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나의 소명은

2024. 1. 19.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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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자 수녀원을 뛰쳐나온 老수녀
남은 인생의 소명 스스로 찾고 선택

노먼 에릭슨 파사리부, ‘아드 마이오렘 데이 글로리암’(‘대체로 행복한 이야기들’에 수록, 고영범 옮김, 알마)

새해에 꿈을 꾸었다. 나는 평균대 위에 서 있었다. 내가 이걸 넘는 방법을 알고 있나? 아래를 내려다보니 망망대해였다. 제대로 넘지 못한다면 바다로 떨어져 버릴 터였다. 바다 위의 평균대라니. 며칠이 지나도록 꿈에서 본, 드넓은 바다 위의 평균대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조경란 소설가
한평생 신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한 툴라 수녀는 이제 은퇴자 수녀원에서 남은 생을 보내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툴라 수녀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그곳을 몰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웃 주택 단지를 돌아다니다가 다음엔 버스를 타고 구경할 사람도 물건도 많은 쇼핑몰로. 은퇴자 수녀가 수녀원을 빠져나가 일탈을 한다고? 첫 단락을 읽고 의아함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이내 이해하게 될 것이다. 툴라 수녀가 이곳에서 육 개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알게 되어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보호하는 일을 해왔던 룸메이트 로라 수녀는 여기서는 제 옷을 빠는 일에서도 배제돼 있어 거의 죽은 것과 같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툴라 수녀는 수학 선생으로 학교에서 일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고 지금도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은퇴 수녀들에게는 아무 일거리도 주어지지 않았고 고독한 상태만 넘칠 뿐이었다. 동료 수녀가 잠을 자던 중 사망하고 “우리한테 소명이 있다면, 우리가 그걸 해낼 수 있다고 느끼는 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던 로라마저 수녀원을 떠나버리자 툴라는 거울에 비친 여자를 본다. 너무나 늙고 너무나 쓸모가 없어 보이는 여자를.

어느 날 쇼핑몰에서 한 아이가 툴라에게 뛰어와 할머니 그동안 어디 있었냐며 보고 싶었다고 치마를 잡고 운다. 아이 아버지 요하네스는 심장병이 있는 아이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할머니의 죽음을 숨기고 있었다. 요하네스는 그날 몇 번이고 툴라에게 말했다. 아이를 찾아줘서 정말 감사드린다고. 감사하다는 말, 오래 들어보지 못한 말이 툴라의 깊은 곳에 가 닿았다. 상담 시간에 만났던 나니 자매는 “장기적인 목표를 가져야 단기적인 실패 때문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고 툴라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아직 내가 필요할지도 몰라. 툴라는 수학 선생으로 일했던 학교에 찾아갔다. 학생들은 모두 그녀를 기억했지만 그녀 없이도 잘 지내고 있었다. 툴라는 적어준 주소를 들고 요하네스의 집으로 간다. 아이가 잠든 후 요하네스는 툴라에게 할머니 남편은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분은 주인이라고,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관심이 없다고 툴라가 말한다. 요하네스는 의아하다는 듯 다른 가족, 어머니에 관해 묻는다. “어머니는 내 남편을 낳았죠.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불러요.” 툴라가 수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요하네스는 농담을 들은 듯 웃는다. 심장병을 앓는 아이, 소외자 남성, 살아보지 못한 소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진 여성. 세 사람은 이렇게 모였다.

조심하느라 도서관에도 가보지 못했다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 툴라는 같이 책을 읽었다. 보름에서 한 달 정도 살지만 특정한 조건이 갖춰진 실험실에서는 더 오래 살 수도 있다는 집파리 이야기도. 툴라는 방과 후에 서배스천을 돌봐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요하네스의 깊은 눈을 들여다본다. 그 눈동자에 파리 두 마리가 비치는 것 같다. 특정한 조건이 갖춰진 실험실에서 살고 있는 듯한 서배스천과 자신. “하지만 실험실에서 사는 삶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툴라는 속으로 말한다. 파리야 저 넓은 세상으로 멀리 날아가렴.

나는 이 단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부여받은 첫 번째 소명을 최선을 다해 이수한 사람이 스스로 찾고 선택하는 두 번째 소명에 관한 이야기로 다가와서. 1월에는 아무래도 나의 소명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인도네시아 작가 노먼 에릭슨 파사리부의 외우기 어려운 이 단편의 제목은 “신의 더 큰 영광을 위해”라는 뜻이라고 한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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