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첫 경험한 한반도 세대는 400년 전 나가사키 조선인?

2024. 1. 2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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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글와글, 와인과 글 〈끝〉
나가사키 ‘고려교’. 뒤로 보이는 건물이 이세노미야 신사다. [사진 손관승·위키피디아]
그 다리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일본 나가사키의 유명한 안경다리에 갔다가 실망하여 하천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인근 스와 신사 노면전차 정류장 방향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고려교(高麗橋)’라는 한자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일본어로는 ‘고라이바시’라 부른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아, 그렇다면 이곳은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들이 잡역에 종사하며 한군데 모여 살던 고라이마치(高麗町)라는 지역인가.

나가사키는 ‘작은 로마’라 불렸을 만큼 일본 천주교의 본고장이었던 덕에 이곳 조선인에 관해서는 서양의 몇몇 문헌이 남아있다. 『일본사』의 저자로도 유명한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1596년 “(조선인들은) 거룩한 신앙에 적합한 사람들로 인간미가 있고 친절했다. 성금요일 밤 조선인 신자들이 찾아왔다”고 기록했다. 예수회 출신의 다른 선교사가 로마에 보낸 연례 보고서에서도 조선인들은 힘들게 살면서도 스스로 돈을 모아 1610년 ‘성 로렌조 성당’을 건립했다고 증언하였다. 이 성당은 가톨릭 탄압이 시작될 때까지 약 10년간 조선인들의 구심점이었다. 일본 내 조선 순교자를 연구한 박양자 수녀에 따르면 일본에서 순교하여 복자로 시복된 205명 가운데 최소 10명은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동양인을 그린 루벤스의 1617년 그림. [사진 손관승·위키피디아]
여기서 포도주의 역할에 주목한다. 포르투갈인들은 배에 포도주를 싣고 와서 포교에 활용했는데, 일본인은 이를 ‘친타슈’(珍陀酒)라 불렀다. 포르투갈어로 붉다는 뜻의 틴토(tinto)의 일본식 발음 ‘친타’와 술(酒)을 뜻하는 ‘슈’를 합친 단어이니 레드와인이다. 조선인 신자들은 서양 포도주를 경험했던 최초의 한반도 세대라 생각된다. 포도주는 기독교에서 예수의 피로 해석되기에 그들에게 포도주 한 방울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준 생명수였으리라.

성 로렌조 성당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박양자 수녀는 고려교 앞에 있는 이세노미야(伊勢宮) 신사를 주목한다. 일본은 가톨릭교회를 없앤 자리를 전통 신사나 사찰로 대체하였기에 일리 있는 추정이다. 동네 지명도 훗날 이세마치(伊勢町)로 바뀐다. 고려교를 건너 신사 경내를 걷고 있는데 안개비가 내린다. 오래전 유행했던 “나가사키에는 오늘도 비가 내리네”라는 일본 가요 제목이 떠올랐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고 종교도 없지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개비는 400년 전 조선인이 흘린 눈물이었을까.

나가사키는 조선에서 끌려온 소년 안토니오 코레아의 운명을 바꾼 장소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아프리카와 남미 등 지구촌을 순회한 뒤 『나의 세계 일주기』라는 책을 메디치 가문의 페르디난도 대공에게 헌정하는데 그중 1597년 6월부터 1599년 12월까지 나가사키, 마카오 항해 기록의 일부를 옮겨보자. “일본군은 코레아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수의 남녀를 잡아다 헐값에 노예로 팔았는데 나도 다섯 사람을 산 후 인도의 고아까지 데리고 가서 자유인으로 풀어 줬다. 그중 한 사람을 피렌체까지 데려와 지금은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살고 있다.”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의 식탁. 연회를 위한 포도주잔이 보인다. [사진 손관승·위키피디아]
안토니오 코레아, 그는 누구인가? 아쉽게도 더 이상의 상세한 기록은 없어서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출신 계급도 분명하지 않다. 한때는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의 주인공과 동일시되었지만, 명나라 사람이라는 반론이 학계에서 제기됐다. 논란과 관계없이 안토니오 코레아는 문헌에 나타난 유럽 땅을 밟은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피렌체를 다스리던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안토니오 코레아는 나중에 로마에서 활동하였기에 그가 유럽에서 와인을 만난 최초의 한국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르네상스가 꽃피던 도시 피렌체에서 토스카나 지역의 유명한 키안티 와인을 마시고, 로마에서는 근교 캄파냐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도 접하지 않았을까? 피렌체의 골목길을 심부름 다니고 교황청 근처를 걷다가 문득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안토니오 코레아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에게 와인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와 이국적인 것이 뒤섞인 음료였을 거다.

포르투갈인과 가톨릭이 나가사키에서 추방된 뒤 그 공백을 차지한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상관(商館)이 있었던 작은 인공섬 데지마를 둘러보던 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대형 식탁이다. 일본 관리가 오거나 멀리서 배가 들어왔을 때 환영 만찬이 열리던 곳이다. 포크·나이프 등 서양식 식기들 사이로 빵과 붉은 포도주가 담긴 잔이 보인다. 하멜 일행이 13년 만에 탈출해 데지마의 동료들 품에 안겼을 때도 연회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다. 포도주잔을 들며 ‘프로스트’ 건배를 외치던 하멜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때 와인은 자유였다.

앞서 1653년 태풍으로 제주도에 난파한 하멜의 상선에서 발견된 포도주의 최종 목적지도 데지마였다. 『하멜표류기』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다친 동료들에게 붉은 포도주는 매우 유용하였다.” 포도주는 비상식량 혹은 약품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하멜 일행을 잡으러 온 제주도 관리에게 동인도회사(VOC) 로고가 새겨진 은잔에 포도주를 따라 건넨다. “그들은 포도주를 맛보더니 좋은지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는데 나중엔 대단히 기분이 좋아져서 우리를 잘 대해주었다.” 서양인이 와인을 건네는 한반도 최초의 장면이며, 소통 수단으로서 와인의 힘을 발견한다. 나눌수록 가치가 커지는 와인의 묘미다.

이렇듯 와인은 문화 생산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도주에 담긴 이야기의 힘이다. 포도가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쳐 포도주로 거듭나듯, 팬데믹이라는 고난의 시기를 잘 이겨내면 빈티지 인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소망에서 와인과 글의 만남 ‘와글와글’ 시리즈는 시작되었다. 지난 4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한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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