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아닌 운동장에서 벌어진 ‘3·1운동’?...발칸 반도의 불씨된 그 ‘싸커킥’[올어바웃스포츠]

류영욱 기자(ryu.youngwook@mk.co.kr) 2024. 1. 19.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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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카타르 아시안컵 조별리그 첫경기인 바레인전을 앞두고 팀포토를 찍는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 <출처=연합뉴스>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은 최근 ‘2024 카타르 도하 아시안컵’ 첫 경기에서 복병 바레인을 상대로 쾌승을 거두고 64년만의 아시안컵 탈환이란 목표를 위한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아시안컵은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축구 강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서아시아의 강호들이 한데 모이는 아시아의 축구 축제입니다. 그런데 이 축제에 보이지 않는 나라가 한 곳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카타르와 같은 아라비아반도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아닌 유럽축구연맹(UEFA)에 속해 있습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와 도하는 사이의 거리는 1339km로, ‘도하-서울’ 사이(7103km)에 비하면 코 앞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3회 아시안컵(1964년) 우승팀을 차지하고 1974년까지 AFC 소속이었던 이스라엘이 UEFA에 몸담고 있는 것은 국가간 분쟁이 스포츠까지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서아시아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경기를 거부하고 AFC에 정치적 압력을 넣어 결국 이스라엘을 제명하기까지 이릅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오세아니아축구연맹(OFC), 남미축구연맹(CONMEBOL)과 UEFA 등 전세계 대륙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에 출전하며 ‘축구판 디아스포라’를 겪게 됩니다.

스포츠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입니다. 특히 전세계인이 즐기는 축구는 국가간 분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평화의 단초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회원국이 세계연합(UN)보다 많은 것이 이를 상징하지 않나 싶습니다. 현대사 곳곳에서 보이는 축구가 부른 ‘전쟁과 평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그깟 공놀이’가 선전포고가 된 이유는? 3000명 목숨을 앗아간 전쟁의 시작이 된 결승골
페루-베네수엘라의 월드컵 지역 예선 경기가 끝난 뒤 대치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축구국가대표팀과 페루 경찰 <출처:Gettyimage>
지난해 11월 남미의 앙숙 베네수엘라와 페루 사이에 축구경기를 놓고 국가 수뇌부간 비난이 오가는 외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두 나라 대표팀은 페루 리마에서 2026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 경기를 치렀습니다. 두 팀은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승점을 나눠가졌지만, 본격적인 대결은 정규시간이 끝난 뒤 이뤄졌습니다. 베네수엘라 대표팀은 경기를 마치고 페루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경기 종료 후 경기장을 찾은 자국 팬들에게 유니폼을 선물하기 위해 관중석을 향하자 현지 경찰이 막아선 뒤 곤봉으로 폭행했다는 내용입니다. 충돌은 장외에서도 벌어졌습니다. 베네수엘라 선수단의 귀국 비행기에 급유가 되지 않아 선수단이 5시간동안 공항에서 발이 묶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 베네수엘라 정부는 “복수를 위해 우리 대표팀은 납치한 것”이라고 외교 채널을 통해 비판했습니다.

페루 정부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하며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난 듯 했지만, 니콜라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불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는 페루가 “인종차별적인 정치에 의한 외국인 혐오증을 조장하고 있다”고 사건을 확대했습니다. 호르헤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국회의장 역시 사건을 대표팀과 자국 팬들에 대한 공격과 외국인 혐오로 단정지으며 비판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사실 두 나라는 근년간 축구 외적인 문제로 긴장관계에 놓였습니다. 베네수엘라 경제의 파탄으로 150만명의 베네수엘라인들이 페루로 ‘탈출 러시’를 감행했고, 페루에선 대규모 이방인 세력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이곳저곳에서 원주민과 이주민간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가운데 남미 대륙이 ‘미쳐있는’ 축구가 불을 댕긴 것입니다. 심지어 자국 경제가 엉망인 베네수엘라가 남미 예선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이주민들을 돌보고 있는 페루가 최하위로 처진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상황이었습니다. 페루 역시 이웃국가가 곱게 보일리 없는 것이지요.

축구로 인한 갈등이 총칼을 든 전쟁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사이의 ‘축구 전쟁’이 그것입니다. 시작은 1960년 6월 ‘1970 멕시코 월드컵’ 예선이었습니다. 6월 8일 온두라스는 자국에서 열린 1차전에서 1-0으로 신승을 거둡니다. 이 경기에서도 팬들간 충돌이 있었지만 중남미에서 으레 벌어지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엘살바도르는 홈경기에서 3-0으로 승리하며 양국간 긴장감이 고조됩니다. 특히 엘살바도르에서 한 소녀가 1차전 패배 이후 충격을 받고 권총으로 자살하고,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소녀의 장례식이 참가하며 전국적인 추모물결이 일고, 온두라스에 대한 반감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FIFA는 두 나라간 3차전을 멕시코에서 치르도록 하고, 경기장엔 수 만명의 경찰들이 충돌을 막기 위해 배치됐습니다.

‘축구전쟁’으로 폐허가 된 온두라스의 마을 <출처: DIFESA>
3차전 결과는 3-2. 엘살바도르의 승리였습니다. 경기 직후 분노한 온두라스인들이 자국에 있는 엘살바도르인들에 대한 집단 폭행을 벌이는 등 난동이 벌어졌고, 엘살바도르는 3차전이 열린 당일 온두라스와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릅니다.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진 것은 양국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가입니다. 영토는 온두라스가 5배 더 컸지만, 인구는 당시 230만명대 300만명으로 엘살바도르가 더 많았습니다. 특히 엘살바도르 토지 대부분은 소수의 고위층이 과점하고 있었고, 엘살바도르인들은 땅과 일자리는 찾아 국경을 넘어 온두라스에서 터를 잡고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약 30만명의 엘살바도르인들이 국경 인근을 점유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온두라스 정부는 엘살바도르인들은 추방하기 시작했고, 엘살바도르 역시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고 좁은 엘살바도르로 다시 몰아넣는 온두라스에 대한 반감이 심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즉 양국간 축구경기 전 전쟁발발을 위한 모든 재료가 모여있었단 것이죠.

그리고 그해 7월 14일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에 전투기를 투입하면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예선 2차전 이후 1만명이 넘는 엘살바도르인들이 탄압을 못이겨 온두라스를 탈출했는데, 이것이 온두라스 정부의 묵인 하에 이뤄졌다는 명분이었습니다. 온두라스 역시 공군을 중심으로 반격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은 100시간만에 끝납니다. 두 나라 합쳐 3000명이 넘는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일었고, 30만명의 엘살바도르 이주민들이 환영받지 않은 귀국을 하게 됩니다.

축구가 전쟁의 도화선이 된 충격적인 사건을 놓고 FIFA는 화들짝 놀랍니다. 이후 월드컵 예선 규정을 바꿔 분쟁이 있는 국가간 최대한 대결을 피하도록 하고, ‘3차전 폐지 및 골득실로 인한 승부결정’ 등 예선 규정까지 바꾸기까지 합니다.

공이 아닌 경찰을 향한 주장의 ‘킥’은 유럽의 화약고에 불씨가 됩니다
크로아니타 독립운동의 상징이 된 디나모 자그레브의 즈보니미르 보반의 ‘그 발차기’ <출처=BabaGol ‘X’>
발칸반도에서는 축구가 나라 독립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1990년 발칸반도는 국가, 인종, 종교가 뒤섞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 맹주인 소련은 흔들리고 있었고, 이에 유고 연방 소속이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에선 독립주의 정당이 지지세를 얻으며 독립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연방의 주도권을 쥔 세르비아는 독립 열기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요.

이가운데 1990년 5월 크로아티아의 디나모 자그레브와 세르비아의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츠르베나 즈베즈다)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경기를 갖게 됩니다. 크로아티아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독립주의 정당이 과반을 차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지요. 세르비아의 과격한 응원단 약 3000명이 크로아티아에 도착하는 순간, 충돌은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경기 전부터 소규모 충돌을 빚던 양측 응원단이 경기장에 들어서자 대형 사고가 벌어집니다.

세르비아 응원단은 “디나모는 세르비아인이다”며 홈팬들을 자극하는 구호를 연일 외쳤고, 홈팬들은 원정팀의 배너를 철거하고 그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양측은 곧이여 육탄전으로 돌입했습니다. 결국 경기는 취소됐고 상황은 소요사태로까지 커집니다. 여기에 진압을 위해 투입된 경찰들이 세르비아인들이 많았다는 것이 문제를 키웠습니다. 경찰들은 크로아티아 응원단을 강하게 진압하고, 보다못한 디나모의 주장 즈보니미르 보반은 폭력적인 진압을 일삼고 있던 경찰에게 킥을 날리기까지 합니다.

이 소요사태는 ‘전쟁을 이끈 축구경기’로 불리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이 사건은 끌어오르던 독립 열기에 기폭제로 작용했고, 부당한 공권력을 응징한 보반은 크로아티아 저항의 상징으로 치켜세워집니다. 이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충돌은 곧 5년간의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고, 14만명이 목숨을 잃는 결과를 나타납니다.

경기가 벌어진 막시미르 스타디움 인근엔 이 폭동을 기념하는 공간이 조성돼 있습니다. 이 기념관의 비문에는 ‘1990년 5월 13일 이 땅에서 세르비아와 전쟁을 시작한 클럽 팬들에게’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넬슨 만델라를 키운 남아공 감옥의 ‘챔피언스리그’...“관용과 포용, 화해의 상징된 축구”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대통령의 사인이 담긴 공을 들고 있는 로벤섬 전 수감자들과 FIFA 관계자들 <출처 : AFP>
다행히도 어떤 축구는 통합과 고난 극복을 위한 치유제와 상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지독한 흑백분리 정책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마카나 축구협회’ 이야기입니다. 196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범 수용소 로벤섬은 분열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와 범아프리카회의(PAC) 등 정치노선에 따라 수감자들끼리 나뉘어있었고, 아파르트헤이트(극단적 인종분리 정책)를 포기하지 않는 남아공 지도세력을 이겨낼 화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섞일듯 섞이지 않은 정치범들을 어우러지게 만든 것은 축구공이었습니다. 고된 노동과 폭력에 지쳐있던 수감자들은 셔츠를 둥글게 뭉쳐 공을 만들어 축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아가 수감자들은 교도소에 축구 리그를 만들어 운영할 수 있게 줄기차게 요구했습니다. 당초 이같은 요구를 일축했던 교정당국은 끊임없는 수감자들의 간청과 점점 강해져오는 국제사회의 인종차별 철폐 압력에 못이겨 이를 허락합니다. 이에 1966년 수감자들로 이뤄진 축구리그인 ‘마카나 축구협회’가 설립됐습니다. 마카나는 로벤섬에 수감된 바 있던 영웅적인 정치범의 이름이었습니다. ‘마카나 리그’는 단순히 수감자들의 운동요구를 푸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1400여명의 수감자중 선수와 매니저, 심판, 코치가 각자 역할이 있었고 3개의 리그는 교도소에 몇 없는 책중 하나인 ‘FIFA’ 규정집에 의해 운영됐습니다. 향후 남아공 국토부 장관을 역임했던 토쿄 섹시웰레는 “경기는 90분이었고 경기장은 특정한 모양과 크기를 준수해야 했습니다. 골대는 정확히 같은 거리에 있어야 했고, 선수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옷을 입었고 팀들간 옷색깔을 통해 구분되지 않으면 안됐습니다”며 마카나 리그의 엄격함을 설명했습니다.

수감자들은 가혹한 환경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공간을 지켜냈고, 기본적인 민주적 조직 형태까지 만들어냈습니다. 실제로 당시 마카나 리그에 참여했던 정치범은 넬슨 만델라가 구축한 새로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이끌어 갔습니다. 제이콥 주마 전 남아공 대통령은 한 팀의 주장이자 심판이었습니다. 남아공 헌법재판소 부소장이었던 딕캉 모센케는 마카나 축구협회의 규정을 작성하고 의장을 맡았습니다. 선수중 한명이었던 스티프 추웨테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후 첫 스포츠 장관이 됐습니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도 로벤섬에 있었습니다. 그는 27년의 수감생활 중 18년을 로벤섬에서 보냈죠. 다만 교정당국은 만델라와 같은 유명인들이 경기를 관람하거나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축구가 만든 화합은 새로운 남아공을 연 만델라에게도 영감을 줬습니다. 톰 우드하우스 브래드포드대 명예 교수는 “넬슨 만델라는 이경험을 통해 동기를 부여하고 영감을 주는 스포츠의 힘을 깨닫게 됐다”며 “새로 해방된 남아공 대통령으로서의 흑백인종 사이의 화해를 촉진하기 위해 스포츠를 활용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만델라는 새로운 남아공은 세계의 알리는 자리였던 1995년 남아공 럭비 월드컵 당시 남아공 대표팀의 백인 주장인 프랑수와 피에나르의 유니폼을 입으며 남아공에서 흑백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FIFA는 2007년 8월 10일 ‘마카나 축구협회’에 명예회원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이날 넬슨 만델라의 89번째 생일 행사가 열리는 것을 기념한 것이었지요. 만델라는 “로벤 섬의 마카나 축구협회는 수감자들에게 관용과 포용, 화해의 가치를 수호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는 모두 축구로부터 배웠다”...축구가 평화의 주춧돌이 될 수 있을까
‘축구전쟁’을 일으킨 엘살바도르-온두라스의 3차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마우리시오 로드리게스 <출처:인디펜던트 >
《이방인》으로 유명한 작가 알베르 카뮈는 “공은 항상 내가 예상한 방향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건 내가 훗날 공정하지 않는 프랑스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을 줬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결핵에 걸리기 전까지 뛰어난 골키퍼였던 알제리 이민자 출신 프랑스인 카뮈의 경험에서 우러난 발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카뮈의 말처럼 역사속의 한 경기, 한 골이 미치는 파급력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엘살바도르의 결승골을 넣은 마우리시오 로드리게스는 “우리가 몰랐던 것은 온두라스전 승리의 의미와 골의 역사적 중요성, 즉 그것이 전쟁의 상징으로 사용될 것이란 거였습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축구공의 방향이라면 전쟁을 부르기보단 평화의 주춧돌이 되는 곳을 가리켰으면 합니다. 불세출의 공격수 디디에 드로그바가 자국 코트디부아르 내전을 종식한 것처럼, 최근 들어 잦아지고 있는 세계 곳곳의 분쟁이 종식되는데 스포츠가 일조하는 일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카뮈는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배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군화 대신 축구화를 신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평화가 한층 더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문헌과 외신> ◎https://en.wikipedia.org/wiki/Israel_Football_Association ◎https://bnnbreaking.com/sports/football-fallout-venezuela-peru-diplomatic-dispute-over-world-cup-qualifier/ ◎https://www.bbc.com/news/world-latin-america-48673853 ◎https://en.wikipedia.org/wiki/Dinamo%E2%80%93Red_Star_riot ◎https://thefalse9.com/2016/04/dinamo-red-star-boban-riot.html ◎https://www.icip.cat/perlapau/en/article/more-than-a-game-sport-and-conflict-resolution/ ◎https://www.nytimes.com/2010/07/06/sports/soccer/06robben.html?_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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