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다던 은행 직원 믿었는데…아들 수술비 날릴 판”
노후자금 잃고 재산 반토막…‘불완전판매’ 성토하며 “원금 보상하라”
확정 손실액 1300억대…올해 15조원대 만기 도래 ‘비상’
(시사저널=정윤경 기자)
"은행원도 잘 모르는 고위험 상품 왜 파는가"
"대통령과 여야 의원들은 피해자를 외면하지 말라"
19일 오후 1시께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 앞이 '성토'와 '규탄' 목소리로 가득 찼다. 금융당국과 은행권을 향해 울분을 토해낸 이들은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상품 가입자들로 '처참한 손실' 앞에 참담함을 드러냈다.
지난해 12월15일 1차 규탄 집회 후 약 한 달 만에 다시 모인 350여 명(주최 측 추산)의 가입자들은 불완전 판매 의혹에 대한 시중은행의 원금 보상과 사과를 요구했다. 이들은 '불완전판매', '원금 전액 보상'이라고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불완전판매 해놓고서 고객책임 웬 말이냐'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결의문을 낭독한 김아무개씨는 "1차 집회 이후 약 한 달의 시간이 흘렀는데 시중은행의 태도는 미온적이고 정부와 금융당국의 전수조사는 속도가 더디기만 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은행에서 이용자의 투자 성향을 바꿀 정도면 시중은행도 당연히 위험한 상품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제대로 된 설명도 없었다"며 "은행이 다시는 이런 고위험 상품을 팔 수 없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다.
"스물넷 딸 명의로 투자한 1억5000만원…반 토막 날 처지"
이날 집회에 참석한 홍콩H지수 ELS 가입자들은 시중은행이 원금 손실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이아무개(50대·여)씨는 3년 전 딸 A씨(24) 명의로 홍콩H지수 ELS에 1억5000만원을 투자했다. 이씨는 시사저널과 만나 "가입 당시 직원이 '저금리 시대에 이런 좋은 상품이 없다. 은행이 망하지 않는 한 안정성이 보장되고 한 번도 손실이 난 적 없다'고 했다"며 "서명과 녹취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는 직원의 말만 믿고 시키는 대로 동의서에 체크한 죄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청각장애 아들이 크면 수술비로 쓰려고 딸과 내가 힘들게 모은 돈인데 반 토막 날 처지"라면서 "딸은 이 사건으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원형탈모까지 왔다"고 호소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평생 모은 돈을 잃게 생겼다는 정아무개(50·여)씨는 "직원이 '원금 보장을 받을 수 있고 절대 위험한 상품이 아니다. 나도 가입했다'고 하길래 걱정이 안 됐다"면서 "원래 한문으로만 서명을 하는데 투자 성향 분석표를 받아보니 서명하는 곳에 도장·이름·한문 세 개가 혼재돼 있었다. (내가 하지 않은 서명이 발견되는 등) 위조된 부분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2억을 투자했는데 지금은 9000만원 남짓"이라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조금씩 모은 돈인데 이제 어떡하나"고 울먹였다.
"노후자금 은행에 사기 당해"…올해 15조 만기도래 '시한폭탄'
이날 집회에는 노후자금을 잃게 됐다는 고령 가입자도 상당수 있었다.
3년 전 홍콩H지수 ELS에 가입한 이아무개(67·남)씨는 "그때 금리가 연 1%도 안 될 때인데 (은행에서) 원금 손실 없이 이자를 연 3% 보장해 준다고 했다"며 "노후자금을 은행에 다 사기당하게 생겨서 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들한테 얘기하니 난리가 났다. 이제 몸이 아파서 자영업도 관뒀는데 어떡하나"라고 성토했다.
집회에 참석한 고령 가입자들은 시중은행을 감독하는 금융당국의 책임을 규탄하며 '삭발 투쟁'을 하기도 했다. 고령의 여성 가입자 2명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삭발식에 나섰다.
은행권에 따르면, 5대 은행(국민‧신한‧NH농협‧하나‧우리)이 판매한 홍콩 H지수 ELS 상품에서 지난 12일까지 1067억원의 원금 손실이 발생했다. 원금 2105억원 가운데 1038억원만 상환된 것으로 전체 손실률이 50.7%에 달한다.
미래에셋증권‧NH투자증권 등 증권사가 판매한 홍콩 H지수 ELS도 지난 9일까지 150억원의 손실이 났다. 지난해 하반기 확정된 손실액을 합하면 관련 상품의 총 손실액은 1300억원대에 이른다.
이 같은 대규모 손실은 국내에서 ELS 상품이 판매된 2021년 이후 홍콩H지수가 반토막 난 데 따른 것이다. 홍콩H지수는 홍콩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 가운데 50개 종목을 추려서 산출하는 지수로 변동성이 높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손실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란 데 있다. 지난해 11월15일 기준 홍콩H지수 기초 ELS 총판매 잔액은 19조3000억원으로 전체 잔액의 79.6%인 15조4000억원 상당의 만기가 올해 도래한다.
은행권은 손실을 입거나 손실이 예상되는 가입자들의 반발에 대해 홍콩H지수 ELS 판매 과정에서 가입 상품의 위험 등급이나 원금 손실 가능성 등에 대해 고객으로부터 자필, 녹취를 통해 확인을 거쳤다는 입장이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故 이선균 ‘마약 의혹’ 최초 제보자, ‘배우 출신’ 그녀였다 - 시사저널
- “예쁘게 생겼네”…버스 옆자리 10대女 추행한 60대, 성범죄자였다 - 시사저널
- ‘복날’이라 개고기? 이제 ‘불법’입니다 - 시사저널
- ‘전쟁’ 외치는 김정은…총선 전 ‘新북풍’ 불까 - 시사저널
- ‘다방 연쇄살인 피해자’ 하루만 빨랐어도 살릴 수 있었다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 시사저널
- 우울증 환자 ‘年 100만 명’ 시대…미리 예방하려면 어떻게? - 시사저널
- ‘오늘도 폭식했네’…식단 조절, 쉽게 하려면? - 시사저널
- 재벌은 망해도 3대는 간다? 균열 커지는 ‘한국식’ 오너 경영 - 시사저널
- 확 달라진 《미스트롯3》 여전히 강했다 - 시사저널
- 뉴진스 이을 5세대 아이돌은 언제쯤 대세가 될까 - 시사저널