그것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어떠한가. 비록 주권국의 정부수반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대만 총통 선거(중국은 대만총통을 대만 ‘당국자’로 칭함)임에도 그 결과가 미칠 파장은 작지 않다. 이는 미중 패권경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대만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양안교류는 선택 아닌 대만인 생존문제
둘째, 국민당과 민중당의 단일화 실패로 보수, 중도 지지층이 분산되면서 남부는 물론 중북부 지역에서도 고르게 득표했다. 국민당이 선거 직전 민중당과의 연합정부를 제안하며 허우 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호소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유권자의 20%에 달하는 20~30대 청년세대는 경찰청장 출신으로 과거의 국민당 독재를 연상시키는 허우보다는 부드러운 이미지의 라이칭더를 선호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좌절 이후 크게 높아진 청년층의 투표율도 라이 후보에 유리했다.
셋째, 역대 대만 대선의 가장 민감한 쟁점이었던 통일·독립 문제에 유연하게 접근함으로써 민진당의 과도한 독립 이미지를 완화했다. 즉, 중화민국 수호를 강조함으로써 독립을 통한 대만공화국 수립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희석시켰다. 이는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의 집권이 양안의 전쟁과 교류단절을 초래한다는 국민당의 공격을 방어하는 동시에 독립 주장에 대한 중도층의 우려를 고려한 것이다. 특히 선거 직전 국민당 최고 원로인 마잉주 전 총통의 ‘시진핑을 믿어야 한다’는 발언(信習論)은 막판 지지율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라이칭더는 마의 발언이 ‘평화에 대한 환상’이며 진정한 평화는 국방력, 경제력, 민주 진영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공격했다. 국민당 어르신의 감 없는 말 한마디가 극도로 민감한 양안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서 민진당을 전폭 지원한 셈이다.
넷째, 민진당의 재집권을 바라는 미국의 지원은 라이 후보의 당선을 가능케 한 가장 큰 대외적 요인이다. 특히 라이 후보는 미국이 선호하는 샤오메이친(蕭美琴) 주미 대만대표처(TECRO) 대표를 부총통 후보로 영입함으로써 미국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반면 국민당은 유명 언론인 자오사오캉(趙少康)을 부총통 후보로 영입했지만 지지 확산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진정성 없는 화려한 언변만으로 유권자들을 현혹시키려 한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중국의 선거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미국의 거듭된 경고도 민진당의 승리에 일조했다.
대만처럼 국가정체성과 직결된 통일·독립 문제와 지역·출신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경우 대선은 많은 후유증을 남긴다. 더욱이 이번 선거는 어느 때보다 과열되었고 세 후보가 대결하면서 당선자의 득표율이 40%를 겨우 넘겼다. 동시에 진행된 113석의 입법위원 선거에서도 민진당이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따라서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산적한 난제를 해결해야 하는 라이 후보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둘째, 양안관계의 안정과 교류협력 확대 또한 라이 정부의 국정수행 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우선 양안의 정치적 관계 설정에서 라이는 ‘92 합의’의 핵심인 ‘일중각표(一中各表·하나의 중국에는 동의하되 각자 표기한다)’가 ‘하나의 중국’에만 경도되어 대만의 존재를 무시했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중국이 자신들의 실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중국 원칙만 강요할 경우 ‘92 합의’를 수용할 수 없으며 그와 연계된 ‘일국양제’도 거부한다는 기존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다만 라이는 선거 운동과정에서 독립보다는 정치 실체로서의 자주권을 강조한 것처럼 중국의 대응 여하에 따라 좀 더 유연하게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도 라이가 원하는 최소한의 ‘성의’를 모르지는 않는다. 한편 차이잉원 총통이 2024년 신년사에서 강조한 ‘양안의 건강하고 질서 있는 교류회복’은 라이 정부의 핵심 정책으로 승계될 것이다. 양안교류는 이미 정권 차원의 선택이 아니라 절대다수 대만인의 생존문제다. 경제상황이 예전 같지 않은 중국에게도 양안경협이 대만에 대한 일방적 시혜가 아니다. 다만 라이 정부로서는 중국이 경제를 무기삼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以商逼政) 상황을 늘 경계할 수 밖에 없다. 대만이 중국의 집요한 영향력 확대 시도를 방어하기 위한 ‘반침투법(反滲透法)’을 유지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일각 “대만해협보다 한반도가 더 위험”
셋째, 대미관계 발전은 대만해협의 평화적 현상유지, 국제적 생존 공간 확대와 직결된 라이 정부의 핵심 대외정책이다. 사실 양안의 현상과 미래는 미·중관계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라이 정부는 트럼프 변수 등 미국의 정치 상황을 주시하며 대미관계의 안정적 유지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물론 라이는 미국이 중국 견제 차원에서 대만을 이용할 뿐 독립을 지원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바이든은 라이 당선 축하와 동시에 대만 독립 불가를 못 박았다. 시진핑과 라이의 심기를 동시에 관리하는 것이다. 라이로서는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유지하면서 반도체, 기술 부문의 긴밀한 공조와 민주주의 연대를 유지하는 것이 최상이다. 또한 벼랑 끝에 선 국제사회의 생존 공간 수호를 위해 의회를 중심으로 미국 조야의 지지 확보에 주력할 것이다. 그에 맞서 라이의 당선 직후 대만의 몇 안되는 수교국의 하나인 나우루가 단교를 선언하고 중국과 수교한 것처럼 중국의 ‘총성 없는 대만 죽이기’는 더욱 거칠어질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라이 민진당 정부의 출범이 동북아와 한반도에 미칠 영향이다. 미·중이 좌우하는 대만 문제의 구조적 특성상 대만의 정권 변화가 곧바로 주변 정세에 미칠 영향을 크지 않다. 문제는 미·중 패권경쟁이 장기화되고 대만 문제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동요하는 경우 자의반 타의반으로 주변국이 연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2019년 이후 북·중 전략적 밀착과 북한의 잦은 무력시위에 대한 중국의 의도적인 방관은 대만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 최근 한·중, 한·러,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국면에서는 대만해협의 군사적 긴장이 한반도의 안보 불안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만해협보다 한반도가 더 위험하다는 대만 지인의 말을 농담으로만 여길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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