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인아]꽃길만 걸으라는 덕담에 대해
‘애써보자’는 말 대신 ‘애쓰지 마’ 권하는 사회
꽃길 아닌 다른 길에 있는 행복 놓치지 않길
아기에게도 시간이 약이었을까. 이젠 얼추 적응된 것 같은데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기의 팔꿈치가 까져 있었다. 넘어져 다친 거였는데 이때 이 엄마의 말이 압권이었다. “괜찮아. 살다 보면 넘어져.” 대개 부모들은 ‘내 새끼’가 조금이라도 힘들까 노심초사한다. 나는 고생했어도 너는 행복하게 살라며 꽃길만 걷게 해주려 한다.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꽃길만 걸으면 행복할까? 마른 땅만 밟다 가는 인생이 행복일까?
언젠가 사주를 본 적이 있다. 긴장한 얼굴로 풀이를 기다리던 나는 맥 빠지는 소리를 들었다. 내 팔자가 좋지 않다는 거다. 어째서 그런지 이유를 물으니, 늘 노력해야 하는 팔자라 그렇다고 했다. 팔자가 좋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뭐가 생기고 되는데, 나는 마른 땅이 물을 찾듯 계속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럼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느냐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안 되지는 않으나 항시 노력하고 수고해야 이루는 팔자라는 말이었다. 그 얘기를 듣던 나는 한껏 방자한 심정이 되어 속으로 ‘흥!’ 했다. 노력해도 안 된다면 모를까 애써서 성취하는 게 왜 나쁜 팔자냐고 들이대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그건 그분의 세계관, 아니 옛사람들의 세계관이 그런 거니까.
평생 말과 글을 재료 삼아 일하고 살아온 나는 우리가 즐겨 쓰는 말을 붙잡고 골똘히 들여다볼 때가 있다. 힘들다는 말도 그중 하나인데, 사전을 찾아보면 어렵거나 곤란한 상태를 뜻한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힘든 건 나쁜 것이니 피해야 하는 걸까? 편한 게 좋은 것이니 다 편한 걸 추구해야 하나? 이 생각이 합리적이라면, 의도적으로 근육에 상처를 내며 하고 나면 여기저기가 결리고 힘든 운동은 왜 하는가? 어려운 수학 공부는 왜 하며, 뜻도 이해하기 어렵고 재미도 그다지 없는 고전은 왜 읽는 걸까? 낯선 나라로 유학은 왜 가며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은 창업은 왜 하는가? 아니, 거창한 얘기를 할 것도 없다. 당장 집 나가면 고생인데 ‘여행 따위’는 대체 왜 좋아하는 것인가? 도전은 왜 하며 혁신은 왜 하는가?
2017년에 출간된 김승섭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약자를 대하는 방식이 온당한가를 말하기 위해 쓴 문장이지만 나는 다른 뜻도 읽었다. 매일 그 사회의 공기를 호흡하며 사는 사람들에겐 또한, 그때 그 사회를 지배하는 세계관과 관점이 스며들어 영향을 주기 마련이라는.
요사이 우리 사회엔 ‘뭔가를 잘해 보자, 애써 보자, 도전해 보자’ 같은 말들은 잘 들리지 않고 ‘애쓰지 마. 힘든데 뭐 하러 해’ 같은 말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좀 안타깝다. 그리고 우리가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이 괜찮은가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진다. 행복은 언제 어떻게 오는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할 능력이 없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행복이 꼭 힘들지 않은 편안한 상태나 꽃길만 뜻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토스의 이승건 대표는 작년 봄에 출간된 나의 책에 추천사를 써주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창업을 준비하던 시절, 미래는 계속 불확실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했는데 행복한 몰입이었다고. 이 문장을 읽으며 행복이란 꽃길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굳혔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먼바다로 나가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경험을 하고 풍광을 마음에 담으며 살아 있다는 짜릿함, 행복을 맛본다. 그러니 당신도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 힘들다는 건 꼭 피해야 하는 나쁜 일인가에 대해. 그리고 정말 행복하고 싶다면 꽃길 외에 다른 길도 찾아보면 좋겠다. 지금껏 생각해 보지도 못한 방식으로 행복을 만날지도 모르니.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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