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죽음 후 자연에서 영원을 찾다, 겨울나그네 카스파 프리드리히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영감의 원천]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프리드리히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 ‘얼음 바다’(1823~24)를 보는 동시대 사람들의 평은 이랬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는 이 그림이 그림 속 북극 얼음과 함께 녹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악담을 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그전까지 나름대로 잘 팔렸지만 이 그림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지난 달 그의 탄생 250주년 대규모 회고전을 시작한 독일 함부르크 쿤스트할레(미술관)도 이 그림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간판 소장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서 250주년 회고전
프리드리히는 황량하고 신비로운 겨울 풍경을 많이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슈베르트 가곡 연작 ‘겨울나그네’ 음반 커버로 애용되곤 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의 ‘얼음 바다’는 그 중에서도 특히 파격적인 그림이다. 북극해를 떠 다니는 두꺼운 얼음판, 즉 부빙이 화면을 지배한다. 일부는 서로 부딪혀 쌓여서 뾰족한 산을 이뤘는데 그 날카로운 단면이 눈으로만 봐도 아리고 시릴 정도다. 오른쪽에는 부빙에 충돌해 엎어진 배가 보인다.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충돌 당시의 힘의 여파를 보여주지만, 충돌을 일으킨 배는 이제 무력하게 얼음에 삼켜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얼음 바다’가 한없는 절망을 나타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림의 초기 제목이 ‘희망 호의 난파’였던 것처럼, ‘희망’이라는 이름의 배가 빙산을 만나 좌초되고 회복 불가능하게 얼음장 밑으로 가라앉는 현실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 당시 프리드리히는 모처럼 자리가 난 드레스덴 아카데미 정교수직에 도전했지만 실패한 상태였다. 나폴레옹 전쟁(1803~15)이 끝난 후 독일 지역이 구체제로 회귀하려는 분위기에서 일어난 일이다. 프리드리히는 독일 지역을 침략한 나폴레옹에 반대했지만 자유주의 성향이었고 독일 지역이 나폴레옹 이전의 제후국 모임이 아닌 새로운 통일국가로 거듭나길 원했다. 그러나 보수반동적 분위기에서 독일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낭만주의 열풍은 시들어가고 본인도 승진에 실패했으니 그 암울함이 ‘얼음 바다’로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13살때 동생 사망, 죄책감·우울 평생 느껴
‘얼음 바다’가 프리드리히의 오랜 트라우마인 동생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13살 때 동생과 함께 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졌다. 하지만 정작 죽음을 맞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구하러 뛰어든 동생이었다. 그때부터 죄책감과 우울함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얼음 바다’를 다시 보면, 강의 얼음판이 깨지면서 발생한 프리드리히 어린 시절의 참사 현장 모습도 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또한 혼란스럽고 파괴적인 상태로 차갑게 얼어붙은 그림 풍경이 그날 이후 작가의 내적 감정의 풍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그림을 그렸을 때처럼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운 때에는 그 트라우마의 풍경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났으리라.
하지만 그림을 소장한 함부르크 미술관은 그림 상단에 무거운 회색 구름이 걷히며 푸른 하늘이 작게나마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미술관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초월을 암시함으로써 죽음 이후 영생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그러한 슬픔을 ‘유한한 나의 존재도 결국 시공간적 무한과 이어지는 자연의 일부 아닌가’라는 자연 일체 사상으로 털어낸다. 반면에 프리드리히는 서구인답게 신과의 결합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런데 그에게 신은 멀리 있지 않고 범신론(pantheism)적으로 자연에 깃들어 있다. 이것은 동생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 하던 소년 프리드리히가, 목사이며 시인인 코제가르텐을 만나 얻은 생각이었다. ‘신성함이란 자연을 통해 나타나며 자연에 대한 경험이 곧 신에 대한 경험이 된다’는 생각으로서, 이후 프리드리히의 예술과 삶을 평생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종종 산속에 교회가 있고 우뚝 솟은 침엽수와 교회 첨탑이 대구(對句)를 이룬다.
하필 프리드리히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그 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또다른 대표작 ‘바닷가의 수도사’(1808~1810)를 그렸다. ‘왜 인간은 죽어야 하고 사별해야 할까. 왜 인간은 이토록 작고 유한할까, 어떻게 무한과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은 가족의 죽음으로 가장 첨예해지기 마련이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이 말한 대로 이 그림에서 거대한 하늘과 바다, 그리고 조그만 수도사의 대조는 ‘무한히 거대한 만유의 신과 무한히 작은 피조물’의 극적인 대조를 보여준다.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음반 커버로 애용
이처럼 프리드리히는 현대의 미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화가로도 유명하다. 안개 낀 몽환적 풍경으로 유명한 한국의 이기봉 작가도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그림이 세상과 그림에 대한 내 생각을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프리드리히는 현대까지 꾸준히 다양한 방식으로 영감을 주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 유한과 영원의 관계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누구보다도 설득력 있는 숭고의 미학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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