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죽음 후 자연에서 영원을 찾다, 겨울나그네 카스파 프리드리히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2024. 1. 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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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원천]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프리드리히
카스파 프리드리히 '얼음 바다(희망의 난파)'(1823-24), 독일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소장 [사진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무슨 풍경화가 이렇게 차갑고 살벌해?”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 ‘얼음 바다’(1823~24)를 보는 동시대 사람들의 평은 이랬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는 이 그림이 그림 속 북극 얼음과 함께 녹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악담을 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그전까지 나름대로 잘 팔렸지만 이 그림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지난 달 그의 탄생 250주년 대규모 회고전을 시작한 독일 함부르크 쿤스트할레(미술관)도 이 그림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간판 소장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서 250주년 회고전

프리드리히는 황량하고 신비로운 겨울 풍경을 많이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슈베르트 가곡 연작 ‘겨울나그네’ 음반 커버로 애용되곤 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의 ‘얼음 바다’는 그 중에서도 특히 파격적인 그림이다. 북극해를 떠 다니는 두꺼운 얼음판, 즉 부빙이 화면을 지배한다. 일부는 서로 부딪혀 쌓여서 뾰족한 산을 이뤘는데 그 날카로운 단면이 눈으로만 봐도 아리고 시릴 정도다. 오른쪽에는 부빙에 충돌해 엎어진 배가 보인다.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충돌 당시의 힘의 여파를 보여주지만, 충돌을 일으킨 배는 이제 무력하게 얼음에 삼켜지고 있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겨울풍경 그림들을 사용한 슈베르트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앨범 커버들 [사진 아마존]
이 그림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은 인간의 도전을 압도하는 자연의 무한한 힘, 그것에 대한 공포와 경이로움, 즉 ‘숭고(sublime)’의 느낌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와 임마누엘 칸트 같은 철학자들은 ‘아름다움’과 ‘숭고’를 구분했는데, 쾌감만 있는 ‘아름다움’과 달리 ‘숭고’는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경탄의 쾌감과 두려움의 불쾌감을 동시에 수반한다고 했다. 그러한 숭고의 미학은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어떤 이들은 ‘얼음 바다’가 한없는 절망을 나타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림의 초기 제목이 ‘희망 호의 난파’였던 것처럼, ‘희망’이라는 이름의 배가 빙산을 만나 좌초되고 회복 불가능하게 얼음장 밑으로 가라앉는 현실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 당시 프리드리히는 모처럼 자리가 난 드레스덴 아카데미 정교수직에 도전했지만 실패한 상태였다. 나폴레옹 전쟁(1803~15)이 끝난 후 독일 지역이 구체제로 회귀하려는 분위기에서 일어난 일이다. 프리드리히는 독일 지역을 침략한 나폴레옹에 반대했지만 자유주의 성향이었고 독일 지역이 나폴레옹 이전의 제후국 모임이 아닌 새로운 통일국가로 거듭나길 원했다. 그러나 보수반동적 분위기에서 독일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낭만주의 열풍은 시들어가고 본인도 승진에 실패했으니 그 암울함이 ‘얼음 바다’로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얼음 바다'(1823-24)에서 유빙에 좌초해 난파한 선박 부분 확대

13살때 동생 사망, 죄책감·우울 평생 느껴

‘얼음 바다’가 프리드리히의 오랜 트라우마인 동생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13살 때 동생과 함께 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졌다. 하지만 정작 죽음을 맞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구하러 뛰어든 동생이었다. 그때부터 죄책감과 우울함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얼음 바다’를 다시 보면, 강의 얼음판이 깨지면서 발생한 프리드리히 어린 시절의 참사 현장 모습도 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또한 혼란스럽고 파괴적인 상태로 차갑게 얼어붙은 그림 풍경이 그날 이후 작가의 내적 감정의 풍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그림을 그렸을 때처럼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운 때에는 그 트라우마의 풍경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났으리라.

하지만 그림을 소장한 함부르크 미술관은 그림 상단에 무거운 회색 구름이 걷히며 푸른 하늘이 작게나마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미술관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초월을 암시함으로써 죽음 이후 영생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7~18). 독일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소장 [사진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과연 프리드리히의 다른 풍경화를 보아도, 일방적인 절망과 우울과 허무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그림에는 무한한 우주와 영원한 시간으로 이어지는 듯한 거대한 자연이 나타나고, 그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뒷모습도 종종 나타난다. 그의 또다른 대표작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거대하고 경이로운 자연을 볼 때 인간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인간 인식의 한계와 범속함을 뛰어넘는 것을 접하는 기쁨과 그것에 비해 인간이 너무나 작고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슬픔 말이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에는 그 복합적 감정이 깃들어 있다. 눈앞에서 동생을 허무하게 잃은 것 때문에 그에게는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슬픔이 더욱 사무쳤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와 누이도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그러한 슬픔을 ‘유한한 나의 존재도 결국 시공간적 무한과 이어지는 자연의 일부 아닌가’라는 자연 일체 사상으로 털어낸다. 반면에 프리드리히는 서구인답게 신과의 결합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런데 그에게 신은 멀리 있지 않고 범신론(pantheism)적으로 자연에 깃들어 있다. 이것은 동생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 하던 소년 프리드리히가, 목사이며 시인인 코제가르텐을 만나 얻은 생각이었다. ‘신성함이란 자연을 통해 나타나며 자연에 대한 경험이 곧 신에 대한 경험이 된다’는 생각으로서, 이후 프리드리히의 예술과 삶을 평생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종종 산속에 교회가 있고 우뚝 솟은 침엽수와 교회 첨탑이 대구(對句)를 이룬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산 속의 십자가 (테첸 제단화)'(1808), 독일 드레스덴 신거장회화관 소장 [사진 위키피디어]
프리드리히의 출세작 ‘산 속의 십자가’(1808)부터 그랬다. 교회 제단화로 그려진 것인데 참 파격적이다. 제단화의 십자가형 그림에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도, 제자들도, 로마 병사들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고독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위산 한가운데 우뚝 서서 푸른 전나무에 둘러싸여 일몰의 붉은 빛을 받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당시의 장면이라기보다 누군가의 명상 속에, 특히 대자연의 숭고에서 신의 숭고를 느끼는 이의 명상 속에 나타난 환영으로 보일 정도다. 이것을 보고 한 고전주의 평론가가 “제단 위에 풍경화를 슬그머니 올려놓은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했고 이에 낭만주의 평론가들이 반박하면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논쟁 덕분에 프리드리히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하필 프리드리히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그 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또다른 대표작 ‘바닷가의 수도사’(1808~1810)를 그렸다. ‘왜 인간은 죽어야 하고 사별해야 할까. 왜 인간은 이토록 작고 유한할까, 어떻게 무한과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은 가족의 죽음으로 가장 첨예해지기 마련이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이 말한 대로 이 그림에서 거대한 하늘과 바다, 그리고 조그만 수도사의 대조는 ‘무한히 거대한 만유의 신과 무한히 작은 피조물’의 극적인 대조를 보여준다.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음반 커버로 애용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1808-1810). 독일 베를린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 베를린 국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 중인 구본창의 사진 연작 '시간의 그림(시간의 초상)' 중 한 작품 (1998) [사진 구본창]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는 ‘바닷가의 수도사’와 무척 비슷한 구도와 느낌의 현대 예술작품을 지금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현대 사진 거장 구본창의 회고전에 나온 ‘시간의 그림(영어 제목은 '시간의 초상')’ 연작(1998~2001)이다. 언뜻 보면 황량한 바다 풍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본 교토의 오래된 절의 먼지 쌓인 회벽을 촬영한 것이다. 수평선 위 구름처럼 보이는 것은 오랜 세월의 흔적인 먼지들이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 또한 작가가 부친의 타계 후 상실감과 무력감으로 방황하다가 찍게 된 것이다. 혹시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를 염두에 두었는지 질문하니 작가는 “이 연작을 만들 때 직접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독일 유학 시절에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많이 보았고 그의 영원성에 대한 질문과 숭고의 미학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영감을 받아왔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프리드리히는 현대의 미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화가로도 유명하다. 안개 낀 몽환적 풍경으로 유명한 한국의 이기봉 작가도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그림이 세상과 그림에 대한 내 생각을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얼음 바다(희망의 난파)'(1823-24), [사진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줄리앙 샤리에르의 사진 ‘푸른 화석 엔트로피 이야기 Ⅲ’(2013). [사진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그래서 프리드리히 250주년 회고전을 열고 있는 함부르크 미술관은 그에게 영향 받은 현대 미술가들의 세션을 따로 마련하기까지 했다. 여기 나온 작품들 중에는 프리드리히의 ‘얼음 바다’ 및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와 모두 연결되는 줄리앙 샤리에르의 ‘푸른 화석 엔트로피 이야기’가 있다. 작가가 북극해의 빙산에 올라 8시간 동안 가스 토치로 발밑의 얼음을 녹이는 퍼포먼스를 한 것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다. “인간의 시간과 지질학적 시간의 대결이라는, 인간이 이길 희망 없는 싸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의 자연 개입으로 결국 인간이 먼저 멸망할 지구온난화를 풍자하는 작품이다.

이처럼 프리드리히는 현대까지 꾸준히 다양한 방식으로 영감을 주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 유한과 영원의 관계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누구보다도 설득력 있는 숭고의 미학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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